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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원 복원 필요하다

훈련원 복원 필요하다


태권도 공원조성과 함께 훈련원을 복원함으로서 태권도 이외의 모든 무예단체를 포용하고 태권도 공원과 경합적 협력체계를 구축하여야 한다.<사진은 무술단체 원로들의 연대서명>

1.태권도 공원조성과 훈련원 복원


■세간의 관심을 집중했던 태권도 공원 조성 문제가 당초의 7월중 결정을 2달 후로 미루었다고 한다. 정책당국과 태권도협회, 그리고 이를 서로 유치하려는 지자체간의 구체적 논의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음으로 이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의나 갈등 과정에서 전혀 태권도 이외의 전통무예단체 입장에서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태권도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무예이고 이것이 올림픽 경기 종목화 되어 국위선양을 위해 크게 기여 해온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태권도가 우리의 전통무예 전부일 수는 없다. 더욱이 이 문제가 제기된 배경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전통 무예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의 수립이 절실함을 알 수 있게 한다.

즉 중국이 소림사를 비롯하여 주변을 정비하고 수많은 문파들이 경합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 것이라든지, 일본이 가라데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파들의 세계적 보급, 북한의 단군성전과 태권도 성전의 조성들을 감안할 때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태권도 공원만의 조성으로는 미흡하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하지만 후발주자는 모든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선발주자들의 모든 경험을 축척하고 그를 뛰어넘는 새로운 발상을 통해야 할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서울은 민족사의 전개과정에서 지리적으로 중심이고 조선왕조의 수도이며, 오늘의 세계속에서 한국의 심장부로 인식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전제하고서 서울이 가졌던 잇점을 최대한 살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기왕의 태권도 공원을 본래의 계획으로 지방에 입지시키더라도 이와 연계하여 훈련원을 복원함으로서 태권도 이외의 모든 무예단체를 포옹하고 태권도 공원과 경합적 협력체계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제가 이 땅에 와서 광화문과 경복궁을 헐고 중앙청을 지은 악의적 만행 못지 않게 주권의 상징인 훈련원을 헐고 운동장을 만든 의도를 민족적 차원으로 각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주장은 결코 태권도 공원의 조성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전통무예를 귀중한 국가자원으로 보호 육성하자는 충정인 것이며, 태권도와 경합적 협력체제로서의 총체적 한국무예 발전의 길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미 세계의 기호가 바뀌었고 엄청난 속도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응하고자 함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즉 오늘의 세계 무예계는 중국, 일본, 한국의 삼파전에 북한이 뛰어들고 있으며 태국, 필리핀 등 제 3세계 여러나라 등이 각기의 독특한 무예를 자랑하면서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태권도 단일 종목으로 대응하고 있을 뿐이며 태권도 지도부 역시 독점적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취향의 변화에 즈음하여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선비정신을 강조함으로서 전통무예가 단순한 말기(末技)의 기법만이 아닌 예술이며 고급 문화상품으로 승화시켜야 할 논리적 당위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훈련원 관련 기록

■현재의 동대문운동장 일대를 터로 하였던 훈련원은 조선조 병사의 무술훈련과 병서˙전투대형 등을 강습했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되어 처음에는 훈련관으로 불렀는데 태종 때 이곳으로 옮겨 청사 남쪽에 활쏘기 등 무예를 연습하고 무과시험을 보는 대청인 사청을 지었으며 세조 12년(1466)에 훈련원으로 고쳤다.

많은 무장들이 이 훈련원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시험과 봉직의 과정을 거쳤는데 충무공 이순신이 별과시험에서 말을 달리다가 실수로 낙마하여 왼쪽다리에 부상을 입은 곳도 이 훈련원이고, 봉사˙참군 등 하위관직이 여러 해 동안 복무하던 곳도 훈련원이었다.

중종반정(1506)때 박원종 등이 훈련원에 모여서 장사들을 나누어 배치하고 밤중에 창덕궁 진입로에 진을 친 일도 있었다.

그러나 5백여 년의 역사를 갖고 여러 가지 군사관계의 일을 집행하던 훈련원도 국가의 대세가 기울어짐과 함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07년 8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일명 丁未7조약)에 의해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고 한국 군인들에 대한 무장해제가 집행되었다.

이 군대 해산으로 비분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던 장병들은 일본 당국이 지급한 은사금을 거부하고 의병부대에 합류함으로써 이제까지 재래식 무기와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채 활동하던 의병전쟁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이인영과 허위가 중심이 된 서울 진공 작전도 신식무기와 병술에 익숙한 해산군인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토벌작전이 치열해지자 그 활동무대를 국외로 옮겨 간도와 러시아 등지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곳은 훈련원 이후로 경성사범학교 및 부속소학교(1921. 7. ~ 1945. 12.), 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6. 3. ~ 1950. 6.), 부속중학교(1946. 9. ~ 1947. 10.),부속고등학교(1946. 9. ~ 1947. 10, 1954. 12. ~ 1967. 6.), 부속국민학교(1947. 10. ~ 1950. 6, 1953. 9. ~ 1975. 6.),농업협동조합중앙회(1975. 7. ~ 1988. 11.), 헌법재판소(1988. 12. ~ 1993. 6.),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주차장(1993. 7. ~ 1994. 7.)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7년 4월부터는 훈련원 공원 및 주차장 건설공사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조선시대 군사의 시재(詩才), 무예 훈련 및 병서와 전진(戰陣)의 강습등을 맡아보던 관청.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새 관제를 반포할 때 훈련관(訓練觀)으로 설치되어 관원으로 사(使;정 3 품) 1명, 군자좨주(軍諮祭酒;종 3 품) 2명, 사마(司馬;종 4품) 4명, 사직(司直;종 5 품) 4명, 부사직(副司直;종 6품) 4명, 참군(參軍; 종7품) 4명, 녹사(綠事;정 8품) 6명을 두었다.

그 뒤 훈련관은 94년 중군군후소(中軍軍候所)를 흡수하였고, 1405년(태종 5) 병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되었다가 66년(세조 12) 훈련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관원으로는 지사(知事;정 2 품 타관 겸임) 1명, 도정(都正;정 3 품 1명은 타관겸임) 2명, 정(正;정 3 품) 1명, 부정(副正;정 3 품) 2명, 첨정(僉正;종 4 품) 2명, 판관(判官;종 5 품) 2명, 주부(主簿;종 6 품) 2명, 참(參軍;정 7 품) 2명, 봉사(奉事;종 8 품) 2명을 두었고, 그 밖에 습독관(習讀官) 30명을 두었다.

1795년(정조 19) 첨정 1명, 판관 2명, 주부 8명이 증치되고, 이중에서 1명을 문관으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한일신협약) 체결에 따라 폐지되었다.


댓글 2

mitchkoh 2000.09.16
Thats cool and all but what about Jung Jae Eun, Koreas best chance at an Olympic gold?
mitchkoh 2000.09.16
Thats cool and all but what about Jung Jae Eun, Koreas best chance at an Olympic g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