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파이터'를 꿈꾸는 사나이 (1)

한국 극진회 총본부, 김경훈 사범
어려서 부터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운동신경을 보였던 소년 김경훈. 그는 초등학교 재학 당시 육상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고, 평소 그의 재능을 눈 여겨 보던 육상부 코치 선생님은 곧 자신의 특별 관리 하에 그에게 본격적인 트레이닝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운동선수 보다는 다른 형제들처럼 열심히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어머님은 육상을 하는 그가 영 탐탁치 않았고, 마침내 학교로 찾아와 육상부 코치 선생님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운동선수로서도 대성할 것’이라는 육상부 코치 선생님의 만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결국 그의 어머님은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어머님의 바람대로 운동에 대한 꿈을 접고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다. 평범한학생으로 살아가던 소년 김경훈. 그러던 그가 ‘극진가라데’라는 무도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당시 스포츠 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방학기 선생의 원작 만화 ‘바람의 파이터’를 접하고부터 였다.
살아있는 황소 47마리와 싸워 맨손(수도)으로 뿔을 꺾어버리는가 하면, 무도가로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세계를 무대로 삼아 100여명이 넘는 전설의 무도가들을 찾아 다니며 실전 대련을 통해 모두 굴복시켜버린 극진가라데 창시자 최영의(배달) 총재의 무도가로서의 인생을 담은 한편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와의 인연은 평범한 고교생이었던 그의 인생 항로에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무술가로서의 욕망이 서서히 살아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 접한 무술은 평소에 늘 자신이 수련하기를 꿈꾸었던 입식 타격계 무술의 최고봉이라는 극진가라데도 그렇다고 정통 가라데도 아닌, 아이러니컬하게도 ‘가노 지고로’라는 사람이 유술을 기초로 하여 창안했다는 무술인 유도였다.
유도 수련을 하면서도 그의 가슴 한구석에는 늘 만화책에서 보았던 실전 최고의 무술 극진가라데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극진가라데 수련에 대한 욕망과 갈증이 한계에 다 달았을 무렵, 그는 끝내 몇 년 동안 줄곧 수련해왔던 유도를 미련 없이 가슴속에서 떠나보냈다.
유도를 그만둔 그는 극진가라데를 수련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부산 일대의 가라데 도장을 샅샅이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도장을 찾아 나선지 얼마 못 가서 그는 대한한국 땅 안에서 제대로 된 극진가라데를 수련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얻어낸 결론을 바탕으로, 그가 차선책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부산 소재의 ‘세계공수도연맹 총본부’였다. 비록 자신의 그토록 수련하기를 원했던 극진가라데는 아니었지만, 전통 가라데를 수련하면서 평소 동경하고 있던 무술과 조금은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전통 가라데 수련을 시작한 지 몇 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어느날 문득 슨도메 가라데(상대의 면전에서 공격을 멈추는 형태의 가라데)와 실전을 지향하는 극진가라데의 차이를 실감하면서부터 극진가라데에 수련에 대한 욕구가 점점 증폭되어가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세계 공수도 연맹 총본부’ 관장의 재가를 얻어 독립하게 된 그는 집 근처에 ‘일도관’이라는 도장을 개설하고, 낮에는 일을 하면서 밤이 되면 어김없이 가라데 수련을 하는 생활을 반복해나갔다. 총본부 수련 시절 때와는 달리 자신이 추구하는 극진가라데와 보다 근접한 수련을 할 수 있었지만, 역시 한국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정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내심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수련을 하면 할수록 정통에 대한 갈증이 증폭되어가던 어느날, 그는 자신의 일생을 건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바로, 극진가라데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일본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매일 만족하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때문에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기 보다는 나중에 비록 내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 그는 그때 자신이 선택했던 시간에 대해 그렇게 술회하고 있었다.
그가 일본행을 결심했을 때, 집안의 반대는 정말 대단했다. 특히 형제들의 반대가 심했는데 반대 이유가 너무나 타당했기 때문에 그로서도 사실 가족들을 설득하기가 그렇게 쉽지 만은 않았다고 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나 어려워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극진가라데>를 배워온다고 하니 찬성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옛말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 극심하게 반대하시던 그의 어머님도 차츰 자식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 끝내는 허락해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4월경 그는 꿈에서도 그리던 극진가라데의 본고장 일본으로 향했다.
그가 극진가라데를 수련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곳은 ‘후쿠오카’라는 곳이었다. 그가 후쿠오카를 선택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그건 바로 부산과 거리상 가깝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선택한 그곳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극진 인생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오리지널 극진가라데를 배우기 위해 무작정 일본행을 결심했던 그였지만, 막상 일본 땅에 도착해보니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를 몰라 무척 망설여졌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 가면 어떤 도장, 어떤 사범 밑에서 수련해야겠다’고 미리 정해놓고 온 것도 아니고, 특별히 극진가라데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고 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는 일본에 장기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일본어학교부터 찾아 나섰다. YMCA 부설 일본어학교에 등록한 그는 다음 단계로 살 집과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그의 본가는 그리 넉넉했던 살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에서 원조를 받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선택한 길인 만큼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뤄나갈 생각에서였다.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다’라는 진리는 시대가 바뀌어도 통하는 법이었던가? 어렵사리 구한 자취 집에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그를 반겨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수련을 위한 도장을 찾는 것 뿐이었다.
우선, 전화번호부를 뒤적였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이 나중에 자신의 스승이 되는 ‘아베 기요후미’ 사범의 도장, 즉 국제공수도 연맹 극진회관 소속의 후쿠오카 지부였다. 일본어를 전혀 못했던 그는 자취 집에서 만났던 한국인 유학생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첫날,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한국인 유학생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도장을 방문했다. 몇 번을 노크해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도장 문은 잠겨있고, 부근에 수련생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눈에 띄질 않아 잠시 도장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떼어지지 않는 발길을 애써 돌려 세워야만 했다.둘째 날은 그 유학생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도 해서 간단히 소개서만 작성해주면 혼자 찾아갈 요량으로 그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유학생에게는 그날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어차피 같이 가자고 했었던들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인 유학생이 써준 소개서를 들고 아베 사범의 도장을 방문했다. 방문 둘째 날은 타이밍이 적절했다. 이제 막 수련을 시작하려던 찰나였던 것이다. 간단한 목례와 함께 손에 쥐고 있던 소개서를 아베 사범에게 건네주었다. 스승과의 첫 대면은 그렇게 이뤄졌다.
아베 사범은 나를 위해 수련을 참관할 수 있도록 도장 한 쪽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만화를 통해서만 익혀왔던 극진가라데 수련 광경이 바로 내 눈앞에서 생생히 펼쳐지고 있었다. 기본기 수련에 이은 이동수련, 그리고 이어진 쿠미테(조수=대련) 수련. 체계화된 수련, 아베 사범의 온몸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와 안정된 지도, 수련생들의 살아있는 눈빛, 그리고 우렁찬 기합소리···.
“이것이야 말로 내가 평소에 동경해 마지 않던 참 극진이 아니었던가? 바로 이것 때문에 내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타국 땅까지 오게 됐던 거야!” 나는 그날 수련을 참관하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마치, 고압 전류가 온몸을 휘감아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 결심했다. 비록, 수련을 하다가 쓰러져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극진가라데를 배우고야 말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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