태권도 병영일기 (5)
가슴 아픈 현실
신병교육대를 퇴소하고 소속부대 버스로 여단 본부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모처럼만에 창밖으로나마 바깥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일산 시내를 지나는데 비록 6주간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우리들의 눈에 비친 바깥 세상은 자동차, 건물,사람 등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일산 시내를 지나 20여분이 지났을까, 우리를 실은 버스는 파주를 향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서로들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연신 긴장된 표정으로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수심 가득한 얼굴로 창밖의 풍경들만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도 창밖만 바라보고는 있었지만 사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한참을 달리던 끝에 차가 멈춰선 곳은 전방의 한 GOP(강안) 초소였다. 참고로 철책 경계는GOP, GP, 강안, 해안으로 나누어 진다.
우리는 보충대 조교의 인솔에 따라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아직까지도 상황파악이 전혀 안되고 있었는데 산 정상까지 올라 왔을 무렵 우리는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분단의 비극, 한민족 고통의 산실인 155마일 서부전선에 위치한 임진강 바로 앞에 와 있던 것이었다. 철책 넘어 여느 시골 풍경과 다름없이 평화롭고 한적하게만 보이는 곳이 북한이라는 사실에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저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우리는 박물관을 둘러본 후 여단 교육대장의 설명과 함께 개인적인 면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북한쪽을 바라보며 굳은 결심과 함께 서약식을 치러냈다. 당시 서약서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분단의 현실 앞에 목숨을 마치느니 적의 어떠한 도발도 허용치 않는다느니 통일을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등 내용은 꽤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산을 내려와 우리를 실고 달리던 버스가 도착한 곳은 앞으로 3박4일 동안의 대기 기간을 보내야될 여단 보충대였다. 자대에 와서 느낀 것이지만 신병교육대의 딱딱함보단 훨씬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다. 가끔 보충대 조교의 심술로 삭막한 분위기로 이어지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신교대보다는 훨씬 편했었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매우 분주해졌다.
여단장님 신고식도 있고 주특기 부여 및 총기 분출 등 진짜 군인의 모습을 조금씩 갖춰가고 있었다. 보충대를 떠나기 전날 저녁, 우리는 간부 목욕탕에서 온수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신교대에서의 불과 3분만에 샤워는 물론 빨래까지 끝내야 하는 총알샤워가 아닌 느긋한 온수 목욕,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빨래까지 다 끝내놓고 보충대 조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늘상 듣는 말이지만 군생활 열심히 해라, 처음에는 힘들지만 짠밥 먹으면 편해지니까 조금만 참고 견뎌라 등 모두 우리를 걱정해 주는 말들 뿐이었다. 그런데 한 조교의 마지막 멘트가 우리를 긴장의 도가니로 몰고갔다.
"지금은 웃는 얼굴로 내가 너희들을 보내지만 행여나 자대생활하다 실수라도 해서 군기교육대 들어와 다시 보지 않기를 바란다"며 우리를 다시 한번 긴장시켰다.
하긴 자대에 가서 아주 쬐그만 실수로 3박4일 갔다오기도 했지만 정말로 갈만한 곳이 못된다. 한마디로 아주 죽음이다. 하지만 그때의 일이 추억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쩝! 부대 특성상 보충대 조교들이 군기교육대 조교까지 두가지의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제 부터가 시작이다
마침내 3박4일간의 대기도 끝이 나고 우리는 소속부대 예하대대로 배치를 받게 되었다. 이별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또 다시 잔혹함을 맛봐야 했다.
그래도 나는 동기들이 4명씩이나 같은 부대로 배치받아서 다행이었다. 그중에 혼자가는 동기들은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다. 우리를 실은 닷지트럭은 인근부대를 순회공연이라도 하듯 차례로 돌며 우리를 소속부대로 인계시켰다. 나와 동기들 4명은 마지막으로 인계되었다.
우리를 마중나와 있는 대대 인사행정관을 따라 지휘통제실로 들어서는데 한 간부가 행정병에게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순간 우리는 정신이 바짝들었다. 정말이지 덩치는 산만한데다 생김새는 임꺽정 패러디에 계급은 상사였는데 어찌나 고함소리가 크던지 놀래서 심장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우리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FM 칼각을 잡고 앉아 마른 침을 삼키며 불안에 떨고 있는데 갑자기 그 상사가 우리를 째려보는 것이었다. 헉! 하늘이 무너지는듯 했다. 그리곤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와 멈춰서서 하는 말이 완전히 엽기 그 자체였다.
"얘들아 까꿍! 어이쿠! 우리 병아리들 왔네, 아가야 너는 어디서 뭐하다 왔냐, 그리고 너는?" 등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우리들을 너무나도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 상사가 언제 또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상사는 우리가 중대로 배치받기까지 대기하는 동안 끝까지 잘 해주었다. 나중에 대대 사람들에게 그 상사에 대해 물어봤는데 심성은 좋은 사람인데 업무에 대해선 철두철미하다는 것이었다.
순간 사람의 속은 겉보기와 다르다라는 속담이 뇌리를 스쳐갔다. "와! 군대에 와서 많이 배우는구나!"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후로 1박2일간의 대대 대기를 끝마치고 저녁 8시쯤 소속 중대의 중대장님이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제대하고 나서 느낀 것이지만 군대는 대기와 신고로 시작해서 대기와 신고로 끝나는 것 같다. 참으로 지루하다. 동기 2명은 대대 안에 있는 중대로 배치받고 나와 또다른 2명은 영외 중대로 배치받아서 갔다.
이제 더이상의 이별은 없다. 처음에는 이별을 한다는 것에 맘이 많이 아프고 정말 슬펐는데 이제는 무덤덤해진다. 중대장의 티코 승용차를 타고 불빛 하나 없는 시골길을 달리는데 어느 정도 지났을까, 어디선가 이상한 방송이 흘러나온다. 귀기울여 들어보았더니 다름아닌 북에서 흘려보내는 대남방송이었다.
헉! "아니 지금 이양반(중대장)이 어디로 가고 있는거지, 설마 GOP로 가는 건 아니겠지?"라며 잔뜩 긴장을 했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다행이 GOP는 아니었지만 155마일 철책에 가장 근접해 있는 예비부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대가 어딘지 모르게 무척 삭막해 보였다.
전혀 정이 안가는 부대였다. 하지만 내가 2년 동안 젊음을 바쳐야할 곳이기에 무엇보다도 빨리 적응을 하는게 급선무였다. 우리는 중대본부에서 자대 첫날 밤을 보내고 이튿날 여단 위문공연에 갔다왔다.
위문공연 간 고참들의 세심한 배려로 한층 긴장감을 풀 수 있었다. 위문공연 관람을 마친 후 우리는 곧바로 중대로 복귀해 중대장 신고를 한 후 각자의 소대로 배치받았다. 3명이 같이 왔는데 하나는 다른 소대로 가고 나는 나머지 다른 동기와 같은 소대로 배치를 받았다.
행정병의 인도로 소대를 들어서는 순간 "야! 신병 받아라"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대 고참들의 장난과 질문공세는 끝없이 이어졌다.
너 누나나 여동생 있냐?, 사회에서 뭐하다 왔냐?, 춤한번 춰라 등등 너무나도 곤혹스러웠다. 하긴 나도 말년엔 그 재미로 군생활 버텼지만, 쩝! 아직은 신병이라서 그런지 의외로 아주 잘 대해주었다.
하지만 고참들과의 달콤한 시간도 잠시 우리는 중대 120명 고참들 서열 및 이름외우기,10대 군가및 중,소대가 외우기 등 암기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시간은 충분했지만 생판 처음 보는 사람 이름외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때 군가와 이름을 얼마나 외워 댔는지, 부모님 이름도 기억이 안날 정도였다. 병 5대 금기사항의 하나인 암기행위 금지규정이 있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타만 안하면 4대 금기사항은 허용된다는 생각들이었다.
그 이후로 내가 상병진급 이전까지 군에서 구타사고 처벌규정이 엄격해짐에 따라 사고발생률이 점차 감소하더니 상병을 단 이후로는 구타행위만은 확실히 근절됐다.
필자의 소견으론 군대에서의 악폐습은 아무리 돌고 돈다지만 구타사고만큼은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신교대를 퇴소하면 군생활이 끝나는줄만 알았는데 이제 부터가 시작이란다.
휴~ 내 앞으로 남은 군생활의 끝은 과연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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