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태권도 개혁 과제 - (2) 위기의 태권도… 어디로 가나?
지난 4월 13일 새벽(한국 시각)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선거가 열렸다. 전세계 179개 회원국들 가운데 133개국이 참가한 이날 선거에서는 122표를 얻은 조정원 후보가 박선재 후보를 누르고 4년 임기의 제3대 총재에 당선됐다. 그러나 같은 날 진행됐던 세계연맹 부총재와 집행위원 선거에서는 한국인 사범이 대거 탈락하는 이변(異變)이 연출됐다. 3명을 선출하는 부총재 선거에서는 한국인 사범 4명이 출마했지만 영국의 박수남 사범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20명을 선출하는 집행위원 선거에서도 한국인 사범은 단 3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17명은 유럽과 아시아 등 외국인이 차지했다. 유럽연맹과 아시아연맹은 이번 선거에서 모두 14명의 집행위원을 당선시키는 기염을 토해 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혹한 한국 태권도계는 일순간 큰 충격에 휩싸였다. 세계 태권도의 중심으로 자부하는 국기원은 조영기 부원장을 부총재 후보로 밀었고, 대한태권도협회도 양진방 기획이사가 집행위원에 무난히 당선될 것으로 낙관했지만 이들 모두 쓴잔을 마셨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태권도 전문가들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텃밭으로만 여기고 소홀히 해왔던 동남아 국가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전통적 야당인 유럽연맹이 이번에 아시아연맹과 연합해 총재를 지지하는 대신 연맹의 실질적 결정기관인 집행위원회를 장악해 버렸다”는 우려 섞인 분석을 내놓았다. 세계연맹의 집행위원회는 모두 31명. 이번에 선출된 20명과 함께 총재와 사무총장, 부총재, 지역연맹 회장 등 당연직 11명이 가세한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14명을 확보한 유럽과 아시아연맹이 사안에 따라 미주지역 연맹인 팬암과 손을 잡을 경우 세계연맹의 향배는 가늠할 수 없게 됐다. 전세계 6000만명의 수련생을 거느린 막강한 조직체 세계태권도연맹이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의 수중에서 벗어나 외국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도 있다는 심각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외국의 태권도인들은 그동안 한국 중심의 세계연맹에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이들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사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자 단증 발급’. 특히 유럽연맹은 지역연맹 회의 때마다 독자 단증 발급 문제를 거론하는 등 가장 적극적이다. 세계연맹은 연맹이 주관하는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국기원 단증을 의무화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국기원으로 들어오는 승단 심사비는 연간 70억원. 이 가운데 해외에서 들어오는 심사비만도 연간 20억원에 이른다. 외국인들이 ‘독자 단증 발급’을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는 이면에는 이 같은 경제적 이해관계도 얽혀있다.
그러나 한국 태권도계의 입장에서는 외국인의 ‘독자 단증 발급’ 주장을 단순히 경제적 이해관계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고민이 있다. 국기원 단증은 그동안 태권도 종주국의 자존심이었고 전세계 태권도인을 하나로 묶는 종주국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독자 단증 발급’ 주장은 결국 그들이 한국 태권도의 권위를 부정하고 나아가 태권도 종주국의 아성에 정면 도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의 국면을 ‘한국 태권도의 위기’라고까지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외국인들 한국 선수가 이기면 야유

그렇다면 왜 외국인들은 한국 태권도를 부정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한국 태권도가 경기태권도에 치중하면서 심신수련 목적의 무도(생활)태권도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단증을 딸 수 있는 구조도 국기원의 권위와 한국 태권도에 대한 존경심을 앗아갔다.
사실 태권도는 경기화 과정을 거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해방 이후 본격화된 태권도가 경기화에 들어간 것은 1962년부터. 이종우·엄운규 등 2세대를 중심으로 시험적인 경기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태권도의 경기화를 찬성했던 것은 아니다.
무덕관 관장이던 황기는 “무술이란 본래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시합 자체가 불가능하고, 경기를 하게 되면 무도 정신이 무시되며, 단과 급 제도도 불필요하게 된다”는 이유로 고개를 내저었다. 태권도는 경기화 과정을 거치면서 손기술보다는 발기술 중심의 무술로 변화했다. 형(품새)과 단련 위주의 독습 방법보다는 상대와의 겨루기를 중심으로 하는 연습방법이 보편화됐다. 태권도 경기는 존재하는 모든 기술을 검증했다. 1960년대 시작된 태권도의 경기화는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창립으로 또 한번 비약적인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다. 이어 1975년에는 일본 가라테를 제치고 국제경기연맹(GAISF)에 가입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 시범종목에 이어 2000년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다.
그러나 이같은 외형적인 성장과 달리 한국 태권도에 대한 외국인의 존경심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태권도 경기장에서는 선수와 코치만 있을 뿐 사제지간의 애틋한 정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태권도 경기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심판 판정에 항의하는 장면이 쉽게 목격된다. 한국 선수와 외국 선수가 맞붙으면 외국인들은 일방적으로 외국 선수를 응원한다. 그리고 한국 선수에게 승리가 선언되기라도 하면 외국 선수와 관중은 심판에게 거센 야유와 항의를 보낸다.
국가대표팀 감독을 여러 번 지낸 김세혁씨는 “시합장에서 외국 선수들이 덤벼들 때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자식한테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배반당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우리 선수들이 멋진 기술은 안하고 얌체같이 톡톡 점수만 따는 식의 경기 운영을 해 이들에게 편파 판정이라는 오해를 가져오게 한다”고 분석하면서도 “한국 선수들이 기술로 완벽하게 제압해야 하는데 이제는 그것도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경기태권도 기술은 이미 세계적으로 평준화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태권도에 대한 외국인의 존경심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경기무술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다. 호서대학교 성낙준 교수는 “원래 태권도에서는 정신적인 측면이 중시됐는데 시합 위주가 되고 선수들이 승부에 집착하다 보니까 의리라든가 예의, 극기와 같은 예전의 가치관이 많이 사라졌다”고 분석했다. 국기원 부원장을 지내며 품새와 격파 실력을 겨루는 태권도 한마당을 주관했던 강원식도 “무도적인 측면이 사라짐으로써 태권도가 절름발이가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경기태권도와 무도태권도의 가치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세계 최대의 무술시장인 미국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무술시장은 1950~1960년대 최배달의 일격필살에 이어 1970년대 이소룡의 절권도, 이후 태권도의 현란한 발기술 등으로 무술 트렌드가 변화하고 있다. 최근 요가와 명상 등 건강 수련법이 크게 인기 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미국의 무술 수련 인구는 모두 50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가운데 태권도 인구는 500만명 정도. 이들 태권도인 가운데 90% 이상이 심신수련을 목적으로 한 무도태권도를 수련한다. 나머지 10% 정도만 경기태권도를 선호하고 있다.
세계태권도대회를 휩쓸었던 수많은 선수 출신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도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들이 정작 미국인에게 가르치는 내용은 경기기술보다는 품새와 호신술 등 무도태권도에 가깝다. 1960년대 말 경기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전 미국태권도협회장 이상철씨는 “서양 사람에게 한국은 정말 마음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태권도가 서양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사범들이 존경과 인내, 극기 등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먼저 실천했기 때문이다”며 “기술만 중시하게 되면 기술이 앞선 외국의 다른 나라가 태권도 종주국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인 품새는 1970년대 이후 제자리걸음

사실 따지고 보면 경기태권도와 무도태권도는 태권도의 양 날개와 같다. 그러나 경기태권도는 승부에 목적이 있고 무도태권도는 개인의 심신수련에 더 큰 목적을 둔다. 이 때문에 경기태권도는 최고 기량의 한 사람만 살아남는 대결과 경쟁의 세계에, 무도태권도는 다수의 개별적 성취가 존중되는 상생과 조화의 세계에 비유된다. 또 경기태권도는 점수와 계량화로 서열이 매겨지는 객관식 사회에, 무도태권도는 총체적 평가를 중시하는 주관식 사회에 비견될 수 있다. 때문에 경기태권도는 부분에 집중하는 형(形)의 문화로, 무도태권도는 전체와의 조화를 강조하는 상(象)의 문화로 표현된다.
태권도 수련체계는 크게 품새와 격파 호신술 겨루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겨루기는 경기태권도의 요체이고 품새 격파 호신술은 무도태권도의 주요 형식이다. 무도태권도는 품새 수련이 그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지금의 공인 품새는 경기태권도의 낱 기술들을 담보해내지 못한 한계가 있다. 경기태권도가 활성화되면서 발 중심의 태권도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데 비해 공인 품새는 1970년대 초 제정 당시의 것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공인 품새와 경기 기술 간의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품새 쪽에서는 발 중심의 경기 기술을 수용하고, 경기 쪽에서는 품새의 주요 기술인 주먹이 쓸모 있도록 경기 규칙을 대폭 개정해야 한다.
한국 태권도는 또 한국무술이라는 큰 범주 속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무술에는 그 무술이 속한 민족 고유의 사상과 문화가 스며있다. 한국무술은 한민족 고유의 역사 속에서 시대적 상황에 따른 다양한 형식을 보여왔다. 한국무술은 또 동양무술의 큰 범주 속에서 중국·일본 무술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다양한 형식의 한국무술은 한민족 고유의 문화적 특질 속에서 중국·일본 무술과 다른 발 기술 중심의 무적 기술 체계로 수렴 발전했다. 해방 이후 본격화된 태권도 역시 창조적 진화과정을 통해 중국·일본 무술과 다른 한국 특유의 발 기술 중심의 무술로 발전했다. 때문에 한국 무술의 큰 범주 속에서 태권도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 제정되는 공인 품새에는 한민족 고유의 전통 수련문화와 혼이 스며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한국식 전통 심신수련문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태권도를 포함한 다양한 형식의 한국무술 중에도 한국의 전통문화와는 다른 중국식 도교문화와 일본식 무도문화가 혼재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심신수련을 중시해왔다. 한문 수용 이전의 전통 심신수련법은 천지기운을 받아들이는 숨고르기와 신체의 굴신운동으로 신성(神性)의 영(靈)을 개발하는 양생지도(養生之道)였다. 이를 통해 우주 만물과의 조화를 이뤄 현세에서의 건강한 삶을 추구했던 것이 바로 한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이다.
그러나 한문 유입과 함께 들어온 중국식 심신수련법은 불로장생의 염원을 담은 신선지도(神仙之道)가 그 주류를 이룬다. 중국의 신선지도가 개인의 장생불사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한국의 양생지도는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두루 행복하고자 하는 ‘생활 속의 도(道)’이다. 양생지도는 호흡법과 굴신운동에 주력하지만 신선지도는 도인법 복기법 식이법 벽곡법 방중술을 활용하는 차이도 있다. 육체적 기교보다는 정신의 격을 강조한 한국의 전통문화는 가식적이며 기교적인 중국의 형식미와 큰 차이를 보인다. 이는 한국 문화가 전체를 관조하는 상(象)의 문화인 데 반해 중국 문화는 부분에 집착하는 형(形)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한국 고유의 양생지도(養生之道) 사라져
세계연맹은 내년 서울에서 제1회 세계태권도 품새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새로 시도되는 품새대회는 경기태권도에 실망한 외국인을 다시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태권도의 정체성이 고려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품새들이 우후죽순으로 명멸하는 식의 품새대회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품새 제정은 마땅히 국기원의 몫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국기원은 세계연맹 산하 아카데미 조직으로 법제화해 세계 태권도의 구심체로 거듭나야 한다. 품새대회는 승부 중심의 경기태권도와 차별되는 21세기의 새로운 가치관이 추구되는 한판 축제를 지향해야 한다. 지난해 말 확정된 무주 태권도공원에도 세계인들이 한국 태권도에 다시 눈 돌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전제돼야 한다. 그 해법도 바로 생활무술과 한국의 전통 수련문화에서 찾아질 수 있다.
한국 태권도는 지금 21세기 디지털 사회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속에서 한국 태권도는 종주국의 권위를 회복해야 하는 힘겨운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 태권도는 이제 대결과 경쟁보다는 상생과 조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이념 속에서 남녀노소 누구나가 참여할 수 있는 생활무술을 보편화하고, 조화로운 삶을 통해 ‘생활 속의 도(道)’를 추구했던 우리식 전통문화와 혼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수련 프로그램들을 내놓아야 한다. 이 길만이 한국 태권도가 세계 태권도의 중심에 서서 태권도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재확립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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