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4] 좌절과 재도전 그리고 승리 -하-
미국에서 공식적인 태권도 단체의 결성과정
[3편에 이어 계속]

민경호 박사
우리가 미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리빈즈회장은 한국의 김택수 회장으로부터 미국체육회가 미국의 태권도를 조직하고 관장하도록 해달라는 공문을 받게 되었다.드디어 1974년 5월 4일 미국 체육회 집행위원회가 인디애나주 (Indianapolis, Indiana)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렸다. 이 때 태권도가 카라테에서 독립된 종목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투표가 있었다. 결과는 28대 17로 승리였다. 그런데 이 위원회에서는 태권도를 미국 체육회의 공식적인 종목으로서 허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료로서 태권도의 경기규칙, 태권도의 기술적인 측면, 카라테와 태권도의 차이점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보고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나는 ‘미국 체육회의 새로운 스포츠로서 태권도의 자격 조건을 보고서를 통해 태권도와 카라테의 주요 차이점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였다.
“태권도는 발기술이 70%이며, 몸을 자주 돌리면서 점프를 하는 움직임이 많다.경기는 2분 3회전이며 보호 장비를 사용한다.손을 사용한 머리 공격은 금지되어있다.반면에 카라테는 손기술이 70%이고 돌거나 점프를 하는 동작이 거의 없으며, 다리와 팔의 움직임은 직선적이다. 경기는 1회전이고, 심판이 득점을 선언하려고 하면 선수들의 동작을 멈추게 한다. 또한 보호 장비를 사용하지 않으며, 손을 사용한 머리 공격이 허용된다.”
미국 체육회 임시 태권도 위원회 모임을 제87회 미체육회 총회기간 중 첫날에 쇼어햄 아메리카나 (Shoreham Americana) 호텔에서 모였다. 여기서 협회 정관과 다음 해에 있을 제 2회 세계대회 등의 시합에 관해서 토론하였다. 예일대의 황인수 교수가 제1회 미국체육회태권도 대회를 예일대(Yale University)에서 할 것을 제안했다.회의가 끝날 즈음에 임원이 선출되었다.
나는 맡고 있는 일이 많았으므로, 회장직을 수락하는 것을 꺼렸으나, 새 조직을 끌어나가는데 경험과 지식을 갖춘 사람이 해야 된다는 주위 사람들의 생각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그 자리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미네소타에서 온 현준선 (Jay Hyun)씨가 부회장으로, 오하이오주에서 온 척 포트닉 (Chuck Portnick)씨는 서기 겸 재무로 선출이 되었다. 또한 2년 후에는 현준선 부회장이 회장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내가 회장을 맡은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1974년 10월 총회에서 태권도 독립 종목 채택 안건이 미국 체육회에 상정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상정된 안건이 총회의 대의원들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카라테 지도자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안건은 부결되게 되었다. 나에게는 2년간의 피나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그 동안 많은 준비를 했었다. 버클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끝나면 나는 따로 시간을 내어서 자료조사와 연구를 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태권도가 카라테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느라 혼신을 다했다.게다가, 미국 체육회 회장을 한국에까지 초청하여 태권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다른 유도 지도자들과 태권도 사범들과 함께 로비활동에 앞장서야 했었다.
지난 74년 5월에 있었던 집행위원회의에서는 잘 통과가 되었다. 그러나 6박 7일 동안 워싱턴디씨의 소라헴 아메리카나 호텔에서 열린 전미 대의원총회에서 카라테 사범들의 강력한 반대로 한 순간에 그렇게 좌절이 될 줄이야! 절망감과 안타까움에 견딜 수 없었다. 주위의 모든 태권도 사범들의 수수방관하던 모습 속에서 나는 실패한데 대한 분노와 좌절감을 한층 더 느꼈다. 카라테 협회 회장인 애킨스(Atkins)를 비롯한 카라테 사범들은 쾌재를 불렀다.분명 그들의 승리였다.
나는 리빈즈 회장에게 다가가서 실망에 찬 얼굴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았다.그는 내게 웃는 얼굴로 좀 기다려 보라고 했다. 아직 회의가 이틀 남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레슬링협의회 의원들과 유도협의회 대의원 등 서로 친분이 있는 대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태권도를 독립된 단체로 만들어 달라고 캠페인을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리빈즈 회장의 충고대로 나를 비롯한, 미국 체육회 유도위원회 회장인 김위생씨, 예일 대학의 황인수 교수 등 유도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밤새도록 유도, 레슬링에 관련된 대의원들을 쫓아다니면서 설득을 하였다.
아무튼,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이 헛되게 느껴지던 총회의 폐막 하루 전날, 미국 체육회 집행위원회는 우리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피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안건을 다시 조정하여 제안하도록 조치를 하였다. 카라테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을 포함한 많은 반대파 대의원들은 태권도와 다른 무도가 미국체육회에서 하나의 조직산하에서 하나의 공통된 규칙을 가지고 경기하기를 바라는 반면, 어떤 그룹의 사람들은 무도의 다양성을 인식하여, 각 무도 단체가 자신의 고유한 경기 규칙을 운영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들 모두는 태권도가 미국 체육회에 인준을 받는 것에 찬성하였다.
드디어 총회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 날은 주말이기도 해서, 태권도의 독립안건이 부결되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카라테 사범들 중 많은 사람들이 벌써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남아있던 카라테 지도자들의 반대가 많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표를 통해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앞으로 미국체육회가 만들게 될 모든 무도협의회 구조에 완전히 동조할 것이라는 내용의 서류에 내가 서명을 해서 체육회 집행위원회에 제출했던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제안은 814대 149표의 압도적인 차이로 총회에서 통과가 되었다. 드디어 태권도는 미국체육회의 독립된 정식종목으로서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데이빗 리빈즈 회장에게 충심으로 감사한다.
지금은 웃어넘길 수 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연맹의 김운용 총재와 이종우 사무총장 (당시)의 연락을 받고 30여명이 넘는 재미 지도자급 태권도 사범들이 미전역에서 모여 미국에서 처음으로 공인 임시 태권도 위원회 모임을 다른 미국체육회 산하 스포츠들과 같이 가졌다. 그러데 다음날 태권도 독립 스포츠안건이 부결된 것을 지켜본 태권도 사범들은 거의 모두 골프를 치러 나가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재투표 캠페인에는 단 한 명도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그 후 10여년이상 골프 클럽을 잡지 않을 정도로 그들에게 실망이 컸었다.
이 날의 승리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체육회가 태권도를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데에 뜻이 깊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해바라기 도장들이 태권도를 코리안 카라테로 명칭하던 데에서 이제는 일본의 카라테 도장도 재패니즈 태권도 (Japanese Taekwondo)로 명칭 할 정도로 미국 사에서 태권도의 위상이 상승되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태권도가 미국 체육회에 공인 스포츠로 인정 받은 지 두 달이 지난 후, 시카고의 오헤어 공항근처의 홀리데이 인에서 모인 태권도위원회 임원들은 미국에서 태권도를 홍보하기위한 막중한 임무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은 실망스럽게도 오하이오주에 안경원 관장을 위시해 고인이 된 김영치 관장, 최준표 관장, 정영남 관장 등 네 명과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간 강명규 관장과 나 뿐이었다. 아무튼 이 모임에서 ‘제1회 미국체육회전국태권도대회’를 열기 전에 전국적인 시범대회를 열고 하부 위원회장들을 뽑으며 제2회 세계대회에 선수를 파견하기 위해서 서울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역사적인 새로운 단체 결성을 위해서 태권도 위원회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안, 카라테 위원회는 태권도가 미국체육회에 인준되기 전에 태권도와 쿵푸를 자신들의 산하 단체 소속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 체육회가 태권도를 독립시킴으로써 이들 협회장들의 계획은 좌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카라테협회의 케일러 애킨스씨는 미국의 무도를 미국체육회의 하나의 산하조직으로 묶으려고 노력을 하였다.
태권도가 미국체육회로부터 인준을 받기위해서 나는 미국체육회 내에 하나의 산하조직으로 무도를 묶으려는 것에 동조를 했지만, 이 생각이 마음에 썩 드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제 방금 만든 단체를 운영하는 것도 벅찬데 다시 새로운 단체 속에 들어가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개별 무도 단체들이 더 성장할 때까지 이 산하조직의 형성을 미루는 것을 제안하였다. 리빈즈 회장은 나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1975년 2월에 여성 카라테 위원장에서 선출된 앤 스몰 (Ann Small)과 함께 애킨스씨는 4월에 있을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하나의 무도 산하조직을 만드는 것을 안건으로 공식적으로 상정하였으나 태권도 위원회의 반대로 부결 되었다.
김운용 총재는 미국태권도협회가 형성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을 치하하고, 내가 제안한 팬암태권도연맹(Pan American Taekwondo Union) 창설에 대한 계획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해 주었고, 세계대회의 미국 개최에도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리빈즈 회장을 세계연맹 집행위원으로 추대하고, 미국체육회 태권도위원회는 미국의 태권도를 대표하는 국가단체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초 작업이 완성되었다.
미국태권도협회가 생긴지 6개월 만에 제1회 전미 태권도대회 겸 제2회 세계태권도대회 선발전을 예정대로 예일대학에서 1975년 4월 24일에서 26일까지 열었다. 대회장은 예일대학의 황인수 교수였다. 시합은 경제적으로는 많은 손해를 보았으나, 전미국의 첫 공식 태권도 대회라는 점에서 나는 대성공이라고 생각하며 미국 체육회 커네티컷주 회장인 윌리암 헐쉬가 말했듯이 “예술적 작품”이었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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