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철 칼럼] 꼰대의 역설적 풍경
[정준철의 태권도 바로가기] 원로 사범님들의 왕성한 활동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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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사회의 발전은 서구 사회뿐 아니라 아시아까지 영향을 주어 지구촌 전체에 영향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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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빈토플러가 말했던 '충격'은 물리적 측면이 아닌 문화에 집약되어져 있다. 그래서 서양과 동양이 마주하는 순간 충격이 일어나고, 때로는 경이로움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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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힘이 더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2019년을 사는 대한민국의 발전은 서구 사회가 추구하는 발전과 그 걸음을 함께 하고 있다. 그로인해 문화적인 충격은 서양과 동양의 대립이 아닌, 서구에서 마주하는 ‘집단’에 대한민국 역시 동의하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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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발전 역시 동양적 사고가 아닌 서구적 사고에 의해 재해석되었고, 이미 삶 깊숙이 침투되었다. 안타깝게도 서구 사회가 대립각을 세우는 집단은 하나의 나라도 아니고, 하나의 문화도 아니고 ‘약자’ 혹은 자본논리에서 적응하지 못한 ‘집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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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구촌은 서구화 되었고, 대한민국으로서 사는 사람들 역시 서구적인 형태로 살아가고 있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서구 사회가 추구하는 ‘발전’은 인간애로 귀결되지 않는다. 인간애로 사용되는 용도가 있다면, 인간의 지닌 감수성으로 포장하여 결국은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끔 만드는 미디어(멜로와 히어로물)가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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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는 정치적 단어로 한정되지 않음에도 정치적 단어로 전락되었고, 그것은 거대정당의 대립구도로서 존재하여 매일 전쟁 중이다. 그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착각 한 대중들 역시 매일 전쟁 중에 있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는, 대립구도가 아닌 서로 공생하는 관계이고 존재론적으로 필요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정치인들은 명분이 필요했고, 그 명분에 적당한 옷이 진보와 보수가 되었는지 모른다. 철학적인 측면을 보면 진보는 서양에 가깝고, 보수는 동양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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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데 발전의 의미에 ‘창의’라는 의미가 섞이면서, 진보가 무조건 좋은 것이고, 보수는 낡고 오래된 것쯤으로 해석되는 기류가 문화적 전반에 스며들었다. 발전이 곧 창의가 될 수는 있지만 창의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 중에서도 ‘약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창의는 인간을 위한 것 보다는 국가보다 강한, 전 세계의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기업은 곧 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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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먹은 인류의 종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확실히 ‘꼰대’는 부정적 기류에 편승되었다. 세상은 낡고 먼지가 쌓여가는 풍경을 ‘오래되었음’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오래된 것들을 비아냥거리기 위해 ‘꼰대’라는 신종어도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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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꼰대’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지, 나이 먹는 인간을 폄훼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더불어 “권위적이다”라는 말은 사회체계가 만든 이념적 병폐이지 인간의 근원적 모습까지 확장시키는 것은 무리가있다. 오히려 권위적인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슬픈 현실이지, 잉태에서 노인이 되는 과정 즉, 오래되어가는 과정을 비아냥거리는 것은 대단히 모순적이다. 이런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어리석음을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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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하는 “라떼는 말이야” 는 젊은 꼰대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반증일지 모른다. 과거를 회상하지 않는 인간이 과연 정상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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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태권도 역시 그런 기류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예전 것들을 터부시 여기고 참신한 것을 추구하는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태권도의 진정한 가치는 새로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흰 띠부터 지금까지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는 원로 사범님들에게 있는 것이다. 단순한 논리지만, 태권도의 깊이는 오래 수련한 사람에게 존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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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젊은 사범님들이 말하는 것들이 참신할 수는 있으나, 동양적 사고의 발전은 서양의 발전과는 다르다. 불편하고, 낡은 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고, 낡은 것을 지켜가는 가는 것이 동양적 사고에 기인한 발전이다. 이전 것을 갈아엎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가 했다”라고 생각하는 발상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것은 곧 자신을 들어내고 싶어 하는 욕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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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이제 나같이 별 볼일 없는 태권도 사범이 아닌 사범으로 불릴 만한, 태권도 원로 사범님들이 많이 활동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도복입고 담배피고, 슬리퍼 신고, 자신이 꼭 처음인 냥 떠드는 사범들을 훈계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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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서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합리적’, ‘실용적’ 논리 앞에 마주한 ‘불편하고’, ‘세련되지 못한’ 것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려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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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보수적인 형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 발전은 변화가 아니라 계승이다. 나를 포함 한 젊은 사범님들의 열정은 높이 평가하나, 쉽사리 얘기하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권위적일 수는 있으나 서구 사회에서 바라본 태권도의 위대함은 숨이 막힐 만큼, 퍽퍽한 예의를 바탕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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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지나친 합리성과 실용성은 서구 사회가 매력 있게 본 대한민국의 태권도가 아니다. 이제야말로 원로 사범님들의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시기다. 그래서 좀 더 위계질서를 지켜야 할 시기다. 그것은 인간으로서가 아닌, 도복을 입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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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이 가득한 시대이다. 착각하는 순간, 어느새 우리 역시 누군가로부터 터부시 되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순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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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카스미디어 = 정준철 기자 ㅣ [중복이메일]2 | bambe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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