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武)란 무엇인가
무(武)란 무엇인가
무(武)란 무엇인가? 우리는 앞의 삶의 이론에서 삶이 문(文)과 무(武)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중요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살펴 보았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자식이라는 결정체를 이루듯이 무(武)는 문(文)을 통해서, 문(文)은 무(武)를 받아들임으로서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즉, 무(武)는 문(文)과 함께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 중 하나인 것이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자체도 그러한 개념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한편 우리가 무(武)의 개념을 깨닫고 재인식 해야 하는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무(武)의 개념을 제대로 알 수 있을 때 앞으로 삶의 발전에 기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무(武)라는 것이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개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틀에 묶여 아둥바둥 하는 자가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 행동하지 못하면 그것은 모르는 것만 같지 못하는 것이 된다. 즉, 자신의 개념의 틀이 만약 잘못되어 있다면 그러한 틀을 과감히 깰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렇듯 삶을 한 차원 넓게 파악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모습으로의 변모가 바로 무(武)를 새롭게 재인식해야 하는 필요성인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입각하여 이제 무(武)에 대해 좀더 구체적, 현실적으로 접근해 보자. 무(武)의 글자 그대로의 어원은 두 이(二) 에, 창과(戈), 그칠지(止)가 모여 이루어진 글자로서 두 사람의 싸움을 그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어떻게 하여야 싸움을 그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거기에는 두 가지 상황을 예측할 수 있겠다.
첫째, 상대방과 힘이 같아지든지 둘째, 상대방보다 강해 지는 것이다. 한 예로 수학에서 수평선은 서로 만나지 않으며, 실선은 점선을 포함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처럼 힘도 같든지 강하게 되면 균형 관계상 싸움이 그치게 되는 무(武)의 기본 개념으로 흐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보다 힘이 적은 상태에서 같거나 강해 지려면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할까? 그러한 방법은 바로 무(武)의 개념에 입각하여 자신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여 상대와 같거나, 보다 강해 질 수 있도록 힘의 균형을 바로 맞추는 무(武)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사상을 가짐으로써 수심(修心)이 아닌 수신(修身)을 강조해 왔다. 수신(修身) 이란 몸을 닦는다는 것이다. 왜 사대부적 선비사상을 고수해 온 문인들이 마음이 아닌 몸을 닦는다는 개념을 주장했던 것일까?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조화로운 인간 삶을 의도한 조상들의 지혜였던 것이다.
우리는 간혹 마음이 행동을 지배한다는 쉬운, 어쩌면 당연한 결론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육체에 의한 행동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음으로는 결심하나 몸과 행동이 육체의 지배를 받게 되는 단편적이긴 하지만 중독성(술, 담배등)에 대한 예들은 신체적인 영향이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부분들을 가볍게 볼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새해를 맞아 일찍 일어나겠다는 굳은 결심도 작심삼일이란 말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경험은 누구나가 한번쯤 겪어 보았음직한 예라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의도하는 것은 신체적인 단련이 더욱 중요하다거나, 정신적인 극대화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만은 아니다.
몸을 닦음으로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마음을 정립함으로서 몸을 소중히 단련하자는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인간 삶을 의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칼을 쓰려면 평소에 그 칼을 갈아 두어야 한다. 칼날이 서 있지 않으면 내가 베고 싶은 목표를 벨 수가 없다. 즉, 몸을 갈고 닦는 단련을 하여 마음이 원하는 곳에 쓰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것(힘의 균형)을 얻을 수 있다.
병원에 있어 본 사람은 건강의 중요성을 안다. 우리의 몸, 건강과 같은 무(武)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무(武)는 큰 개념상으로 볼 때 가시적, 육체적, 행동적인 부분을 총칭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 상의 의미일 뿐 효과적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의 시점을 조금 좁히고 제한하여 살펴볼 필요성이 있겠다.
무(武)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단편적 개념들 중 하나인 무술(武術), 무예(武藝), 무도(武道) 라는 세가지 개념들을 살펴보자. 우리는 이러한 단어들에 낯설지 않다. 생활에서 많이 접해보았을 것이고 그 이미지 또한 머리 속에서 형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술(術), 예(藝), 도(道) 각각의 낱말이 가지고 있는 개념상의 의미와 민족 문화, 기질상의 특징과 차이점에 대해서까지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는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러한 시각상의 특징을 구분하여 언급할 필요성 또한 없을 듯하다. 공통점은 무(武)요, 차이점은 낱말상의 술(術), 예(藝), 도(道)인데 이것은 자동차의 원리는 하나이나 각자의 취향과 개성에 따라 다양한 디자인과 제품상의 특징만 있다는 것과 견주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武)가 술(術), 예(藝), 도(道)이고 한편으론 술(術), 예(藝), 도(道)가 무(武) 자체인 것이다. 즉 술(術), 예(藝), 도(道)는 무(武)를 표현하는 개성있는 표현 양식이며, 무(武)라는 공간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도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매일매일 똑같은 옷만 입는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옷을 바꿔 입을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것인데, 그에 따라 개인의 이미지가 조금 달라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무(武)가 바로 사람이고 술(術), 예(藝), 도(道)는 그가 입은 표현일 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무(武)의 현대적 모습 중 우리와 친밀한 스포츠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현대는 각종 매스컴이나 대중 매체, 올림픽 더 나아가 생활 속에서 많은 스포츠를 접하거나 그 종목들의 선수 차원을 넘어서서 개인과 여러 단체들이 스스로 각종 스포츠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가 왜 이렇듯 스포츠 천국이 되었는가? 그 이유는 스포츠를 통해 현대인들은 정신적 스트레스 해소와 생활에서 신체의 리듬과 건강을 찾을 수 있고, 위험성을 배제한 경기 규칙이 있어 안정성과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타락하기 쉬운 현대 사회의 모습 속에서 건전하고 바람직한 여가 선용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써 보고 즐기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포츠는 현대의 중요한 생활의 한 영역을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스포츠의 발생 배경과 개념을 다시 인식해야 할 부분이 있다. 문명이 생활의 편리를 가져오기 이전에 사람들의 삶은, 원시적인 육체 노동을 통하여 해결해야 했던 시대였다.
예를 들어 목적지까지 걸어갔으며, 스스로 일을 하여 자급 자족 형태의 생활을 하였고, 전쟁에선 맨손으로 격투를 해야 했으며 이러한 모든 것들의 결과는 자신의 육체적 능력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한 것이 현대 과학 문명의 발전을 통해 자동차를 이용하고 기계를 사용하며 보턴 하나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인스턴트(instant)시대로 흐르게 된 것이다.
이럼으로써 현대 사람들의 육체 사용(武의 개념)은 지극히 작은 범위로 축소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육체적인 문제점들(각종 질병, 체격의 발달에 반비례한 체력 저하, 정신력의 약화 등)을 낳게 되어, 스포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전체적으로 심한 불균형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문(文)과 무(武)로 이루어져야 할 우리 삶의 균형 있는 모습이 문(文)을 추구하는 삶으로 중심이 이동되며 거기에 더하여 과학 문명이라는 날개까지 달아 문(文,과학)이 무(武)의 자리를 침식해 들어가게 된 것이고 무(武)의 개념이 줄어든 공간에 스포츠가 무(武)의 일환으로써 들어가게 되었으며 문(文), 과학, 스포츠라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과학은 문(文)과 무(武)의 편리함을 우리에게 주었다. 하지만 문(文)과 무(武)의 양쪽 모두에게 많을 것을 가져간 것(인간의 육체를 정체되게 만들고 나아가 생각마저도 멈추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자연까지 오염, 파괴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앞으로도 과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생활의 편리)을 주고 많은 것을 가져가는, 어쩌면 시대상으로 당연한 일을 계속할 것이며 과학의 발전과 스포츠의 자리매김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文), 과학, 무(武)라는 균형 관계를 유지하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만약 문(文), 과학, 무(武)로 이루어진 균형 자리에 현대의 스포츠가 들어가 자리하고자 한다면 스포츠가 무(武)를 대신할 만한 능력과 무게를 포함하는 압축된 개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스포츠는 무(武)를 대신할만한 무게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즉,스포츠는 현대적 무(武)라 할 수 있지만 삶과의 연관성이 적은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자. 스포츠에는 규칙과 법칙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즐기기엔 좋으나 보다 자유로운 생활 범위에 활용하기엔 그러한 제한들로 인해 무리가 따르며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간혹 무인중에 거리의 파이터에게 당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은 실력을 떠나 거리의 파이터가 변칙에 능하기 때문이다. 변칙은 모든 자유 상황을 의미한다. 규칙과 법칙이란 제한의 틀에서 수련하고 적응된 스포츠인이 자신의 규준의 틀에서 안주함으로 전체를 못 보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두 자동차가 스포츠상의 제약과 규칙이 있는 경주를 한다고 가정하자. 두 차는 똑같은 출발선에서 똑같이 출발해야 하고 정해진 루트를 달려야 한다는 규칙을 적용 받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엔진의 우수성과 운전자의 기술의 우위에 따라 승부가 난다.
물론 노력의 결과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B라는 차가 A를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며, 스포츠의 한계라 할 수 있다. 한편 우리의 삶(武적 개념)은 어떤가? 규칙에 얽매일 수도 없고 한계선도 없는 것이다. 즉, 무(武)적인 개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데, 앞서 말한 두 차 중 B자동차가 스포츠라는 한계상황에서 A자동차에게 4초의 시간으로 패했다면 다시 4초 먼저 출발했을 때 시간 차를 극복할 수 있다.
무(武)의 개념에서는 같은 출발선이나 같은 스타트라인이라는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스포츠는 생활의 일부분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스포츠를 생활과 일치시키며 스포츠적인 개념(규칙과 제한)으로 살아가지는 않는다.
혹 누군가가 스포츠를 통해 위에서 말한 거리에서나 사회에서 승리하였을 경우, 그것은 바로 스포츠의 규칙과 법칙을 넘어선 것이고 그 순간이 바로 무(武)를 경험한 것이며 이러한 경험은 스포츠를 넘어서 무(武)의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배우려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무(武)와 스포츠의 관계를 더욱 잘 알기 위해 또 다른 비유를 통해 살펴보자. 무(武)가 자연의 거목이라면 스포츠는 그 거목을 흉내내기 위해 축소시킨 분재라 할 수 있다. 물론 분재의 효용성과 장점은 뛰어나다. 쉽게 집안에서 보며 즐기고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모양마저도 실제 나무와 거의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분재는 화분 속이라는 제한된 틀에서만 살 수 있다. 거목과 모양은 비슷하나 그 크기가 다르고 자연과의 교감이라는 가장 큰 핵심이 없는 것이다. 본질을 향하는 문(門)이 될 수 있지만 그 본질을 왜곡할 우려도 있다.
만약 무(武)의 자리에 스포츠가 올려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과는 뻔하다. 문(文)과 스포츠를 통한 삶의 기울기는 평행을 이룰 수 없고 문(文) 쪽으로 치우칠 것이다.
삶의 균형을 이루는 무게가 100Kg이고 문(文)의 무게가 50Kg, 무(武)의 무게가 50Kg 인데 스포츠는 10Kg 정도의 무게밖에 나가지 않으니 문(文)과 무(武)의 균형 상태에서 문(文)과 스포츠의 다음 상태는 예상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를 통해 술(術), 예(藝), 도(道) 나아가 무(武)로 나아가는 여건은 된다. 다시 말해 스포츠 자체만으로도 가치는 있다. 그러나 여기에 만약 스포츠의 틀을 벗어나 무(武)라는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면 그것의 본질적인 부분은 다시 한번 망각되고 왜곡될 수 있는 어려움과 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武)와 스포츠의 정확한 정의와 개념상의 인식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 이유는 삶의 질을 한 차원 높이기 위해서이다. 정리 차원으로 야구 경기 관람의 예를 들어 보자.
경기 관전을 위해서는 우선 경기장을 찾아간다. 스포츠란 정문을 지나 경기장에 들어갔을 때 다시 경기장 자체의 문(術,藝,道)은 여러 개가 나 있다. 어디로 들어가는가의 선택은 개인의 편의고 취향이며 개성이다.
그러나 일단 들어가게 되면 시점만 다를 뿐 야구 경기, 즉 무(武)라는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을 서로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무(武)를 이룬다는 것은 무(武)의 개념을 이해하여 그것을 생활에 적용시키는 생활화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삶에서 육체의 건강과 스포츠, 술(術), 예(藝), 도(道) 모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개념들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면서 생각이 행동을, 행동이 습관을, 습관이 인생을 자유롭게 하며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로써 충분하다.
어부가 자식에게 물고기만 주면 나중에 어부가 죽었을 때 자식은 물고기를 다시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낚시법(원리)을 가르쳐 주었을 때 어디서나 그것을 적용해 응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듯, 무(武) 개념을 삶의 원리 부분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입장에서 생활에 적용해 나아갈 때 그 가치가 살아 숨쉴 것이다.
무(武)란 무엇인가? 무(武)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결론은 무(武)란 우리 삶의 가시적 표현의 모든 것이며, 이런 모든 것들을 사람들 각자의 생활에서 능력의 극대화를 위한 실천적 방법의 낚시 법이다라고 정의한다.
모든 것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하여 살아간다. 하지만 옛날의 효도와 지금의 효도가 변한 것은 유행에 따라 달라진 옷 모양과 갔지만 기본적 기능과 용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 무(武)라는 조금은 구시대적(舊時代的)인 옷 보다는 현대에 맞는 스포츠라는 옷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입혀 지고 있다. 하지만 옷이 가져야할 기본 기능을 상실해서는 안될 것 같다. 스포츠라는 겉옷을 입되 무(武)라는 기본적 개념을 가진 속옷을 함께 입기 바라며 그렇게 할 때 진정한 무인(武人) 또는 스포츠인이 되어 삶을 균형있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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