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3] "좌절과 재도전 그리고 승리" -상-
[민경호 박사, 태권도 수기공모 연재] 미국에서 공식적인 태권도 단체의 결성과정
[2편에 이어 계속]

민경호 박사
(민경호 박사) 미국에 온 많은 태권도 1세대들이 태권도를 ‘코리안 카라테’로 부르고 있던 시절, 1972년에 조성된 미국 체육회 산하 카라테 협회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태권도를 독립된 단체로 만들려고 하던 나의 꿈과 희망의 배경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첫째,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무도는 일본의 것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둘째는 복합문화권인 미국에 살면서 한국 무도를 가르치며 살고 있는 내가 이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영원히 카라테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유도가 쥬도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눈여겨보고, 읽고, 느끼면서, 또 심지어는 미국 유도 시합에서 한국 선수들의 단증이 인정이 되지 않아서, 하얀 띠를 매고서 출전했던 경험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 당장 태권도를 위해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태권도도 코리안 카라테로 인식이 되고, 카라테의 그늘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자꾸 시간이 갈수록 이런 나의 생각은 확고해졌다.그것은 미국에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카라테의 위치에 대한 의식 때문이었다.
1970년도에서 1973년도 초에는 9개의 캘리포니아 대학 9개 캠퍼스 중에 본교 캠퍼스를 제외하고는 태권도를 가르치는 곳도 없었고 태권도 시합도 없었다. 당시 50년도 말에서 60년도 말까지 태권도 또는 코리안 카라테가 미동부와 남부에 발을 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서부, 특히 캘리포니아에는 일본, 중국무도가 중국, 일본인들의 미국이민과 동시에1930년 말부터 이미 미국에 깊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모두 카라테를 가르치고 있었다.결과적으로 나는 제자들을 데리고 대학 대항 시합에 나갈 때에는 카라테 시합에 나가게 되었었다.그때마다 제자들이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 부상당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금할 수 없었다.
태권도와 카라테는 시합규정이 다른데, 주먹 공격을 위주로 하는 카라테와 발차기를 위주로 하는 태권도를 카라테 규칙에 따라 시합하는 것이 무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한국사범들을 단합 시켜 태권도를 하는 선수들끼리 시합을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 내의 태권도시합을 조직하기 위한 많은 시도를 했으나 별 진전을 못 보았다.
1970년에서 1972년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여 북가주, 남가주를 오가며 모여 서로 상의하고 토론하고 실천으로 옮기려 했으나, 해마다 치루는 버클리 태권도대회 마저도 태권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됐고, 결국, 큰 효과를 얻지 못하고 다른 각도에서 미국 체육회(AAU)에 태권도를 가입시켜야 겠다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자, 나는 어떻게 하면 이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게 되었다.그래서 유도가 레슬링협회에 산하조직으로 들어갔다가 결국에는 레슬링 협회로부터 독립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나는 미국 체육회 몬태나 (Montana) 지부의 유도 분과위원장과 대학유도연맹 회장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유도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또한 버클리 대학에 근무하면서, 이곳에서 레슬링과 유도를 가르쳤던 헨리 스토운(Henry Stone)박사가 레슬링 산하에 유도를 가입시켜 종국에는1954년에 레슬링으로부터 유도를 독립시키는데 주역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
버클리 체육학과에는 미망인이 된 스토운 여사가 나의 버클리 근무 초반기였던 1969-70년도 초에 체육학과 직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스토운 여사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였다. 본래 나는 상당히 무뚝뚝하고 비사교적인 성격인지라, 사람을 잘 사귀는 데는 소질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많은 노력을 통해 보다 사교적이 되려고 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스토운 여사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스토운 여사도 나의 의도에 동조하여, 스토운 박사의 일기장도 보여주며 유도의 독립과정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유도가 레슬링의 산하단체로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레슬링에서 독립된 스포츠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이 전례를 본받아서 태권도의 독립을 추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준비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서류 준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미국 체육회 및 지방체육회의 중요 인물들을 사귀는 데 주력하였다. 이런 차에 몬태나주의 체육회에서 같이 일했던 데이비드 리빈즈(David Revenes)가 미국 체육회의 회장이 된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데이비드 리빈즈 회장은 내가 몬태나주에서 유도분과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 몬태나주 체육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는 오랜 친분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태권도 독립의 당위성에 대해서 여러 차례 전화와 편지로 설명을 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나는 1973년 10월 미국 체육회의 총회에서 그동안 준비해온 내용을 발표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회의는 몬태나주의 웨스트 옐로우 스토운 국립공원 (West Yellow Stone National Park)에서 있었다. 버클리에서 거기까지는 943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였다. 도무지 당일에 여행하기에는무리였다. 그러나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회의가 바로 절호의 찬스라는 생각에서 회의 참석을 강행했고 그 날의 회의에 참석은 미국태권도 연맹 창설하게 된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토요일 아침 8시에 있을 회의를 위해서 나는 금요일 저녁 버클리에서 마지막 수업인 오후 2시 수업을 마치고 길을 떠났다. 당시에는 캘리포니아주와 아이다호주에는 제한 속도가 있었지만, 와이오밍과 몬태나주에는 속도 제한이 없어서 마음대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침 8시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에 질주를 하다가 아이다호주에서 속도위반으로 그만 교통순경에게 붙잡히기도 했다.한국의 군 사무소 같은 카운티 사무실에 경찰과 함께 가서 벌금을 내고서야풀려나와 회의장을 향해서 달릴 수 있었던 해프닝도 있었다. 몬태나주의 웨스트 옐로우 스토운까지 꼬박 15시간동안 가솔린 넣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는 줄곧 밤을 세워 차를 몰고 갔다.나는 기적적으로 아침 7시 30분경에 도착하여, 8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나의 발표로 인해 태권도 독립에 관한 건은 1974년 5월에 있을 집행위원회 회의와 그 해 10월에 있을 전국 대의원 총회에서 안건으로 채택이 되었다.
그때 당시 몇 몇 태권도 사범들이 카라테 협회 임원으로 총회에 직접 참석하고 있었던 것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태권도가 카라테 산하위원회에서 벗어나서 독립된 종목으로 인준돼야만 하는 이유를 나는 다음의 세 가지의 요소로 나누어 변론하였다.
첫째는 나의 설문조사 결과 내용의 핵심 중 하나로 그 당시 미국에서는 ‘코리안 카라테’로 알려진 한국의 태권도를 수련하는 대학교가 일본의 카라테를 수련하는 대학교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유일한 무도 잡지였던 ‘블랙 벨트 매거진 (Black Belt Magazine)도’이 자료를 보증하고 있었다.그 자료에 의하면, 코리안 태권도 41%, 일본 카라테 27%, 오키나와 카라테 28%, 그리고 중국 쿵푸 4%로 태권도가 다른 무도보다 훨씬 대중화되어있음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는 카라테 협회는 세계카라테연합 WUKO (World Union of Karate Organization)이고, 태권도 협회는 세계태권도연맹 WTF (World Taekwondo Federation)으로 세계 조직이 다르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시합을 운영하는 규칙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숫자와 사실에 근거한 나의 논증은 이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또한 나는 현재의 카라테위원회를 대체할 K.T.K (카라테, 태권도, 쿵푸의 첫 글자)라고 하는 미국 체육회 산하 종합 스포츠 위원회를 잠정적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물론 성공적이었던 레슬링과 유도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이런 절차를 거쳐서 일단 총회의 안건으로 채택이 되었지만, 사실은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더욱이 많은 한국계 태권도 사범들이 카라테 위원회에 한국계 (Korean Karate)를 대표하여 활동이 시작된 뒤였다.
그 동안 나는 여러 스포츠 단체와 대학에서 일하면서 스포츠 조직에서 회장의 영향력이 상당하며,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대의원들이 특정종목에 대한 경험이 없을 때는 주로 회장단과 집행위원들의 의견을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회장인 데이비드 리빈즈와 격기 담당관인 짐 스티븐스에게 한국 방문을 추진해서 태권도에 대한 인식을 높이자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나는 곧바로 대한체육회회장인 김택수씨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는 당시 김운용씨가 대한 체육회 부회장이자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므로 그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다. 물론 제1회 세계대회를 통해 알고 있는 김 총재에게 한국과의 시간차에 익숙지 않은 관계로 한국시간으로 새벽에 전화를 하게 되었다.
나는 다짜고짜 태권도를 미국 체육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미국체육 회장과 같이 한국에 방문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 총재는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을 텐데도 상황 판단을 빨리하는 것 같았다.
“오십시요.내가 경비를 다 부담하겠으니 신경 쓰지 말고 오십시요. 민 교수께서 수고를 좀 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김 총재가 굉장히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74년 미국 체육회장단 첫 방한
[사진설명 : 맨 왼쪽이 저자, 그 옆이 김운용 총재, 왼쪽에서 세번째가 데이비드 리빈즈회장, 그 옆이 김택수 대한 체육회장, 그 옆이 짐 스티븐스씨]
데이비드 리빈즈 회장과 짐 스티븐스씨 그리고 나는 1974년 4월 16일부터 20일까지 3박 4일 동안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것은 태권도를 위한 방문이었지만, 사실상 한국과 미국이 최초로 정상 스포츠 교류를 하게 된 미국 체육회장의 한국방문으로 알고 있다. 이런 계기로 태권도는 물론이고 다른 스포츠도 교류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김 총재는 우리가 한국에 있는 동안, 김종필 총리, 장기영 국제올림픽위원, 김택수 대한체육회회장, 민관식 문교부장관등과 회담을 가지도록 주선하였다.
또한 국기원 방문을 통해서 지도자 교육과 어린이들의 시범 장면을 보여주며 태권도의 홍보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방문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미국 체육회 회장은 한국 측의 배려에 깊이 감사했으며, 이번 여행이 태권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했다.
김총재 역시 그 기회를 통해서 태권도의 세계화와 스포츠 외교를 넓힐 수 있는 좋은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김총재는 미국 체육회 회장의 내한으로 총리나 장관들과의 회담에 같이 참여를 하였으며, 미국의 스포츠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스포츠계에서의 활동이 활발해 질 수 있었다.
나는 김총재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미국 스포츠 인사들을 소개해 주었으며, 김총재는 그들을 잘 파악하여 대처하였다. 이 방문을 통해서 대한 체육회는 미국의 스포츠 코치들과 행정요원들을 초대하여 다방면의 아마추어 스포츠 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훈련방법 및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또한 미국 체육회가 요구하는 대로 태권도의 기술적 지원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스포츠 활동에 있어서, 미국체육회는 한국 체육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4편에서 계속]
ⓒ 무토미디어(http://www.moot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