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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이 달다는 것을 뛰면서 느끼지요”

-여고생 복서 김주희-



#1라운드

한 소녀가 자그마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쉴 새 없이 뻗어대는 주먹. 원투 스트레이트에 이은 레프트 어퍼컷. 허리를 숙이는가 싶더니 이내 라이트훅이다.

프로 권투 선수 김주희(17). 158㎝, 53㎏의 아담한 체구. 서울 영등포여고 3학년.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여고생. 그녀는 오늘도 자신과 일전을 벌인다. 매일 반복되는 4시간의 훈련. 아침 6시에 어김없이 시작되는 8㎞ 로드워크. 방과 후 체육관에서 이어지는 줄넘기, 샌드백 치기, 섀도복싱, 스파링, 웨이트 트레이닝…. 온몸이 땀에 절어 녹초가 되고 만다. 그럴 때마다 주희는 되뇐다.

나 자신부터 이겨야 한다, 나 자신부터

극기(克己)는 모든 스포츠의 출발점이자 도달점. 지난해 11월 이인영 선수에게 KO패를 당해 2주간의 그로기 상태를 헤매면서 길어올린 깨달음이다.

한국 초대 여자권투 챔피언(플라이급)을 가렸던 지난해 11월16일. 트럭운전사 출신 복서와 여고생 복서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바로 그 경기에서 주희는 난생 처음 패배를 맛봤다. 그것도 4회 KO패. 이인영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주희는 정문호 관장(46)을 붙잡고 울먹이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패배로 인한 좌절감은 펀치 드렁크처럼 주희를 계속 괴롭혔다. 무기력의 나날이 계속됐다.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다보니 체중은 늘어만 갔다. 정관장은 "내가 작전을 잘못 썼다"고 했다. 주변에선 "아직 어려서 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제 마음을 잡지 못해서 진 거예요. 무조건 이인영 선수를 이기겠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했어요. 자신조차 이기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정관장의 지시로 체육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은 2주가 지난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그날 주희는 바로 정관장에게 전화를 해 "운동하고 싶다"고 울먹였다.

#2라운드

재기가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늘어난 체중을 감량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패배감은 더 큰 장애물이었다. 이번에 또 지면 어떻하지라는 두려움이 끊임없이 엄습했다. 샌드백을 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때 격려해준 게 정관장과 체육관 식구들, 그리고 학교 친구들이었다.

"친구들과 이야기 했어요. 우린 아직 어리잖아. 17살밖에 안됐잖아라고요. 그러고 나니까 포기하겠다고 생각한 게 부끄러웠어요."

힘겹게 준비한 1월24일의 재기전. 주희는 1라운드 KO승을 거두며 그간의 마음 고생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휴식없이 곧바로 한국챔피언 재도전 준비에 돌입했다. 기회는 두번 오지 않는다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체력이 약하다는 판단에 따라 로드워크와 웨이트 트레이닝에 주력했다. 같은 훈련을 해도 집중력을 더했다. 컨디션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의식적으로 운동량을 더 늘렸다. 데뷔전 때부터의 시합 비디오를 보면서 단점을 연구했다. 자신감이 회복되면서 시합일이 기다려졌다.

3월29일 두번째 도전한 한국챔피언 타이틀은 주희의 몫이었다. 심판 전원 판정승. 챔피언 벨트를 맨 순간 주희는 꼭꼭 눌러 두었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까지 흘렸던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뭔가 응어리졌던 게 풀리는 느낌이었는데"

#3라운드

금녀의 종목으로 여겨지던 권투에 입문한 지 벌써 5년째. 주희의 권투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빈혈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해왔던 마라토너의 꿈을 접고 힘들어하던 때 만난 게 권투였다. 자신감을 상실해 말수가 적어졌던 주희에게 권투는 새로운 세계였다.

여자라는 이유로 망설이는 따위의 나약함은 처음부터 없었다. 무조건 해보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남들이 하지 않기 때문에 새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권투선수로서의 자질을 엿본 정관장의 권유로 데뷔전을 치른 게 고1 때인 2001년 6월30일. 일본 격투기 챔피언 출신의 사와이 미와 선수와의 한·일랭크전이었다. 결과는 무승부.

"경기규칙도 제대로 모르던 때였어요. 헤드기어를 쓰고 하는 줄 알 정도였으니까요. 너무 떨려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사춘기 소녀인데 얼굴에 신경 쓰이지 않을까. 하지만 주희에겐 그런 문제는 관심밖이다. 권투를 배우는 재미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왜 맞았는지 생각하고 다음에 덜 맞을 생각을 하다보면 얼굴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매를 맞아봐야 공격도 할 수 있는 법이래요. 공격에만 욕심을 내면 권투를 못한답니다."

권투는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이다. 시합이 제일 쉽다고 할 정도로 시합 직전까지의 준비기간이 고통스럽다. 특히 체중감량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한창 먹고 싶은 게 많은 나이인 주희에겐 더욱 그렇다. 체중감량을 할 때면 아이스크림, 탄산음료 등 먹고 싶은 게 100가지 넘게 생각난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 냉장고 앞을 서성인 적도 많았다. 하지만 주희는 고통끝에 오는 희열을 어렴풋이 맛봤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냈을 때 자신이 대견스럽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6전4승1무1패의 전적. 한국챔피언이 됐다고 하지만 달라진 게 별로 없다. 별명도 여전히 빨래순이다. 체육관 막내로 빨래 너는 일을 도맡다보니 붙여진 별명이다. 하지만 주희는 이미 회원수가 1,000명 가까이 되는 팬사이트가 생긴 스타다. 주희의 id는 fireball, 불덩어리란 뜻이다.

패배와 재기, 한 차례의 성장통을 겪은 주희는 한층 성숙해졌다. 패자의 아픔을 이해하게 됐고,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지금은 6월8일로 예정된 1차 방어전에 대비해 훈련에 몰입하고 있다. 물론 자신을 이기는 게 1차 목표. 세계 챔피언의 꿈은 잠시 미뤄뒀다. 가까이 있는 것에서부터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 때문이다. 다시 주먹을 꽉 쥐고 샌드백을 두들기는 주희의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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