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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승부사 조치훈, 부활하다. -바둑과 무술에 관하여


조치훈9단과 박영훈4단

지난 12월11일, 제8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에서 조치훈 9단이 신예 강자 박영훈 4단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동안 국제대회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조치훈 9단이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91년 후지쓰배 대회 이후 12년만입니다.

바둑은 일견 안 그렇게 보이지만, 무술과 많은 면에서 닮아있습니다. 절정고수들의 승부세계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한가지 길을 간다는 점에서도 무술(武道)과 바둑(棋道)은 서로 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段) 급(級) 체계 자체도 일본 막부시대 바둑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요즘은 좀 덜해졌지만, ‘진검승부(眞劍勝負, 신켄쇼부)’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였던 동네가 바로 바둑세계였다는 점에서도 바둑과 무술, 특히 일본의 바둑문화와 사무라이의 검술 문화가 서로 상통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샤쿠(道策, 일본 바둑의 開祖라 불리는 최초의 명인), 슈샤쿠(秀策, 흑번필승의 신화로 유명한 명인)등의 일본 막부시대의 유명한 바둑기사들은 바둑돌을 검(劍)대신 사용한 사무라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바둑의 고수 중에서도 조치훈 9단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독특합니다. 조치훈의 바둑은 ‘목숨을 걸고 둔다’는 그의 유명한 말로 극명하게 상징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진검승부’를 가장 많이 펼쳤던 현대의 기사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지요.

조치훈 9단의 유명한 바둑승부 중에는, 1983년 괴물이라 불리던 불리며 일본 최고의 기전인 기성(棋聖)전을 6기연패하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9단과의 기성전 7번 승부에서 3연패 이후 4연승을 하며 극적으로 기성전을 획득하며 대삼관(大三冠, 기성, 명인, 본인방을 동시에 보유)에 오른 일, 1986년 교통사고를 당해 온 몸에 골절상을 당하고 나서도,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고바야시 고이찌(小林光一) 9단을 맞아, 휠체어에 앉아서까지 오로지 움직일 수 있는 왼손가락만으로 대국을 했던 일(일본의 빅3 타이틀전은 이틀에 걸쳐 진행되어 기력도 기력이지만, 체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하물며 중환자의 몸으로…), 일본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기전인 본인방(本因方, 혼인보)전을 10년동안 아무에게도 내주지 않고 10기 연패하여 명예 본인방으로 추대된 일등 현존하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드라마틱한 바둑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닙니다.

6살꼬마 조치훈과 오늘의 조치훈

6살에 어린나이에 당시 바둑의 최강이었던 일본으로 유학을 간 꼬마 조치훈은 명인(名人) 이 되기전에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6살에 현해탄을 건넜던 꼬마는 1980년에 마침내 바라던 명인이 되었고, 말 그대로 금의 환향, 고국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한국에 바둑 열풍이 불게 만들었습니다. 현재의 세계최강 기사인 이창호 9단 역시, 이러한 조치훈의 바둑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느끼며 자란 세대입니다.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 생명을 오직 이 한판의 바둑에 걸고 임한다는 자세는 검 한자루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해 승부를 거는 검객의 자세에 다름 아니며, 그러한 자세를 조치훈 9단이 가지고 있었기에 수많은 명승부를 펼쳐낼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번의 삼성화재배 결승전의 마지막 대국에서도 조치훈 9단은 초반에 약한 돌을 잘 타개했으나, 중반에 실수를 하여, 중반 이후, 거의 필패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조치훈 9단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국제대회 우승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마침내 또 하나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분야에 재능은 물론이고, 끝간데 모를 신뢰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무술계로 눈을 돌려 보자면, 우리나라의 무술계에는 입으로만 무술을 이야기하고, 무도정신을 말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무도(武道)정신과 마찬가지로 바둑에는 기도(棋道)정신이 있지만, 무도정신이건 기도정신이건 말로만 무도 정신이 어떻네, 기도 정신이 어떻네 떠드는 것은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만약 무도정신이라는게 있다면, 매일같이 쉬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무술수련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질 것입니다. 도장에 멋진 글씨로 예의니, 염치니, 인내니, 의리니 하는 글씨를 걸어 두었다고 해서, 그 좋은 글들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번 우승을 한 후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는 바둑의 스포츠화가 진행중입니다. 바둑이 스포츠냐 혹은 예도냐 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라는 질문에 조치훈 9단은 "어렸을 적 일본에 갔을 때는 스포츠라기 보다는 정신력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요즘 세계 대회등에는 스포츠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술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스포츠적인 요소는 어느 무술에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그리 걱정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바둑이 예도(藝道)의 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무술 역시 예도의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점점 허울만 남은 것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댓글 1

신수철 2003.12.13
건강하시죠? 글 잘 봤습니다. 어디가서 바둑 둘 줄 안다고 말하긴 어림없는 무적(?) 18급의 실력이지만... ^^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바둑과 무술... 박성진 기자님이 말씀대로 서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석이라는 기본기를 착실히 다지지 않으면 이기기도 힘들 뿐더러 절대로 고수가 될 수 없는 점... 무술에서의 기본기 강조... 정석이 어느정도 되면 응용기라든지 자기 색깔을 나타내는 행마, 형세, 사활, 한수 등... 무술에서는 수파리의 파로써 기본기를 익힌 후 자신에게 맞는 응용기나 자신만의 득의기를 수련해 가는 것... 신의 한수(고스트 바둑왕이란 만화에서의 화두가 신의 한수죠...^^)를 죽을 때까지 추구 해야 하는 기사들과 무도인들이 죽을 때까지 무의 도를 추구하며 수련하는 것... 등등... 바둑기사가 신의 한수를 터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처럼 딴짓 안 하고 열심히 수련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군요.. ^^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겠군요.. 글 잘 봤습니다. ps - 신의 한수는 고스트 바둑왕(원제 - 히카루의 바둑)이라는 일본만화에서 자주 나오 는 표현으로 실제로 일본 바둑계에서 쓰는 말인지 아니면 바둑의 깊이를 만화상에서 신 의 한수로 표현한 것인진 모르겠습니다. 설령 일본 바둑계에서 쓰는 말이 아니라고 해도 신의 한수라는 표면적인 어휘가 아닌 신의 한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인내, 노력, 열정 등의 내면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