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운의 무술만화편력(3) - 베가본드
자취 경력이 어언 만 6년을 넘어 7년 째로 접어들고 있고, 사먹던 밥이 물려서 요리를 시작한 지도 3, 4년 정도는 된 듯 하다. 도마에 식칼질이야 이제 눈감고까지는 아니지만 꽤 뽄새 좋게 할 만도 하다.
그런데 그제 대파를 썰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베었다. 엄지 손가락 끝과 손톱까지 은근히 깊게 베였다. 손끝이라서인지 지릿한 고통이 이틀째까지도 계속 이어지며 물건을 쥔다거나 손가락을 놀릴 때마다 베인 살점이 들리며 거슬리기가 이를 데 없는데다가 자꾸상처가 벌어지니 쉽사리 아물지도 않는다. 불편을 좀 덜어볼 양으로 베여 나온 부분을 떼어냈더니 이건 또 이거대로 손쓰기가 찔끔거려져 인상이 절로 쓰인다. 아무래도 괜한 긁어 부스럼을 냈지 싶어 더욱 마음이 불편하다.
뻔히 내 손을 보면서 칼질을 했는데, 그 손을 베이다니, 그 상황을 반추할수록 어찌나 바보 같은 짓이었나 싶어 계속 부아가 치민다.
융통무애
〈베가본드〉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일대기를 그리(려고 하는 것으로 보이)는 만화다. 그러나 그의 승부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가 검을 수행하면서 겪는 인간사와 그에 얽힌 갈등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다. 또한 다른 만화에 비해 극중에서 그려지는 무사시는 그리 대단한 천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이것이 훨씬 현실의 천재에 가까운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그는 고독하며 갈구한다.
또한 작가는 격검 시의 상황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낸다. 인물들의 심리나 체력 상태에서부터 검을 쓰는 법, 보를 짓는 법에 이르기까지 꽤 공부를 한 티가 난다. 이는 물론 원작을 두고 있는 덕도 크겠으나, <슬램덩크〉에서 이미 스토리 텔러로서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었던 다케히코 이노우에는 <베가본드>에서 또 한번 이 모든 것을 아울러내며 미야모토 무사시의 무사 수행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손을 베인 후, 문득 〈베가본드>에서 주인공 다케조가 길을 걷다가 떨어져있던 대못에 발이 찔린 후 스스로를 책망하는 내용이 떠올랐다.
"미숙하다, 미숙해! 못은 애초부터 위를 보며 놓여 있었다. 그걸 못 알아채다니, 아니 알아채지 못 했다 쳐도… 못이 발등을 뚫을 정도로 깊이 밟다니. 기가 온몸에 골고루 퍼져있었다면, 오체(五體)가 융통무애를 이루었다면 짚신 바닥에서 못이 멈추었을 것을…."

베가본드 12권 中
무술을 하는 사람, 또는 춤을 추거나 체조 등의 기예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수의 동작을 꿈꾼다. 그것은 강하고 아름다우며 효과적이면서도 자연스럽고 간결한 동작이다. 처음 도장에 나가서 기본 자세를 배우고 기술을 하나씩 배울 때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에 한 발짝 더 다가서고 있다는 기쁨을 느낀다.하지만 곧 마음은 이소룡이요 머리로는 황비홍 못지 않은 고수가 금새 될 듯 한데, 몸은 도무지 거기에 맞춰 주지 않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주먹지르기 하나조차 마음에 들지 않고, 앞차기 하나도 부족하게 느껴진다. 어디까지나 초보이기 때문이다 라고 위안을 삼으며 수련을 거듭하고 선배로부터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닥친 벽을 넘어서지 못하거나, 그래도 내가 이 정도는 되지라고 생각했던 수준에 스스로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닫는 사건이라도 겪게 되면 그 절망은 극에 달한다(주로 만만하게 생각했던 상대가 나보다 나아졌을 때, 겨루기에서 졌을 때, 그리고 자신의 움직임을 찍은 영상을 처음 봤을 때 그 충격은 상당하다). 성미 급한 사람은 이것이 내 재능의한계인가 하며 더 이상의 수련을 포기하기도 한다.
무술을 수련하고 몸 다루는 기예를 닦는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하고 필연적인 과제이다.
그러니 행동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우면서도 막힘이나 거리낄 것이 없다는 융통무애의 경지… 란 가히 무술가의 이상이 아니겠는가. 만화를 보면서도 실로 그렇다고 크게 공감했던 부분인데, 새삼 비슷한 경우를 당하고 보니 더더욱 절감하고 말았다.
말하고 행하는 것이 곧 도(道)
그러고 보면 이는 비단 몸을 다루는 데만 바랄 것이 아니다. 옛 말에 "군자는 도(道)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 때 보고 듣고 간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스스로 도에서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즉 말하고 행하는 것이 곧 모두 올바른 도리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공부(功夫 - 쿵푸)인 셈이 아닌가.
하긴 이것이 공자님도 나이 일흔에나 이루셨다는 "마음이 하고자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ㅡ 從心所慾(종심소욕)이나 不踰矩(불유구) ㅡ 라는 지경이요, 도가(道家)에서 지상 목표로 삼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지경이니, 생각할 수록 두고두고 새기며 정진해야할 목표로 삼아야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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