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6] 미국 태권도연맹의 변화
미국 민경호 박사, 태권도 수기공모 당선작 기획연재 -6-
[5편에 이어 계속]

민경호 박사
미국 체육회 태권도 위원회는 1976 여름에 많은 한국과 연관된 여러 행정조직들과 개인 조직을 통합하기 위해 여러 가지 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6월에는 버클리대학 무도프로그램을 통해서 포괄적인 태권도 기술 및 심판규정에 관한 세미나를 주최했다.이 세미나는 기술 수련뿐만 아니라, 교육 및 훈련 방법, 경기 규칙과 운용, 심판, 행정적인 사항들, 승급 및 승단 요구 사항 등을 다루었다. 10월의 미국 체육회 총회에 앞서서 승급, 승단에 필요한 각 띠별 자격 조건이 우리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미국 태권도 연맹은 일맥상통하는 조직의 목적을 외부사람들에게 확고하게 알리지도 못했으며, 세계 태권도 연맹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지침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국에 퍼져있는 태권도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서 회의에 참석하도록 종용하였다.
어려운 질문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 질문들에 답을 찾지 못하면 위원회의 존립목적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위원회가 자체적으로 급증, 단증을 발부할 수 있을 것인가?만일 미국 체육회가 이를 반대한다면, 다른 대안은 무엇인가?또한 만일 다른 어떤 태권도 단체가 미국체육회에 등록하고자 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이를 제재, 감독할 수 있겠는가?장시간의 토론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승급, 승단제도의 마련에는 실패하였다.
그해 11월 미국 체육회 사무총장인 올란 캐슬(Ollan Cassell) 미국태권도연(USTF)에 대하여 당혹함을 표현하였다. 그것은 내가 시작하고 편집장으로 있던 잡지인 아메리칸 태권도 (American Taekwondo)라는 잡지에 USTF연맹의 활동상과 미국 체육회 태권도에 관한 소식이 실려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미국 체육회 사무총장인 올란 캐슬이 미국 태권도 연맹의 본질에 대해서 묻는 편지를 나에게 보내 왔다.“연맹의 조직구성과 목표는 무엇인가?”“연맹은 미국 체육회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하는 질문 등이 주된 것이었다.
한 달 후에 캐슬씨는 다른 편지를 보내서 미국 체육회와 미국 태권도 연맹관계가 서로의 이익에 상충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그는 내가 태권도 연맹으로부터 사직하고, 미국 체육회의 중재자를 통해서 두 단체가 분리될 것을 충고하였다.
그러나 나는 미국 체육회의 거대한 조직에 비하면, 미국 태권도 연맹은 조그마한 부속 조직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며 재차 USTF의 취지는 태권도 승급심사의 그 기술적인 면의 기본적인 체계의 확립일 뿐이라는 점을 거듭 설명하여 그를 이해 시켰다. 물론 유도의 경우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로써 미국 체육회와 연맹간의 갈등은 일단 해소 되었고 USTF는 등록절차와 급, 단증제도에 관한 체제를 마침내 수립하여 공식화 할 수 있게 되기에 이르렀다.
제3회 전미대회와 제 1회 북미주 태권도 대회
1977년은 태권도 선수들에게 있어서 아주 바쁜 한 해였다. 시합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시합 규정의 불규칙하고 일관성이 없다는 점을 시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체육회 태권도 위원회는 버클리 대학에서 제 1회 전국 심판 강습회를 시작하고 지원하였다.
이 강습회는 미국 체육회의 정관, 심판과 부심의 책임, 그리고 심판 신호, 용어 및 심판 과정들을 전반적으로 다룬 것이었다. 태권도 위원회는 지역, 전국 및 국제 자격의 53명의 심판 자격증을 발부하였다.
강습회 다음 날, 두 개의 시합이 버클리 대학에서 있었다. 3월 5일과 6일, 이틀에 걸쳐서 전미 태권도 대회와 북미 태권도 대회가 있었다. 첫날에는 520명의 선수들이 제 3회 미국 체육회 태권도 대회에 참석하였다. 모두들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이 대회의 승자가 다음 해 시카고에서 있을 세계 대회에서, 미국 각주에서 온 가장 뛰어난 선수들과 겨루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심하였다. 선수들은 첫째 날의 시합이 끝나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다음 날 멕시코 팀과 제 1 회 북미 태권도 대회(멕시코, 캐나다, 푸에르토리코 참가)에서 최종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도 미국 태권도 선수들은 제 2회 세계 대회 때와 비슷한 문제들을 경험하게 되었다.보호 장비에 익숙하지 못한 점, 시합이 중간에 끊이지 않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길게 느껴진다는 점, 손사용에 관한 규정 등이 익숙지 않은 점이었다.
이날 많은 선수들이 전국 대회에서 부상으로 불참했기 때문에 미국 팀은 적은 수로 멕시코 팀을 맞아야했다. 우리 팀은 경험이 적고 나이가 어려서, 경험이 많은 멕시코팀을 대항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열심히 싸웠으나, 멕시코 팀이 8개 매치 중 5개를 이겨 우승팀이 되었다.
제 3 회 세계 태권도 대회 (1977년)

77년 제3회 세계대회 시상식이 끝난 후 한국팀과 미국팀이 기념촬영을 했다.
1978년에 있을 제 1회 월드 게임과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제3회 세계대회가 1977년으로 옮겨진 것을 우리 태권도 위원회는 1976년 봄에 공문을 받게 되었다. 갑자기 세계 대회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나는 기금 조성뿐만 아니라, 대회 후보 도시로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샌디에고 및 피닉스 등 개최지를 선정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주최하는 도시로부터 참여하고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서 1981년 산타클라라 (Santa Clara)에서 있을 월드 게임의 디렉터이고 세계 대회 조직에 경험이 많은 할 엎링거 (Hal Uplinger)씨가 많은 수고를 하였다.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서 새로 형성된 미국 태권도 연맹에 가입하고 입회비를 보내도록 전국적으로 장려하였다.
7월 말쯤에 가서야 시카고가 제 3회 세계 태권도 장소로 결정되었으며, 오랫동안 나의 지인인, 유도인이면서 무도 용품 회사를 차린 신경선 씨가 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회는9월 15-17일로 예정되었다.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 대회는 미국 태권도의 통일과 발전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또한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세계대회를 개최한다는데 큰 뜻이 담겨져 있었다.그래서 김운용 총재와 같이 미국전역을 돌며 태권도 사범들을 만나 그들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성과는 별로 좋지 않아 심지어 대회가열리는 시카고에서도 태권도 사범들로부터도 큰 협조를 못 받았다.
태권도 위원회의 계속된 발전
1977년 미국 체육회 정기 총회에서, 태권도 위원회가 급증 및 단증을 교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약속대로, 위원회는 미국 태권도 연맹을 해체하고, 미국 체육회 승급 부위원회로 대체하였다.
그러나 위원회 위원들은 미국 태권도 연맹의 자치와 자유를 미국 체육회에 넘겨주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체육회에 태권도 승급 및 승단을 통해서 걷게 될 자금을 관리할 구좌 및 예산을 독립해서 사용하게 해달라고 했으며, 위원회의 이름을 미국 체육회 태권도 연맹(National AAU Taekwondo Federation)으로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비록 이 제안은 거부되었지만, 태권도 위원회가 아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내 임기의 마지막 해인1978년은 태권도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한 해였다.위원회는 시합 등의 일을 제외하고도 나의 주관으로 계간 태권도 잡지뿐만 아니라 미국 태권도 교본을 발간하게 되었다.
청소년 태권도 프로그램이 생겼으며, 청소년 태권도 대회가 9월로 예정되었다. 팬암태권도 연맹도 생기게 되었다. 북미주 태권도 연맹(North America Taekwondo Union)의 총회가 처음으로 열렸는데, 내가 회장으로 선출이 되었다. 그동안 태권도 옹호자인 조엘 페럴 (Joel Ferrell)이 미국 체육회의 회장으로 당선되어 김 총재를 만나러 한국을 방문하였다.
[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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