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실전무술의 세계(2)


풀 컨택트 룰이 탄생하기까지!! "보호구’냐, ‘슨도메’냐 ?! 두 개의 대립되는 룰"


당시, 故 최영의 총재(일본명 :오오야마마쓰타츠)가 제시한 경기 방식, 즉 <풀컨택트 녹다운 룰>은 향후 가라테계는 물론, 격투기계 전체를 크게 변화시킬 만한 일대 혁신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유도나 검도 등의 타 무도에 비해 가라테의 경기화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검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경기화를 모색하던 가라테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룰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가라테계 내부에서는 검도의 보호 도구를 보완해 쿠미테(겨루기)를 하거나 경기를 치르고자 하는, 이른바 <보호구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도쿄대 학생들과 몇몇 유파가 중심이 된 그룹이 주장하던 <보호구 착용 룰>이 실전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1940년대 말, 최영의 총재 역시 처음에는 바로 그 보호구 착용 룰을 기초로 한 경기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도관(松濤館)유파가 <슨도메 방식>을 주장하면서 가라테의 경기화를 향한 흐름은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슨도메 방식>이란, 자신이 펼친 공격 기술을 대결 상대의 신체에 닿기 전에 멈추는 방식으로, 송도관 유파에서 오래 전부터 행해오던 기본 쿠미테 수련의 연장선에 놓여진 수련법을 말한다. 이인일조가 되어 한 사람은 공격을 하고, 한 사람은 방어에 치중하면서 공격기술과 방어기술의 타이밍을 수련하는 방법으로, 원칙적으로 슨도메 방식에 따라 진행되었다.

아마도, 송도관류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직선 공격계 기술>을 이용한 단발공격을 서로 맞교환 하는 전술을 주류로 삼고 있는 유파에 있어서 ‘슨도메 방식’은 위화감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송도관류 가라테는 도쿄를 중심으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유파였으며, 척식대학, 와세다 대학 등 상당수의 대학 가라테부를 그 세력 하에 두고 있었다. 가라테계의 통일을 추진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유파가 송도관류였으며, 슨도메 방식은 바로 그 송도관류의 정치적인 배경과 더불어 점차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이렇게 가라테 룰은 1950년 ‘전일본 대학 공수도 연맹’이 송도관류의 리드에 의해 결성되면서 차츰 ‘슨도메 방식’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57년, <제 1회 전일본 학생 가라테 선수권 대회>는 슨도메 방식을 채택한 채 개최되기에 이른다. 그것이 일본 가라테계에 있어서 슨도메 방식에 의해 개최된 공식 가라테 경기의 효시가 되었다.

최영의는 1940년대 후반, 일정 기간 동안 강유류에서 가라테를 수련한 적이 있었다. 강유류는 육체단련을 중시하고, 실제로 신체 접촉을 통한 쿠미테 방식을 채용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강유류에서 최영의는 극진가라테의 기초를 익혔다. 당시 강유류는 보호구를 착용한 쿠미테를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강유류 조차도 송도관류가 선도하는 슨도메 방식에 차츰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순수하게 가라테의 길을 추구하기 위함 이라기 보다는 정치역학에 경도 되어가는 강유류를 지켜보면서 최영의는 크게 실망을 하게 된다. 당초 강유류의 한 일파로써 개관한 <오오야마 도장>이었지만, 강유류에 적잖을 실망을 느꼈던 최영의는 도장의 수련 내용에서 차츰 유파의 색을 없애가는 데 주력하게 된다.

1960년대 초기, 오오야마 도장은 수련생 모집용 간판에 <강유류, 소림류, 소령류, 중국권법 등의 요소를 도입한 실전 무술도장>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송도관류에서 강유류를 거친 최영의는 스스로 이상으로 하고 있는 가라테에 더욱 매진하기 위해 그 이후부터 유파에 대한 폐쇄성으로부터 속박 받지 않고, 이종격투기의 장점들을 그 체계에 흡수해가면서 쿠미테(겨루기)시합에 대한 룰도 독자적인 방법을 꾸준히 테스트해보고 있었다.


‘싸움기술(?)’ 에서 실전 가라테로!!

<오오야마 도장>시절의 쿠미테에는 특별한 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찌르기’나 ‘차기’는 물론, ‘던지기’나 ‘조르기’ 등의 기술을 사용하던 사람도 있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그건 마치 ‘싸움기술’ 처럼 보이기도 했다. 특히, 쿠미테(겨루기, 조수) 때 맞선 두 사람의 기백은 마치 목숨을 건 비장한 싸움과도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도장 수련생들의 꾸준한 증가와 함께 언젠가는 시합을 개최하리라는 마음을 가진 최영의 총재는 ‘언제까지나 이런 형식의 쿠미테로는 곤란하다’는 생각에 가라테도의 근본 정신에 충실한 룰을 만들 것을 결심한다.

“음…본질적으로 가라테는 ‘찌르기’와 ‘차기’를 주체로 하는 무도이기 때문에 ‘던지지’라던가 ‘조르기’와 같은 기술은 정말 라이벌끼리의 쿠미테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 수련생들 간의 쿠미테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렇다 할 만한 룰이 없었기 때문에 찌르기로 상대의 안면을 가격하는 것도 당연시 되었고, 금적차기(낭심차기) 등도 일상적이었다고 볼 수 있죠. <제1회 전일본대회>가 열렸던 당시에도 도장에서의 쿠미테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습니다. 안면 공격은 예사였고…, 그러니까 평소에는 스스럼 없이 하던 안면 구타를 시합 때만 특별히 약속에 의해 생략했다는 표현이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어느 극진 지부장의 말이다.

‘오오야마 도장’의 후기는 이처럼 거의 금지 기술이 없는 <직접 타격방식에 의한 쿠미테>를 실천해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기존의 가라테 유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건 마치 <가라테 수련>과는 너무나도 동 떨어진 모습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싸움’ 이라고 표현해도 좋았을 법한 쿠미테 광경은 기술적인 면에서도 아직 세련미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었다. 하지만, 그런 쿠미테야말로 무도인 최영의가 늘상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던 <압도적으로 강한, 지상 최강의 실전 가라테>였으며, 또한 그 것을 위한 시금석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이 현재의 극진가라테의 기초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미 이 시기는 슨도메 방식의 가라테가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오오야마 도장’의 가라데는 전통유파 측 입장에서 <싸움공수>로 치부되어졌고, 최영의는 가라테계로부터 점점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최영의는 확실하게 극진가라테의 기초를 축적해가고 있었다.


‘혁명’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극진 룰’

1969년, ‘제1회 오픈토너먼트 전일본 가라테도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최영의가 추구하는 무도 가라테는 이 때 처음으로 그 베일을 벗었다. 신체에는 어떤 보호구도 착용하지 않은 채 직접 타격방식에 의해 서로의 기술을 교환한다. 승부는 원칙적으로 녹아웃만을 갖고 결정한다는 획기적인 룰. 당시의 신문 기사에는 이 대회를 일컬어 <살인대회>라 칭했으며, 일본 경시청에서도 대회 개최 전에 야단법석을 떨며 사정 청취에 착수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일개 가라테 단체가 개최한 가라테 선수권 대회는 불과 하룻밤 사이에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 대회는 가라테계, 격투기계에 있어서 ‘혁명적인 이벤트’였던 것이다.

현재 가라테계의 세력도는 20년 전과 비교해보면 큰 변화를 보이고 있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예전 슨도메 방식의 가라테의 총본산이었던 ‘일본가라테협회(송도관류)’는 계속되는 분열을 거친 다음 ‘전일본 가라테도 연맹’의 산하로 들어 왔다.

‘전일본 가라테도연맹’은 슨도메 방식을 고집하면서 스포츠로서의 가라테를 추진하고 있다. 체협에 참가하고, 학교의 클럽 활동과 사회인 스포츠 활동에 힘을 쏟고 있는 ‘전일본 가라테도연맹’의 활동은 <스포츠 가라테>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낸 것은 높게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 가라테계에 있어서 ‘전일본 가라테 연맹’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후퇴하고 있다. 그러나 ‘전일본 가라테 연맹’의 추락과 반비례해서 극진회관은 세계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유파, 단체로 성장했다. 최영의가 제시한 직접 타격제에 의한 극진 룰(국제 가라테도연맹 룰)은 이제 명실공히 세계의 주류가 된 것이다.

현재 극진회관 이외의 수많은 유파가 이 룰을 채용하고 있으며, 비단 그 영향력은 가라테계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요 몇 년 사이 실전 경기를 표방하며 대두되고 있는 UWF계 프로레슬링, 그레이시 유술, 골법, 슈팅 등 신흥 격투기나 킥복싱, 이들 격투기 대회의 등장과 인기는 모두 극진가라테 인기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최영의는 말한 적이 잇다. “현재의 ‘격투기 붐’이라 불리는 것은 모두 극진가라테가 그 원천이며, 극진가라테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다”고. 그의 이와 같은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반세기에 걸쳐 오직 가라테 만을 위해 살아왔고, 진정한 무도를 추구해 온 최영의이기 때문에 지상 최강의 무술, ‘진짜 극진가라테’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극진회관’에서 파생된 신생 무술단체

극진가라테가 일본 무도계, 아니 세계 무도계에 남긴 족적은 너무나도 크고 위대하다. 슨도메 방식의 룰을 과감히 깨트리고, 실전 지향적인 ‘풀컨택트 룰’을 도입하였는가 하면, 극진 유파에서 수련했던 인물들이 극진의 품안을 벗어나 새로운 유파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독립하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 주었다.

특히, 정도회관의 이시이 관장의 경우 극진에서 탈퇴하여, 세계적인 무술대회 을 개최하여 세계적인 규모의 대회로 발돋움 시키는 등, 극진회관 출신 들의 활약상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 뒤에는 수련인구 1,200만을 자랑하는 <극진회관>이라는 거대한 산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정도회관(正道会館)
대표 : 石井和義(이시이 카즈요시)
극진회관에서 수련, 극진회관 탈퇴 후 정도회관을 설립. 1993년 4월, 세계 최강을 가리는 입식 타격계 격투기 대회 을 개최.


▶ 원심회관(円心会館)
대표: 二宮城光(니노미야 죠오코오)
1954년 1월 27일생. 뛰어뒤차기를 주특기로 가지고 있으며, 화려한 쿠미테를 구사한다. 제 1회 극진가라테 세계대회 3위, 제 10회 전일본대회 우승. 전일본 대회 우승 후 극진회관을 탈퇴, 현재는 원심회관 관장 역임

▶ 대도숙(大道塾)
대표 : 東孝(아즈마 타카시)
1949년생, 극진회관 현역시절 중량감 넘치는 하단차기로 <인간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었던 인물. 제 9회 전일본 선수권 대회 우승을 필두로 하여, 제 1, 2회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남겼다. 현역 은퇴 후 실천적인 가라테를 지향, <대도숙>이란 단체를 세우고, 숙장에 취임

▶ 극진관
대표 : 盧山初雄(로오야마 하츠오)
1948년 3월 31일생, 사이타마현 출신. 63년 10월 <오오야마 도장> 입문. 하단돌려차기, 미카즈키케리, 정권찌르기 등을 무기로, 제 5회 전일본 대회에 처음으로 출장하여, 첫우승을 거머쥔다. 중국 권법 등을 수련, 극진가라테의 기술 향상에 상당한 공헌을 세웠던 인물. 극진회관 최고고문을 역임했다. 현재, <극진관>설립을 추진 중에 있다.



*실전 격투기 대회 소개 중 일부는 <격투장-MAS(mas.freemaker.com)>, 일본 격투기 종합 사이트(sportsnavi.yahoo.co.jp/fight/index.html)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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