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훅 그 35년의 카리스마
앤디 훅 그 35년의 카리스마

2000년 8월 24일 세계무술계는 다시 얻을 수 없을 보물을 잃었다. 공수의 수호신으로서 세계의 강자들과 당당히 실력을 겨루며 싸워왔던 무도가 앤디 훅이 사망한 것이다.
총 조문객 1만 2천여명,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그의 영전에 고개를 숙였다. 일개 시골 촌부에서부터 일국의 최고권력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모국 스위스에서는 그의 죽음이 대통령 긴급성명으로 발표되었고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루어졌다. 일본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앤디스 메모리얼(Andys memorial)이라는 추모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현존하는 무술가들 중 과연 이만한 영광을 누릴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앤디 훅이란 어떤 인물이길래 이러한 명예를 누리게 되었을까?
앤디 훅은 1964년 9월 7일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직업은 용병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양친 모두 앤디가 2세일 때 행방불명되어 유년시절을 조부모와 함께 보냈다.
앤디가 살았던 곳은 우범지역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불량소년들과의 싸움과 도주는 그의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차지했었고 그의 화이팅 넘치는 스타일은 당시의 산물이었다고 한다.
앤디 훅이 처음 공수를 시작한 것은 10세가 되던 해였다. 그리고 그가 23세 되던 1987년 극진세계선수권대회에서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하면서 세계무술계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후에 92년에 열린 정도회관 주최의 공수도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마침내 공수가로서 최고의 위치에 선 앤디는 93년말 프로로 전향하게 된다.
94년 3월 4일 당시 세계 최강의 킥복서였던 크로아티아의 브랑코 시카틱을 제압하면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앤디의 프로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브랑코전의 승리이후 94,95년은 앤디에게는 고난의 시기였다. 94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K-1에서는 패트릭 스미스, 마이크 베르나르도, 어네스트 호스트같은 강자들에게 번번히 패배의 쓴잔을 마시며 혹평까지도 감수해야만 했다.
96년은 앤디에게 부활의 시기였다. 앤디 뿐 아니라 침체에 빠져 허덕이던 공수계에도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해 준 해였다. 당시 킥복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K-1에서 공수가로서는 유일무이하게 앤디가 우승하였기 때문이다.
앤디 훅의 우승으로 공수계는 킥복싱에 대한 대반격을 시작하였으며 앤디는 명실공히 세계공수계를 이끄는 수호신이 되었다. 이듬해인 97년과 98년에도 K-1 결승에 진출하는 등 35년 인생의 마지막 4년(96~99년)은 앤디의 인생중 가장 빛났던 시기였다.
2000년 8월 24일 앤디 훅은 동경의대 부속병원에서 전골수성급성백혈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K-1 그랑프리 2000의 예선전에서 전승을 기록하였고 99년 준우승자인 크로아티아의 영웅 미르코 필로포비치마저도 격침시키는 등 화려한 재기를 하며 다시 한번 우승에 도전하던 앤디 훅은 그의 36번째 생일을 2주 남겨둔 채 세상을 등졌다.
앤디 훅은 일본과 스위스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앤디 훅이 그처럼 영광스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공수의 수호신으로서 세계의 강자들과 싸워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스위스 출신이면서도 일본인보다 더 동양적이었던 공수가였던 그는 힘과 스피드, 테크닉의 일치를 중시하는 서양의 수련체계를 바탕으로 기심체의 일치를 중시하는 동양의 수련체계를 접목시킨 무도가였다.
마치 동양무술의 전승자처럼 정신적인 면을 지극히 강조하던 무도가였으며 동서양의 접목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준 무도가였다.
쓰러져도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열정과 투혼 그리고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동양적인 자세, 이러한 것들이 일본으로 하여금 "푸른눈의 사무라이"라는 극찬을 내리게 한 원동력이었다.
일본에서 그의 화려한 경력과 무도가적 자세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면 모국 스위스에서는 그의 인간적인 면으로 평가를 받았다. 스위스는 작은 국가이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의 성공은 큰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앤디 훅은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최고의 위치에까지 올랐고 그러한 모습은 스위스인들에게 큰 자랑거리였다.
95년 6월 앤디의 모국 첫 시합은 초만원을 이루었고 TV로 중계된 그의 경기는 시청률이 50%를 넘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앤디는 해외에서의 성공으로 자국으로 역수입된 경우인 것이다.
스위스는 격투기가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스위스에는 유명한 테니스 선수인 마르티나 힝기스가 있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앤디의 인기는 힝기스를 능가했다고 한다.
성공과 함께 별장을 소유하는 등의 화려한 생활을 하는 힝기스에게 스위스인은 공감하지 못했다. 반면 겸손하고 예절바른 앤디 훅에게는 끊임없는 애정을 보냈다고 한다.
현 취리히시 시장인 요제프 에스테만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앤디 훅은 명성을 얻었어도 늘 조심스럽고 겸허했기 때문에 모든 스위스인들이 그를 사랑했다"
앤디 훅에 대한 평가는 비단 스위스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세계적인 격투가들도 그의 무도가적 자세와 함께 예절바르고 겸손한 자세를 칭찬해 마지 않았다.
앤디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있다. 2000년 6월 앤디는 부인 아로나씨와의 합의하에 이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을 백지로 돌리는 수속을 밟아달라"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혼을 백지로 돌리게 될 경우 유산배분 등에 대한 우선권은 부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죽음을 직감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애정이었던 것이다.
앤디의 고향사람들은 앤디를 가리켜 영웅이 아닌 친구였다고 평했다.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그였지만 그는 대중과 이반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 길가에서 만날 수 있는 이웃이요 친근한 벗이었을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살아가는 스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것이 더욱 스위스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된 것이다.
앤디 훅.
그는 동양과 서양의 무술을 한몸에 담고 있던 무도가였다. 많은 스타들이 부와 명성을 위해 고독을 짊어지지만 그는 결코 대중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가 링 위에서 보여주었던 무도에 대한 열정과 빛나는 투혼, 그가 링 아래에서 보여주었던 겸손하고 예절바른 자세 이것이 그가 영웅으로 대접받는 이유이다.
그가 최강이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노(NO)이다. 그러나 그가 최고였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예스(YES)다.
앤디는 어네스트 호스트와 같은 화려한 테크니션도 아니었다. 그는 피터 아츠와 같은 강렬한 킥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마이크 베르나르도와 같은 가공할 펀치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강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최강을 향한 열정과 쓰러져도 결코 굽히지 않는 무도가의 투혼이었다. 마음으로 싸우는 무도가 이것이 바로 앤디 훅의 참모습이다.
35년의 인생 그 짧은 기간동안 마치 섬광처럼 자신의 젊음을 불태우다 간 무도가 앤디 훅 그는 끊임없이 수련하는 무도가였으며 실천하고 증명하는 무도가였다.
세계의 그 어떠한 격투가라도 그가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열정과 투혼이라는 유산은 후배무도가들에 의해 계속 이어져 나갈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후 공수계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것이다. 극진공수에 마쓰다쓰 오야마(최영의)가 있었다면 정도공수에는 앤디 훅이 있었노라고.
과연 국내에도 이만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무술가가 몇이나 있을까? 종주국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인기를 크게 얻지 못하고 있는 국내의 태권도나 각종 무술들.
한사람의 무도가가 국가적인 영웅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 태권도계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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