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태권도를 가르칠 수는 있어도 아무나 사범이 되지는 못한다
아직도 알아야 할 것
권투 챔피언과의 사건으로 태권도장을 찾는 관원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1963년 도미 7달만에 그는 명실공히 한 도장의 어엿한 사범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의 앞길을 의외의 복병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이민국 관리국이었다. 관광비자로 도미했던 그는 쫓겨나듯이 여덟달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에게는 절망만이 남아있었다. 너무 몰라서 당해야 했던 일이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도장을 운영하려는 그의 바람은 한국에서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미국은 기회의 나라였고 쫓겨나듯이 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들 이행웅의 행실을 탓했고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행기 삯을 벌려고 하는 행위는 전부 금지를 당했고 주변의 의식은 그를 죄인 취급했다.
근근히 모은 돈으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1년만의 일이었고, 그는 다시는 무지해서 당하는 일이 없기를 소원했다. 이행웅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교육을 받고 노력했기에 이제는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는 미국식으로-프랜차이즈 경영

1년만에 돌아온 미국은 달라져 보였다. 늘어난 회원 수는 반가웠지만 여전히 배고픔과 어려운 도장 운영은 계속되었다. 12시간의 강행군을 견뎌 내야 했고 회원들과의 대련에서의 아픔조차 나타낼 수 없었다. 자리를 잡기 위한 2년의 시간 동안 배고픔과 신체적인 고통은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 안에는 태권도의 신념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힘으로 태권도와 이행웅 자신은 한 단계씩 발전하고 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1966년 광고를 하면서 조금씩 도장의 기틀이 잡혀 나갔다. 하지만 곧 이행웅은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더 이상 회원들이 늘지 않는 것이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전달방법에 문제가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이행웅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때 그는 레드 미첼 이라는 전문 세일즈맨을 만나게 된다. 미국에서는 미국식 경영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충고 받게 된 이행웅은 먼저 조직적인 운영방식을 위해 자신의 도장 2개에 다른 도장 2개를 묶어 미국 태권도 협회인 ATA를 창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프랜차이즈 운영방식이었다. ATA에 가입한 회원들에게 운영방법과 정보를 공유한 후에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남들은 한 두개씩 도장을 늘려 나가는 구멍가게식 경영을 할 때 도장을 무한정 확장시킬 수 있는 현대적인 기업구조였다. 바로 미국적 사고방식의 경영이었다.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적응할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그 결과로 ATA의 가입 회원 수는 급격히 늘어가기 시작했다.
누구나 태권도를 가르칠 수는 있어도 아무나 사범이 되지는 못한다
도장이 자리를 잡고 수입이 늘어나면서 이행웅은 딴 곳에 정신을 팔게 되었다. 그 당시 태권도 사범이라면 인기가 만점이었고, 젊은 혈기를 앞세워 방탕한 한 남자로 돌변해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행웅은 자신의 제자들의 여자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술과 도박으로 망가져 갔다. 자연히 그를 떠나려는 회원들이 많아지고 원망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행웅은 자신을 탓하는 미국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회원들이 그에게 던진 말은 충격이었다.
행웅 리는 우리들의 사범이다. 만약 우리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당신만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우리의 태권도 스승이다. 당신만은 달라야한다
실로 뼈아픈 충고였다. 무술인의 자세와 태권도의 신념 그리고 사범으로써의 자각이 망가진 순간 그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행웅은 그들의 사범이었다. 자신이 간과한 사실에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는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태권도의 철학 언행일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해 나갔다. 오랫동안 피워 오던 담배마저 끊었던 것이 그때였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혹은 자신에게 배운 태권도가 고귀할수록 그는 타인에게 귀감이 되기를 원했다. 그 모든 것을 그는 실천으로 조용히 그러나 진중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이제야 이행웅은 조심스럽게 보여 줄 수 있었다. 사범으로써 제자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진짜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만든 세계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
사범이라는 자각이 확실해지고 나서 이행웅은 자신이 결정하고 발전시키는 프랜차이즈 경영방식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도장을 운영하기 위해 회원을 모집하고 그 수를 늘려 간 것은 사실이었지만 미미한 기술만을 배우고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수가 많아지면서 혼란을 겪게 되었다.

ATA는 초반에 체계적이지 않아서 문제가 많았다. 6개월이면 바닥이 드러나는 태권도 기술과 낙후된 조직 운영방식은 회원탈퇴의 항목만을 가중시켰고 그가 품은 태권도의 꿈이 위협받기까지가 되었다. 충격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결론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기에는 이행웅은 너무 억울했다. 그는 문제점을 하나씩 짚어나가 보았다.
먼저 교육 시스템이 부실했다. 그래서 그는 효과적인 교육체계를 위한 책자를 발간하고 회원들에게 사범지침서를 지급하게 되었다. 회원들의 가장 문제점인도장운영방식에 관한 정보도 함께 공유함으로써 위기를 조금씩 넘겨갔고 1976년 드디어 제1회 ATA태권도 세계 선수권 대회를 열게 되었다.
이행웅은 자신이 만들어가고 있는 태권도 조직을 탄탄하게 키워나가기 위해 ATA 조직의 전산화 그리고 협회 회원들과의 사전 교류와 자금을 조달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금융회사의 도입 등 회원들과 함께 하는 경영을 하게 되었다. 이행웅은 무엇보다 신념과 예절을 중요시하는 무술의 스승, 사범들이 수금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해주었다. 운영에 관한 형식을 갖춘 대체 회사를 두어 ATA에 소속되어있는 운영진의 어려움을 감면해주었다.
한국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사범들을 해외에 내보내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서 아까운 인재가 버려지는 것은 조직적인 망이 없어서라고 생각한 이행웅은 그저 태권도를 가르친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태권도라는 문화를 전파하는데 기업경영방식을 응용했다. 그 경영이 성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태권도의 고급화도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행웅은 사조직으로는 ATA라는 최대의 태권도단체를 지켜 갈 수 있었다.
자신이 뿌린 만큼 거둔다.
세상에 두려울 것 없이 당당한 이행웅에게 단 하나 무서운 존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과 함께 하는 ATA회원들이다. 1983년 당시 그는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을 만큼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그는 ATA 소속 도장운영비의 40%를 차지했고 승급 심사비도 독식하고 있던 터라 이익금은 본사에 정립되고 있는게 사실이었다. 도장운영에 대해서 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회원들도 재정적인 면이 어려워지면서 불만이 많아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탈퇴를 하겠다고 나서는 회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태권도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행동이었다. 일종의 배신이었다.

이행웅은 그런 상황 속에서 자포자기로 지쳐 가고 있었다. 그 나락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함께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경영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팀웍에 대해 손을 써야 하는 경우였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행웅 혼자가 아니라 태권도라는 한가지로 만난 그 대다수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ATA가 무리 없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ATA기업을 이루고 있는 회원들을 최고로 대우해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곧바로 이행웅은 모든 것을 전면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ATA는 이익금의 배당을 사범들에게 돌리고 참여가 자연스럽도록 새롭고 참신한 프로그램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모든 것은 회원중심의 경영이라는 항목을 달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실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행웅 자신도 미래의 ATA 교육 프로그램을 위해 자산을 투자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 현재 ATA는 세계에서 이렇게 평가되어지고 있다.
가장 단결력이 강한 무술단체 ATA"
여전히 그는 ATA회원들과 함께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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