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연재 -7] “미국 올림픽위원회 가입하다”

미국 민경호 박사, 태권도 수기공모 당선작 기획연재 - 7 -


[6편에 이어 계속]

민경호 박사

미국 체육회 태권도위원회는 미국 가라데 위원회가 분열되고 위축되는 것과는 반대로 고도로 조직화되고 급속도로 발전해가는 스포츠협회가 되었기 때문에 위원회의 지도부는 당연히 다음 단계로서 미국올림픽 위원회와 직접적인 결속을 추구하게 되었다.

태권도 위원회가 미국 체육회를 통해서 미국 올림픽 위원회에 가맹되어 있었지만, 태권도 지도자들은 미국 체육회라는 방대한 관료적 체계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집행 위원회는 태권도 위원회가 미국 올림픽 위원회에 가입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나는 미국 올림픽 위원회에 가입신청서와 미국 태권도 연맹의 정관을 보내게 되었다. 이 신청서는 마침 1978년에 미국 하원에서 통과된 아마추어 스포츠 법령에 큰 힘을 얻었다. 그 내용은 모든 스포츠 단체는 독립적으로 협회를 조직하고, 자신의 고유한 기술 전수 과정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미국 올림픽 위원회가 직접 관여한다는 것이었다.


플로리다 협회. 오른쪽 두 번째가 회장을 맡았던 권재화 관장이다.

미국 체육회 태권도 위원회의 신청서는 이 새로운 법령에 적합한 것이었으며, 하원이 구상하였던 조직의 형태를 반영하였다. 1978년 4월 15일은 미국 태권도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또 하나의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이다. 미국 올림픽 위원회 (USOC) 대의원들이 플로리다의 레이크 부에나 비스타에서 있었던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미국 체육회 태권도 위원회(AAU Taekwondo Committee)를 “C” 클라스 회원으로 가입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는 곧 미국 올림픽 태권도 운동을 주관하는 기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또 태권도를 올림픽 스포츠로서의 가능성이 있는 종목으로 미체육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계기로 위원회는 1984년도 LA 올림픽 때부터 이익금을 배당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3개 지역의 올림픽 트레이닝 센터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미국 올림픽 위원회(USOC)의 역도 대의원이던 하와이 출신이며 한국계인 리챠드 유 박사 (Dr. Richard You)가 김 총재에게 태권도를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 가입하도록 권유하며 많은 수고를 했고, 나에게 팬암 게임에 회원으로 등록하여, 태권도를 “A”클래스 스포츠로 상승하도록 노력하라고 조언을 하였다. 유 박사와 나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던 23회 올림픽 유치 위원회에서 같이 일을 하기도 하였다.

성공적인 회장임기 완수

미국 체육회 총회 기간 중인 1978년 11월 29일 마이애미(Miami, FL) 전미 체육회 태권도 위원회 회의에서 나는 미국 체육회 태권도 위원회 회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4년 동안 나는 분산되고 조직되지 않았던 태권도 수련생들과 사범들을 통일되고 조직적인 기구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 했다. 또한 이 조직은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가맹단체로서 세계 태권도 연맹과 미국 체육회와 올림픽위원회로부터 유일한 단체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나의 후임으로는 부회장으로 지난 2년간 활동해 온 워싱턴디씨(Washington D. C.)의 하워드대학에서 체육과 교수인 양동자씨가 선출되었다. 나는 4년 동안 미국 태권도의 초석을 다지는데 자기 돈과 시간을 내어 참여해 주신 모든 태권도 지도자들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한다.

팬암태권도연맹의 조직


미국체육회 태권도 위원회가 점차 자리가 잡혀가던 1976년부터 나는 팬암 조직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우선 북미주 협회를 조직하여 버클리,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토론토(캐나다)등에서 1977년부터 해마다 시합을 주최했다. 남미와 중미도 같은 방법으로 조직되도록 후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1977년에 시카고에서 열린 제3회 세계대회(1977년 9월 14일-17일)를 기해 팬암 연맹(Pan American Taekwondo Union)을 김운용 총재의 참가 하에 조직하게 되었다.

김 총재의 의견에 따라 코 큰 현지인이 회장을 한다는 취지에서 제3회 대회가 열린 시카고 대회에서는 대회장인 신경선씨의 제자인 댄 마로(Dan Marrow)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내가 사무총장으로 일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미리 준비한 회칙을 통과시키고 다음 해인 1978년 9월에 제 1 회 팬암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대회 장소는 멕시코 시로 문대원 사범이 대회장을 맡아 모든 준비를 하였다.내가 준비하고 시카고에서 통과된 회칙에 따르면 팬암 대회는 3개 지역인 북, 중, 남미지역에서 돌아가면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다.또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 대표가 팬암 회장을 맡아 2년씩 돌아가며 회장직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에서 있었던 제 1 회 팬암 대회를 기해서 4년 임기로 중임할 수 있도록 회칙이 개정되었다.이것이 결국은 팬암 조직에 많은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팬암 게임에서 태권도가 아시안 게임보다 일찍 공인을 받아 올림픽에 한 발짝 더 가깝게 되었는데, 그것은 김운용 총재의 많은 노력과 집념의 결과였다. 그와 관련해 전해고 싶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미 체육회에서 팬암 스포츠 조직(PASO, Pan Am Sports Organization)을 대표하는 뮈겔 디캐플리레스 (Miguel Decapriles) 라는 교수가 있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헤이스팅스 법대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그가 가라데에 호감을 갖고 태권도의 팬암 진출을 방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김운용 총재에게 전했다.

그러자 김 총재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였다. 그와 나는 디캐플리레스 교수의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그는 마침 강의 중 이었다. 김 총재는 나와 함께 그가 사무실로 돌아올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그의 그런 집념에 나는 그만 감동이 되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팬암게임에 태권도가 가입되었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해준 사례이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1981년에 내가 팬암 태권도 연맹의 회장이 된 일이다.제 2 회 팬암 태권도 선수권 대회가 텍사스 주의 휴스턴에서 있었다. 미국 체육회 태권도 위원회 당시 회장이었던 양동자 회장이 중심이 되어 나를 팬암 회장으로 추천하여 만장일치로 선출하였다. 양회장은 나의 후임으로 태권도 위원회의 회장이 되었는데, 나를 예우하여 회장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팬암 연맹이 지난 2년 동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음은 물론 김운용 총재가 팬암 게임에 태권도를 공식 종목으로 넣으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김 총재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그가 휴스턴에 오는 대로 상의를 하였는데 그의 반응이 그렇게 긍정적이 아니었다.

시카고대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래도 코 큰 사람이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평소 나는 태권도가 세계화에 박차를 가 하려면 김 총재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철저히 믿어왔다. 그래서 나 대신에 태권도를 미국 체육회에 가입하는데 절대적 공로자인 데이빗 리빈즈 회장을 추천하기로 하였다.

나는 3개월 팬암 회장을 한 셈이다. 그 후로 팬암 태권도 연맹 조직에 공로가 있고 영어와 스페인어를 잘하는 문대원 사범을 사무총장으로 추천했고 나는 기술 심의회 의장으로 일했다. 그것이 팬암 연맹에서 나의 마지막 직책이었다.


[8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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