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이하의 태권도 역사정신 세미나

새로운 주장이나 발전적인 토론은 없어

세미나 주최한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연구소로서의 기능 의문
지난달 30일, 한국체육대학교 합동강의실에서는 국기원이 주최한 ‘태권도 역사•정신 연구세미나’가 있었다.
이 날 세미나는 크게 역사와 정신의 두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역사’ 편에서는 노영구 교수(국방대학교)와 나영일 교수(서울대학교)가 발제를 맡고, 토론자로 양진방 교수(용인대학교), 이진수 교수(한양대학교)와 이경명 소장(태권도문화연구소)이 나섰으며, ‘정신’ 편에서는 안용규 교수(한국체육대학교)가 발제를 맡고, 구효송 교수(영산대학교)와 이창후 강사(서울대학교)가 토론자로 나섰다.
이번 세미나가 주목 받았던 이유는 오랜 기간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으며,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태권도 역사(태권도의 기원, 가라데 유입설의 수용과 비판 등)’와 다양하게 주장되어온 ‘태권도의 정신(화랑도 등의 한국사상, 태극•팔괘 등의 동양사상)’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진 연구진들의 토론을 통해 발전적인 태권도 역사•정신의 정립을 기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미나의 내용은 기대에 못 미쳐도 한참을 못 미친 것이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역사와 정신 어느 쪽에서도 기존의 이론을 넘어서는 견해가 발표되지 않았고, 논쟁이 되고 있는 쟁점들에 대한 토론도 이루어 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향후 연구 계획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전망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번 세미나가 이렇듯 기대 이하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번 세미나를 주관한 국기원 태권도연구소(소장 이규석)의 태권도 역사•정신 연구가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관련이 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이번 세미나의 내용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기 위해 생략한다.
전공과 주장에 대한 고려 없이 발제자 및 토론자 배치해
이번 세미나는 우선 그 발제자와 토론자의 선정 및 배치에서부터 잘못됐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분야(태권도 역사•정신)가 아닌 타 분야 전공연구자(나영일, 노영구 교수)가 발제자로 나서거나, ‘정신’ 부문에 적합한 연구자(이진수 교수)가 ‘역사’ 부문에 배치되거나, 발제자로 나서야 할 연구자(양진방 교수, 이경명 소장)가 토론자로 배치되는 등 국기원의 태권도연구소가 과연 태권도 역사•정신 연구를 거시적으로 통찰하고 진행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역사 부문 첫번째 발제자로 나선 노영구 교수의 발제문 <태권도 전사(前史)로서 한국 전근대 도수무예(徒手武藝)의 전개>는 조선조에 존재했었던, 또는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맨손무술(徒手武藝)들의 전개과정에 대한 연구에는 일조를 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맨손무술들이 어떻게 태권도와 연계가 되는지에 대한 논증은 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태권도가 손 중심의 무술인 가라데에서 발 중심의 무술로 발전한 데에는 조선조에 존재했던 무술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을 재확인하는데에 그쳤을 뿐이다.
발제문의 주장이 이렇다 보니, 이 발제문에 대한 심도깊은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두번째 발제자인 나영일 교수는 발제문 <태권도 역사 서술에 관한 고찰>을 통해 태권도사에 대한 주장들을 정리하고,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까지 찾아내어 병기한 후, ‘태권도가 가라데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하며 태권도가 가라데에서 많은 것을 차용했지만, 가라데와는 전혀 다른 발기술 중심의 무술로 발전한 것은 한국인의 고유한 몸짓이 녹아들아갔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나 교수의 주장이 별다른 반론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이유는 주장 자체가 이미 알려진 견해에서 벗어나지 않고, ‘강력한’ 주장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토론자였던 양진방, 이경명, 이진수 교수 등이 나 교수의 주장과 크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토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기원이 공식 교재나 홈페이지 등에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에 대한 견해, 즉 ‘태권도는 한민족 역사이래 면면히 이어져 온 한민족 고유의 무술’이라는 ‘전통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토론자가 역사 부문 토론자에 없었다는 것은 이번 세미나가 과연 어떤 이유로 개최된 것인가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가지게 했다.

세미나에 대한 관심으로 세미나장은 만원을 이뤘다
정신 부문 발제, 현 태권도 정신 연구의 수준 드러내
정신 부문의 안용규 교수(한국체육대학교)가 발제한 <태권도정신의 연구방향 탐색>은 현 태권도 정신 연구의 조야한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발제문이 발제를 맡은 안용규 교수 개인의 연구성과물이라기 보다는 태권도 역사•정신 연구세미나 연구위원들인 한형조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이승환 교수(고려대학교) 등과의 공동연구 성과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각각의 연구자가 자신의 주전공 분야[안용규-사회체육(태권도), 한형조-동양철학(주자학), 이승환-동양철학(중국철학)]에서는 권위자일 수 있지만, 개별 분야를 잘 아는 것과 각각의 분야를 조합해서 서로 다른 분야를 아우르는 또 다른 논리를 정립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태권도정신의 연구방향 탐색>은 ‘태권도정신’에 여러 가지 좋은 덕목들(정직, 성실, 정의, 애국, 충효, 예의, 준법, 평화를 비롯한 15개 덕목)을 필연적인 연관성에 대한 논증없이 이 모두가 태권도의 정신으로 승화, 발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발제문에 대해 태권도 역사•정신에 대해 이른바 전통주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서울대 이창후 강사 조차 “좋은 정신 항목이 모두 태권도의 정신인가”라며 의문을 던지고 “이 같은 주장이 논리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주장의 정당화와 체계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했다.
이처럼, 정신 부문의 발제문 자체가 발전적인 토론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제문 자체에 대한 토론은 큰 의미가 없었다.
새로운 견해 가진 학자 등장이 그나마 거둔 성과

이창후 강사(좌)와 구효송 교수
다만, 이날 정신 부문 토론자로 구효송 교수(영산대)와 이창후 강사(서울대)가 참가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이번 세미나의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구효송 교수는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도장에서의 국기에 대한 맹세 비판’ 등으로 한국 무술계에 만연한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학자로, 태권도계에서 보기 드문 급진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구 교수는 “현 태권도계의 학문연구가 자기합리화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적하고, “(편향된)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공부”라고 말했다.
구 교수와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이창후 강사는 <태권도의 철학적 원리>, <태권도 현대사와 새로운 논쟁들> 등의 저서를 통해 태권도에 미친 가라데의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는 이른바 ‘가라데 유입설’을 비판하며, ‘태권도는 택견의 전통을 계승•발전한 전통무술’이라는 이른바 ‘신 전통주의’적 관점을 대표하고 있는 소장파 학자다.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토론자로 참석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뜨거운 논쟁이 기대되었으나, 시간적인 문제, 주제의 분산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구체적인 논쟁이 진행되지는 못했다. 다만, 세미나에 대한 마지막 평가에서, 구효송 교수는 ‘충(忠)’이라는 가치는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가치라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서는 ‘충’에 대한 가치가 소멸했다는 견해를 밝혔고, 이에 대해 이창후 강사는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충’의 가치는 유효하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두 사람의 주장은 현대 태권도 역사•정신 연구에서 양 극단을 극명하게 대표한다는 점에서 향후 태권도 역사•정신 연구의 축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므로, 이번 태권도 역사•정신 연구 세미나는 이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논쟁의 시작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태권도 역사정신 논의 진전 국기원 등에 기대하기 어려워
아쉬운 것은 이러한 논쟁이나 연구의 진전을 더 이상 국기원으로 대표되는 태권도 제도권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국기원은, 태권도 이론 연구에 관심도 없을 뿐 더러, 수준 높은 연구를 할 능력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이번 세미나를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됐다.
현재 국기원의 태권도 연구소는 소장 1인(이규석 소장)과 연구원 1인(최상환 전임연구원)의 총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나마 소장은 비상근직이라 실질적인 운영은 전임연구원 혼자서 맡고 있다. 이름은 연구소지만, 자체적인 연구성과물은 기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세미나를 가까이서 지켜본 한 태권도 관련학과 교수는 “이런 정도 밖에 연구를 진행할 수 없는 국기원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며, “앞으로는 뜻있는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태권도의 연구를 해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태권도계의 미래는 많이 비관적이다. 심판부정, 자리다툼이 끊이지 않다보니, 정작 중요한 문제인 태권도의 정체성(역사•정신)을 찾고 발전시키는 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이러한 사정이 지속된다면, 태권도가 망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을 할 수 있을까.
그나마 앞서 문제를 지적한 교수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태권도가 망하지 않을 실낱같은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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