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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문화재지정 신청 있었다

태권도신청 계기가 택견에 관심 줘


태권도를 문화재로 지정하려 했던 근거자료가 나왔다. 1969년 11월 6일자 국제태권도연맹 사무총장이던 허헌정(許憲政)이 당시 문화공보부장관앞으로 보낸 문화재신청서의 기록을 인용한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에는 당시 태권도와 택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태권도초기역사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경명교수에 의해 태권도와 택견의 명(明)과 암(暗)(본보 2001년 09월 01일자)이라는 글에서 언급되기는 했으나 세부적인 자료의 접근이 어려웠었다. 당시 국제태권도연맹 허헌정사무총장이 신청한 내용에 대해 1973년 문화재위원이었던 예용해(芮庸海)씨(사진)는 “태권도가 전래의 기법인 수박(또는 手拍)이나「택견」을 토대로 하여 창출되었다고는 하나 무형문화재의 지정은 고유한 전통의 원형이 온존되어 있어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태권도의 국내외적인 성예나 공헌에 상관없이 지정에 난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혀 당시에도 태권도가 문화재 지정면에서 큰 장애가 있음을 알리고 있다.하지만 그는 택견의 기능보유자인 송덕기는 전래의 기능을 원형의 변용없이 계승하였다고 생각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함이 타당하다고 해 택견의 문화재지정 신청서를 1973년에 제출하게 된다.

이 자료에 의하면, 예용해씨는 태권도 무형문화재지정신청서 별첨내용을 근거로 태권도가 문화재지정에 맞지 않는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태권도의 선(先)신청을 계기로 전통무예에 대한 연구위원들의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택견의 타당성을 정당화시키는 초기작업이 되었다.

예용혜씨가 국제태권도연맹의 신청서내용을 근거로 태권도를 분석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권도가 1,300여년전 신라시대로부터 우리 민족의 얼을 이어받은 우리 민족의 고유무도』라고 주장한 당시 국제태권도연맹측의 주장에 대해 전적과 물징이 더불어 영성하고 구비에서 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 수긍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그 전통을 살려 보다 폭넓은 기술의 연구와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이론의 체계를 완성하여 오늘과 같은 현대적이오 과학적인 무도로서의 발전을 기할 수 있었다』고 하는 대목에 대해서는 연유의『발전』은『송덕기씨외 몇몇「태견」인에 의 해서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여 오던 것』에 기초를 두고 이룩된 것이라 설명되고 있지만, 전통적인『택견』의 기능을 계승하고 보유한 송덕기의「택견」과 태권도사이에는『발전』으로 인현격한 차이외 변형이 있음이 인정된다고 설명한다. 즉 고유한 전승기법의 변형은 그것이 비록 발전의 결과라 할지라도 문화재보호법과 무형문화재 지정의 관례로 미루어 지정에 있어서 난점이 된다고 설명했다.

『중국이나 일본의 당수니 공수 혹은 권법 등 으로 불리어온 이 무도의 명칭을 조정, 1955년 4월 11일 사계의 전문가와 저명인사들로서 명칭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신라시대의「택견」을 되찾아「태권도」라고 그 이름을 제정하여 국내외에 선포함으로써 운운』한 것에 대해서도 1955년 4월 11일 사계의 전문가와 저명인사들로서 구성된 명칭제정위원회가「태권도」라고 이름을 제정하여 국내외에 선포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해도, 「태권도」가『신라시대의「택견」을 되찾았다』는 주장이 사실로 입증되기에는 심히 미치하다고 생각된다고 당시 태권도계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 당시 중국이나 일본의 당수니 공수 혹은 권법 등 으로 불리어온 이 무도의 명칭을 조정』한 행위는 방편으로서는 타당할지라도 역사학적 인 결론이 될 수 없을 것임은 명백하다고 설명했다.
『이삼개로 구성한 형 즉 창헌류를 완성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창헌류는 벌써 십여년간 널리 해외에 사십여개국에 소개되어 수백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태극기밑에서 우리말 구령으로 수련하고 있는 현실』은 이미 주지의 사실로 인정할 수 있으나『신라시대의「택견」과 고구려시대의 수박기를 토태로…』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보다 확실한 사학적인 상고를 기다리지 않고는 시기상조의 느낌이 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체육인으로서의 최고영예인 체육상을 수상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전세계 만방에 우리나라 국위를 널리 선양한 그 공로…』로 미루어『무형문화재로서의 지정가치가 충분하다』는 신청서의 끝말에 대해 현행 문화재보호법하에서는 공로가 곧 무형문화재 지정의 요건이 될 수가 없다는 단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초창기 태권도와 택견의 관계연구에서 태권도가 무형문화재로서 요건이 안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택견의 기능보유자인 송덕기는 기술의 변용없이 계승하였다고 무형문화재지정의 타당성을 설명하는 계기를 마련한 기록들이다. 이러한 보고서를 계기로 택견의 중요 무형문화재 지정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예용해] 1929년 경북 청도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 한국일보 기자로 시작하여 논설위원으로 활약하며 서울시 문화위원, 문화재위원 등을 지내면서 평생을 두고 전통공예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인간문화재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으며 1963년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된 뒤로는 전국을 다니며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를 되살리고자 노력하였다. 평생동안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1995년 4월 타계.

[태권도 무형문화재지정신청서중 지정자료 별첨자료 일부]


300餘年前 新羅時代로부터 우리 民族의 얼을 이어받은 우리 民族의 固有武道인 跆拳道가 그間 時代의 變遷에 따라 尙文輕武의 思想과 日帝總督政治의 彈壓으로 발전할 기회를 빼앗기고 오로지 人間文化財인 宋德基氏外 몇몇「택견」人들에 依해서 겨우 그 命脈만 유지하여 오던 것을 1945년 民族의 解放과 더불어 온갖 困難과 隘路를 克服하여 그 大業에 이바지한 崔泓熙將軍은 그 傳統을 살려 보다 幅 넓은 技術의 硏究와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理論의 體系를 完成하여 오늘과 같은 現代的이고 科學的인 武道로서의 發展을 期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崔泓熙將軍은 그 當時 中國이나 日本의 唐手니 空手 或은 拳法 等으로 불리어온 이 武道의 名稱을 調定 1955년 4월 11일 斯界의 專門家와 著名人士들로서 名稱制定委員會를 構成하여 新羅時代의「택견」을 되찾아「태권도」라고 그 이름을 制定하여 國內外에 宣布함으로써 歷史的으로나 技術的으로나 名實相符한 大韓民國의 傳統的武道임을 入証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崔泓熙將軍은 新羅時代의「택견」과 高句麗時代의 手搏技를 土台로 이와 비슷한 다른 나라의 武道가 감히 追從할 수 없을 程度로 종횡무진한 足技의 對鍊과 變化無雙한 手技의 묘미를 硏究體得하는 同時에 体重에 구애됨이 없이 男女老少 누구나 다 鍊磨할 수 있는 二三個로 構成한 型卽 蒼軒流를 完成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蒼軒流는 벌써 十餘年間 널리 海外 四十餘個國에 紹介되어 敎百萬 外國人들이 우리나라 太極旗 밑에서 우리말 口令으로 修鍊하고 있는 現實이다.
이와 같이 國家民族을 爲하여 自己個人을 犧牲한 崔泓熙將軍의 피 땀나는 努力의 結晶으로 今年 四月 二五日 體育人으로서의 最高榮譽인 体育賞을 受賞하였으며 나아가서는 全世界 万邦에 우리나라 國威를 널리 宣揚한 그 功勞야 말로 歷史에 길이 빛날것이니 마땅히 우리나라 無形文化財로서의 指定價値가 充分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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