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5] 역사적인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 참관기
미국 민경호 박사, 태권도 수기공모 당선작 기획연재 -5-
[4편에 이어 계속]

민경호 박사
미국체육회 태권도위원회가 생기기 전인 1973년에 종주국에서 열린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는 미국 팀의 참가에 관한 일화가 참 많은 대회였다..우선 미국에 전국적인 공인 태권도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미 서부에 있는 무덕관 사범들을 중심 조직으로 텍사스주 달라스에 있는 고 안예모 관장과 새크라멘토에 자리 잡은 강명규관장과 내가 중심이 되어 조직이 되었다.
안예모 관장이 달라스의 코카콜라 지사의 스폰서로 전국예선을 거쳐 10명의 선수들을 선발하였다. 안예모 관장을 단장으로 내가 감독으로 강명규관장을 코치로 선발하는 등 제법 큰 규모를 갖춘 팀조직이었으나, 대회가 있는 서울을 가기 위해 로스엔젤리스 비행장 근처 호텔에 모였으나 안단장이 코카콜라에서 여행경비를 계획대로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그래서 오클라호마 (Oklahoma)주의 잭황관장 (Jack Hwang)을 급히 단장으로 추대하여 그가 낸 경비와 또 우리 임원들이 신용카드로 낸 경비로 대회에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래 안예모 단장, 민경호 감독, 강명규 총 코치로 계획했던 임원구성이 단장의 교체로 좀 허술하게 되어,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간 사범 중에는 얼떨결에 덩달아 따라온 사범들도 있었다.서울에 도착하여 나는 우선으로 주한 미국대사관 필립 하빕(Philip Habib)대사를 방문 하였다.하빕대사는 버클리 출신으로 출발 전에 나와 서신연락이 있었다.
서울 세종로의 미 대사관에 도착해 보니 미국에서 온 다른 팀 역시 세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는데, 그는 청도관계의 에드 셀 (Ed Sell)과 그의 한국계 부인 형숙 셀과 아들 둘을 포함한 6명의 선수들이었다.그래서 결국은 미국 팀은 동부, 중부, 서부 팀으로 분리되어 3개 팀이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여하간, 미국 팀은 성적이 좋아 한국 팀 다음으로 우수한 결과를 내어 한국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미국을 대표하여 세계연맹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김운용 대한 태권도 협회장을 세계태권도연맹 (WTF)의 총재로 선출함은 물론, 세계연맹 회칙을 통과시키는 역사적인 현장에 미국의 태권도를 대표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사진설명 : 1973년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 기간 주미대사관 방문에 방문 :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필립 하빕 주한 미대사, 여섯 번째가 잭 황, 그 옆이 저자, 그 옆이 강명규관장, 왼쪽에서 세 번째가 에드 셀씨.]
부회장인 현준선 씨를 코치로 제2회 세계대회가 한국 국기원에서 1975년 8월 28일까지 있었다. 미국 팀은 리빈즈 씨가 단장, 나는 팀매니저로 8명의 선수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이 시합에 참가하기위해서 모든 경비를 외부의 보조금 없이 선수와 임원들이 자비로 부담했다.
제1회 대회에서는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로 종합2위까지 했었지만, 시합의 규칙이 다르고 새로운 경기이기 때문에 기술 차이가 있어 미국 팀은 뉴저지주의 저지씨티에서 온 제랄드 로빈스 (Gerald Robbins)선수가 밴텀급에서 동메달을 따는데 그쳐, 참가한 30개국 중 전체 6위에 만족하여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이 행사가 미국 태권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이 대회를 통해서 미국 팀은 세계 태권도 사회에서 미체육회 공인 태권도 협회로 존경과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차기 제3회 세계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기회를 총회에서 위임받았다.
제1회 미 체육회 태권도위원회에서 선출된 미네소타의 현준선(Jay Hyun)부회장이 루이지애주 뉴올리온즈에서 열린 제88회 미 체육회총회 이전에 사표를 보내왔다. 이유인즉 제2회 세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오니 많은 태권도 수련생이 줄어드는데다, 미 체육회 태권도위원회를 위해 더 이상 많은 돈과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회장으로서 더 많은 시간과 경비를 쓰면서 일했기 때문에 큰 실망에 휩싸였다.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할 수 없이 2년으로 마치려했던 회장 자리를 2년 더 연장하였으며, 부회장을 2명으로 늘려 일을 수습하였다. 그래서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 나와 비슷한 처지인 하워드 대학의 양동자 교수와 미시간 대학의 정화 강사를 부회장에 추천하여 인준을 받았다.
그후의 태권도의 달라진 위상

[사진설명 : 제2회 세계선수권대회 입장식(좌) : 국기를 들고 입장하는 현준선 코치와 그 뒤 저자, 제2회 세계선수권대회 미국대표팀(우) : 국기원에서 촬영, 꽃다발을 건 사람이 리빈즈 회장, 오른쪽 뒷줄 끝이 저자. ]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1975년 미국의 태권도는 그 위상이 높아지면서 많은 발전과 안정의 궤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한국 사범들에게 카라테가 아닌 태권도 간판을 도장에 부쳐달라고 전화도 하고 편지도 써야했다.
그 해 12월에는 제88회 미국 체육회 총회가 뉴 올린스에서 있었다. 이 회의에서 태권도 위원회는 의료위원회, 대학위원회, 정관 및 부칙위원회, 경기 위원회 등의 분과위원회를 둔 큰 위원회가 되었다. 6시간에 걸쳐서 보고 및 토론을 할 정도로 조직이 커진 것이다. 여기서 제2회 세계대회에서 가졌던 세계 연맹 총회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또한 나는 승급 및 승단, 경기 규칙, 심판 자격증에 대해서 토론했으며, 무도 산하 조직의 형성에 반대하는 위원회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태권도가 대중화됨에 따라서 여성들의 참여도 높아졌다.블랙 벨트 잡지사에서는 “무술을 하는 여성(Fighting Women)” 이라는 칼럼 란에 글을 쓸 사람을 구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그래서 나는 태권도와 유도를 수련하고 있는 필리스 하퍼(Phyllis Harper)를 추천해 주었다.그녀는 여성 태권도 분과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이기도 했다. 그녀의 뒤를 김경애 사범이 이었다. 1978년 워싱턴 디.씨의 하워드 대학에서 열린 제 4 회 미국 체육회 태권도 대회에 최초로 여자선수들도 남자 선수들과 같이 시합을 하게 되었다.
1976년은 태권도 행사로 꽉 짜인 한 해였다.3월에는 버클리 대학 하몬 체육관에서 미서부지역 대학 태권도 대회를 개최했으며, 같은 달에 제 2 회 미국 체육회 전미 태권도 대회를 미주리주 캔사스 시티 (Kansas City)에 있는 펜 밸리 전문대학(Pen Valley Junior College)에서 개최하였다. 그리고 곧 루지애나주의 티보도에 있는 니콜라스 주립대학에서 제1회 전국대학연맹 태권도대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6월에는 버클리대학에서 제7회 버클리 대학연례 태권도대회를 성대히 치렀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미국체육회(AAU)와 전미 대학대항체육회(NCAA & NAIA)간의 힘겨루기와 알력은 종착역인 미 국회로 번져, 결국은 1978년에 국회에서 미국 아마추어 스포츠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 결의안에 의해 미체육회(AAU)는 미국 아마추어 스포츠의 총책을 미국 올림픽위원회(USOC)로 넘겨야만 했다.그리고 미국 올림픽 위원회는 각 스포츠를 독립조직 (National Governing Body)으로 그 체제를 21세기의 개방적인 경쟁조직으로 재편성하게 되었다.

[사진설명 : 1975년 제2회 세계선수권대회(좌) 우리를 환대하고 있는 이종우 당시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 1980년 초 시카고 전국태권도대회(우) : 오른쪽 끝부터 남태희 관장, 고 김기황 관장, 고 차수영 관장, 그리고 저자 ]
태권도 역시 미 체육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된 단체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는 왔으나, 이제 미 체육회 태권도로 태어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데다가 한국의 무도인 태권도를 미국의 스포츠 조직에 접목시켜야하는 많은 문제점들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선 1980년도에 미국 체육회 태권도위원회(AAU Taekwondo Committee)에서 미국체육회 태권도연맹 (National AAU Taekwondo Union)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84년도에 가서야 AAU를 삭제한 USTU (United States Taekwondo Union)라는 독립된 조직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최근에는 유에스 에이 태권도 (USA Taekwondo)로 바뀐 것으로 안다.
이렇게 바쁘게 활동하는 가운데서도 태권도 위원회에는 아직도 완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승급, 승단 심사 제도였다.세계 태권도 기술의 총본산인 국기원은 미국 내의 여러 그룹의 이해관계 때문에 승단문제에 대한 제도를 설립하지 못하고 있었다.또한 미국 협회에는 승급 및 승단에 대한 규칙이 없었다.또한 국기원이 도움이 없이 미국에서 태권도의 기술적 측면을 결정하는 일을 떠맡게 되면 기술적인 세계 통합 기구로서의 국기원의 위상이 걱정되었다.그래서 나는 김운용 총재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김 총재는 자신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했지만, 국기원의 승단제도를 미국 체육회 태권도 위원회를 통해 수용한다고 답신을 하였다.
그 해 봄, 나를 비롯한 미국 체육회 태권도 위원회 집행위원들은 아마추어 스포츠를 조직하고 보급하는 미국 체육회의 목표가 태권도 지도자들이 태권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과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특히 태권도 위원회는 미국체육회가 승급, 승단심사를 치루는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래서 우리는 미국체육회의 태권도 위원회의 산하조직을 새로 만드는 것을 검토하게 되었다.그것은 똑같은 조직의 집행위원들과 회원으로 구성된 다른 조직이었지만, 미국체육회의 엄격한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조직이었다. 나는 이 조직을 미국태권도연맹(United States Taekwondo Federation)이라고 명명하자고 제안했다.미국 태권도 연맹은 국기원이 세계 태권도 연맹의 기술적 지원을 하듯이 처음에는 미국 체육회 태권도 위원회의 기술적 자문기관으로 인식되었다.미국 태권도 연맹 (USTF)의 창설 모임은 이 해 3월에 캔사스 시티에서 있었다.이 도시에서는 제 2 회 미국 체육회 태권도 대회가 있었다.미국 체육회의 대표들은 이 모임과 조직에 대해서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나는 미국 태권도 연맹(USTF)의 배경의 근거를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사실상, 다른 조직들은 미국 체육회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자신들 조직의 행정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 태권도 연맹의 유일한 목표는 공식적인 승급 및 승단 절차가 미국 체육회 규정에 도입되기 전까지 미국 체육회의 기술적 일관성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나는 또한 미국 체육회가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발전시킬까봐 미국 태권도 연맹이 미국 체육회의 정책과 상반되는 경우가 있다면 이를 해체할 것이라고 맹세하기도 하였다.이 주제는 10월로 예정된 미국 체육회 연례 총회에서 크게 다루어 질 수도 있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사실 승단문제는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태권도의 세계화를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이다.
당시 미국체육회의 유도위원회는 당시 미국유도연맹 (US Judo Federation)과 체결을 맺어 단증문제와 무도 관계의 유도행정을 미국유도연맹에 맡기고 있었다.미국유도연맹은 일본 강도관의 지부역할을 하듯이 미국 태권도연맹은 국기원의 지부 역할을 하도록 조직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더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무도로서의 태권도 보급의 세계화가 경기태권도의 가치 아래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보급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양문화권에서 뿌리를 내리고 세계화된 올림픽에 태권도의 경기화를 통해 태권도를 보다 빠른 속도로 세계 속에 보급 발전시키는 것에 중점적인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경기 태권도인구는 몇 퍼센트 안 되는 소수인 반면, 90% 이상인 나머지 태권도 수련생들은 인간교육의 일환으로서 무도를 수련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태권도 진흥재단의 설립과 그 역할에 많은 희망을 갖고 있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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