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칼럼] 싸움은 싸움꾼이나 하는 것이다!
태권도에 괜한 프레임을 씌우지 않았으면...
![[이동희 칼럼] 싸움은 싸움꾼이나 하는 것이다!](https://data1.mookas.com/2019/10/2019-10-24_16-41-05-85682-1571902865.png)
예전에 외부에서 세미나를 진행한 적이 있다. 보통 태권도인들이 발차기는 잘 하시는데, 손기술이 부족하시니 이 부분에 대해 교육을 열심히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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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미나가 끝나고 지켜만 보시던 대표 선배 사범님께서 하신 말이 ‘결국 싸움꾼은 이길 수 없고, 이런 사람은 따로 있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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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이해하기로 말씀의 핵심은 ‘태권도는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정말 싸우려면 이를 위한 사람, 기술은 따로 있다. 태권도는 정신수양을 위한 것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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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실전’태권도 세미나를 진행한 나는 말 그대로 ‘황’ 돼버렸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반박도 하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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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신을 수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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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武道)를 수련하는 도장에서 흔히 하는 말이다. 옳은 말이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이다. 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영의 선생님도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정의는 정신 혹은 도(道)를 의미한다고 해도 크게 왜곡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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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몇몇 혹은 많은 도장에서 정신수양이라는 말을 핑계거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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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수양! 흔히 도(道)를 닦는 것! 이런 것들은 굳이 무도 수련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생업을 하며 겪는 수많은 갈등구조에서 충분히 닦을 수 있고, 관련 학문을 공부하거나 여러 경전(經傳)을 탐독하여 수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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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전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장자에 나오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처럼 어떠한 분야에서든 도(道)를 이루고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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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수련은 무도수련만의 어떤 것으로 수행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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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를 예를 든다면 품새(꼭 태극 1장과 같은 품새뿐만 아니라 혼자서 수련하는 모든 것을 의미)를 통해 자신의 몸을 컨트롤 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며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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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라는 것이 중요한데 올바른 방향으로 집중이 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위빠사나 혹은 명상계의 마음챙김(알아차림)이라는 상태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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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깊어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외부를 보는 시각까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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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품새(혼자서 하는 모든 종류의 수련)를 수련하며 이렇게 순수한 집중의 상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게 품새 수련을 할 때는 개인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대회에서의 입상과 같이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상태로는 맘속에 사적인 의도가 있기 때문에 위에 언급한 깊은 명상의 상태에 도달하기는 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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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선수로써 이것은 꼭 필요한 동기이다. 너무 당연한 것이라 여기에 대해서는 당장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순수한 수련의 관점으로 연관 짓는다면 한 번 깊이 생각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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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이 길었는데, 개인적으로 무도에서의 정신수련의 백미는 어쨌든 겨루기(격투) 수련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품새도 좋지만 사실 품새의 동작과 본질 자체가 공격, 방어 동작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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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싸워야 하는 상대를 가정하고 수련하는 것이고, 검증은 상대와 겨루어야 이루어진다.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상대와 싸운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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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고행(苦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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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 종목을 막론하고 품새 수련과 겨루기 수련 두 가지 수련을 비교한다면,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겨루기 수련이 더욱 정신수양을 깊이 할 수 있는 환경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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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과 마음만 컨트롤해야 하는 것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이 명확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를 이기기 위해 아니, 최소한 ‘받아들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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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상대를 이기는 과정에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고, 상대를 짓누르는 것에 몰입하여 나쁜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빛과 그림자처럼 ‘도(道)가 높아질수록 마(魔)가 높아진다.’는 말이 있다. 항상 이 점을 경계하며 수련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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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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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새(혼자 하는 형태) 수련보다 겨루기(격투와 같이 남과 겨루는 형태) 수련이 더 정신수양을 깊이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내 말이 틀렸다고해도, 겨루기 수련을 통해 정신수양을 깊이 할 수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술의 본질은 결국 남과 겨루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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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정신수양을 핑계거리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예를 들어 본인이 자신 없는 부분을 정신수양이라는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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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UFC 챔피언이라 해도 어떤 부분에서는 약할 수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누군가에게 패배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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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어떤가. 그럴 수도 있지. 정말로 창피한 것은 부족한 점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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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는 정신수양을 위한 것이다. 싸움은 싸움꾼이나 하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말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자체가 사실 본인은 이 부분에 자신이 없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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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두려울 수 있다. 패배가 두려울 수 있다. 나도 항상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무도인이 아닌가. 항상 이 부분에 대해 부족한 점을 채우고 대비하려 노력하고 있다. 즉 수련의 경향성이 누구와 겨루어도, 설령 지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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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를 수련한다는 사람이, 수련의 경향성이 겨루기(격투)에 알맞게 하지 않는 것도 조금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더 문제는 본인이 자신 없는 것을 정신수양이라는 핑계로 가린다는 것이다. 져도 되니까 그냥 부족한 부분은 인정을 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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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선수랑 싸우면 이길 수 있어요?’ 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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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는 정신수양을 위한 것이므로, 싸움과는 다르다. 자신의 마음을 닦고 예의를 지키며 상대를 배려하고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이룰 것이며....어쩌구 저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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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말씀이긴 한데, 핑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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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을 주로 사용하는 태권도를 수련했기 때문에 복싱선수와 붙는다면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주먹으로 사정없이 맞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 태권도에도 손기술이 있는데 이 부분은 내가 매우 부족한 부분이다. 수준 높은 복싱 선수를 만난다면 그에게 많이 배워 나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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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이런 말이 홍익인간 어쩌구 하는 정신수양 언급하는 것보다 더 높은 정신수양의 경지를 보여주지 않는가 싶다. 겸손, 자신을 개발하려는 노력, 자신과 상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시각 등 모든 면에서 전자의 말보다 앞서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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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수양을 언급하고 강조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옳은 일이다. 문제는 정신수양을 무기 삼아 무분별하게 언급하며 태권도를 더욱 강하게 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방해한다는 것이고, 자칫하다 태권도를 고인물로 남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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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히 잘 나가는, 현재 충분히 훌륭하며 앞으로도 더욱 강해질 태권도에 괜한 프레임을 씌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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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동희 사범 ㅣ jsrclu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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