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이야기는 감독 장예모와의 인터뷰 내용서 퍼온 글입니다.
―그렇다면 ‘영웅’속에서 그대가 추구한 테마는 무엇인가?
“‘영웅’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본 무협영화이다. 그런데 나는 전통적인 무협
영화의 테마에서 근원적으로 탈피하고 싶었다. 전통적인 무협영화는 반드시 세가지 주제
가 있다. 그것은 강호(江湖)요, 복수(報仇)요, 사랑(愛情)이다. 그런데 나의 작품에는 강
호라는 장(場)이 빠져있다. 그리고 복수와 사랑도 궁극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이러한 테
마를 살리기 위해 나는 진시황제 정(政)이라는 인물을 택했을 뿐인데 선생은 나의 의도
를 오해했다. 내가 추구한 테마는 오직 협(俠)이라는 전통관념의 긍정적 맥락일 뿐이었
다.”
―협(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의를 위하여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릴 줄 아는 사신취의(捨身取義)의 정신이
다.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선생도 협지대자(俠之大者)는 위국위민(爲國爲民)이라고
말했다. 협이란 삶의 큰 목표가 있는 사람이다. 그 목표란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
憂,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하고,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하는 동방인의 보편관념이다. 이러한 보편관념이 ‘영웅’에서는 천하
(天下)라는 두 글자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끝없는 통고를 종식시키기 위해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받아들인다고 하
는 파검(破劍, 리앙자오웨이 분)의 논리는 도가적인 무위(無爲)로 해석하기에는 너무 설
득력이 빈약하다.
“나는 이 영화의 진정한 영웅은 파검이라 생각했다. 파검의 불살(不殺)의 붓의 정신을
나는 선생이 간파한대로 도가적 무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을 진시황의 천하통일,
즉 제국주의의 정당화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리고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으로
각 시대의 통치계급에 의하여 끊임없이 다르게 이루어져왔다. 확실한 것은 모두 자기의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며, 모두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객관적으로 진실
이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해석만 있을 뿐 진실이 없다. 영원한 절대적 표준이
라는 것은 없다.”
―매우 철학적이다. 문화대혁명은 비극이었나?
“비극이었다.”
―역사의 과오라 말할 수 있는가?
“역사의 과오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적·사회적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을 대놓고
작품속에서 표현할 수는 없다. 이렇게 선생하고 얘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영웅’은 한 사태를 놓고 세가지 다른 해석이 공존하고 있다. 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오몬’(羅生門)에서 영향받았나?
“힌트얻었다. 그러나 ‘라쇼오몬’은 다른 해석들이요 ‘영웅’은 다른 상상들이다. 그
렇지만 상상도 해석이라고 한다면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되어도 상관없다.”
―‘영웅’에는 색채의 형식감이 뛰어나다. 분명한 의도가 있는가?
“있다. 홍색(紅色)은 격렬한 감정을 나타낸다. 남색(藍色)은 희생을 나타낸다. 백색(白
色)은 진실이다. 주관의 색깔이 없으면 곧 진실이다. 흑색(黑色)은 음양오행이론에 의한
진나라의 국색(國色)이다. 녹색(綠色)은 회상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중 가장 근본적인
색깔은 흑색이다. 이것은 중국의 수묵산수화의 화론(畵論)에서 빌려온 아이디어다. 흑분
오색(黑分五色)이라, 검은 묵색은 다섯 가지 색깔을 함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검
은색 장면에 나는 무척 신경을 썼다. 검은 병마의 대규모 씬은 유례가 없었다. 만족할 만
한 결과를 얻었다.”
―호수면 위에서 파검과 무명이 싸우는 장면은 천하일품이다. 어디서 힌트를 얻었나?
“그것은 무협지에 나오는 경공(輕功)이다. 잠자리가 물을 치는 청정점수(춵쭰點水), 제
비가 수면을 타다닥 치고 나는 연자삼초수(燕子三抄水)의 고수무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안의 ‘와호장룡’에는 사실적인 초식이 많은데 반하여 그대의 ‘영웅’속의 무술장
면은 너무 환상적이라는 비판이 많다.
“그것도 오해다. 나는 고수들의 무술을 치고 싸우는 살상의 게임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
라 선생과 같은 높은 경지의 철학자들끼리 만나서 의경(意境)을 떠보는 것과 같은 상징
적 교환으로 생각했다. 그걸 보통 점도위지(點到爲止)라고 한다. 서양의 무술처럼 무지막
지하게 사람을 두드려 패는 살의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자연히 환상적인 표현이 많
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씬에 진왕 정(政)이 인검합일(人劍合一)의 단계에서, 수
중무검(手中無劍)의 단계를 거쳐, 심중무검(心中無劍)의 단계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에 무
명은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만난 장이머우는 매우 해맑은 모습의 인간이었다. 대가인척 하는 태도가 없었고, 무
엇이든지 솔직하게 스트레이트로 대답했다. 나는 그와 두어 시간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날 둘이 나란히 앉아 메가박스 제1상영관에서 ‘영웅’을 같이 관람했다. 영화
가 다 끝나갈 무렵,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화를 보면서 후회되는 곳이 없소?
“없소돬”
마지막 악수를 나누면서 나는 그에게 힘주어 말했다.
―그대는 위대한 예술가! 결코 비판정신을 잃지 마시오. 그것 하나를 잃으면 당신의 예술
은 인류로부터 외면당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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