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를 찾아서>劍身一體 백호의 몸놀림
얼마전 이종(異種) 격투기 대회가 열려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각기 다른 유파의 무술을 익힌 파이터들이 거의 ‘무규칙’에 가까운 경기방식으로 치고, 차고, 꺾어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대회였다. 선수들이 엉겨붙자마자 피가 튀고 뼈가 꺾이는 접전. 그런데 관객중 일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기대만큼 우아한 절대강자가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한국무술 수준이 저 정도 밖에 안됐단말인가.
초절정 고수니 하는 말도 결국 무협지에나 어울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아니 고수는 많다. 단지 세상에 모습을 내보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자. 옆집 아저씨가 무시못할 고수일 수 있다. 멀게는 산중 은거노인이 평생 절세무공을 연마해온 명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럼우리시대의 숨겨진 ‘고수(高手)’를 찾아 흥미진진한 여행을 떠나보자.
인왕산에 호랑이가 출몰한다? 요즘 달 밝은 밤이면 인왕산에 호랑이가 홀로 나타나 한두 시간을 배회하다 돌아간다고 하는데,그가 발톱을 세우면 달빛이 숨을 죽이고 바람조차 잦아 들었다한다.
인왕산 호랑이 박권모(35)씨. 십팔기(十八技) 고수인 그를 경복궁에서 만났다. 한국항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현재 김&장 특허법률사무소 전자부 과장. 이력만 보면 그를 고수로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다.
“인왕산 호랑이요? 허허. 집이 무악재인데 인왕산에 올라 수련을 하다보니 무우(武友)들이 그렇게 불러요.” 십팔기 공인5단.젊은 나이지만 십팔기 명인 김광석 선생에게 사사한 수제자다.도장에서 본국검법을 가르치는 사범이고, 매월 첫째주 일요일 오후2시 경복궁에서 무술 시연회를 갖는 십팔기 보존회 창립 멤버다. 흰색 도복에 한손에는 쌍검(雙劍)을, 다른 손엔 월도(月刀)를단단히 꼬나쥔 위용이 영락없는 백호였다.
시범에 앞서 잠시 몸을 풀겠다고 했다. 궁전보(弓箭步)와 기마식등 예닐곱 가지 기본식을 취하더니, 내장을 보호하고 근력을 키워 준다는 외용세·내장세를 펼친다. 태극권의 몸놀림과 흡사했는데 몸 돌아가는 게 예사롭지 않다.
이번엔 투로(套路). 중국 영화에서 흔히 봐온 ‘학권’이니 ‘용권’이니 하는 권법이다. 먼저 십팔기의 기본이 되는 단권(單拳). 선배 고수 한 분은 이 단권만으로 당대 내로라 하는 고수들을굴복시켜 탄복을 자아냈다 한다. 그의 단권은 서너가지 보법에의존해 부드럽게 내지른 단순한 주먹과 발차기로 구성됐다. 그런데도 묵직한 탄력이 실려있다. 주먹이 회초리 끝처럼 ‘팽’하고돌아가는 식이다.
‘極柔軟後極强’(극유연후극강). “한없이 부드러운데서 지극히강한 힘을 이끌어 내는 이치지요. 모든 스포츠는 몸의 힘을 빼는데서 시작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예도 마찬가집니다.” 삼절(三節). 발과 다리(근절·根節)가 굳세고 허리(중절·中節)가 원활하면 팔(초절·初節) 뻗는 힘이 지극히 강맹해진다. 때문에 고수들은 무술인의 몸놀림을 잠시만 관찰해도 삼절의 조화정도를판단, 기예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
이어 월도가 돌아간다. 중국 촉나라 관운장이 용맹을 떨쳤다는청룡언월도. 잡아 걸고 채고 휘두르는 동선이 커 위용이 대단하다. 한번 허공을 찌른 그가 공처럼 튀어 올랐다가 공중에서 180도를 회전한 뒤 휘감아 내려치는 데 기세가 놀랍다. 이름하여 오관참장세(五關斬將勢). 조조에 사로잡힌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촉으로 탈출하며 적장들의 목을 베었다는 초식이다. 칼날을 벼리지않아도 대나무 정도는 쉬 잘려 나간다.
대신 쌍칼 운용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몸을 휘돌아 찔러 나가고허공을 가르는 폼이 현란하다.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쌍칼의 생명은 신속함에 있다. 칼끝이 어지러워 떨리는듯 보이질 않았다.
도체 이런 무예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졌다. 십팔기는 조선시대정조 왕명으로 편찬된 동양 최대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근간을 둔 전통무예라고 했다. 전쟁에 쓰이던 18가지 병장기를 다루는 기술을 통칭해 십팔기로 명명됐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이런 무기를 쓸데가 어디 있다고 연마하는것일까. “병장기는 손과 발, 신체의 연장입니다. 투로와 병기술을 동시에 익히면 서로 상응보완하는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요.나중에는 병장기가 없어도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게 되는 거죠.” 무협지에 나오는 검신일체(劍身一體) 같은 걸 말하려던 걸까. 고수다운 대답이었다.
갑자기 치기가 발동했다. 실전에 무예를 써 본적이 있습니까? “(쑥스러운듯) 지하철에서 노인을 괴롭히는 불량배 서너명을 혼쭐내 준 적은 있죠….” 그럼 당신은 고숩니까? “어림없어요. 진짜 고수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 신세가 됩니다. 선생님(김광석씨) 지도를 받을때마다 무예의 깊이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죠.”
20여년 가까이 십팔기 수련에 정진해왔다는 그도 김광석 선생의반초식도 받아내질 못한다고 했다. 평생을 매달려도 끝이 없는게 무술이란다. 명확한 것은 그가 느끼듯이 깊이를 알 수 없는절정고수는 아직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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