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순간까지 태권도와 함께 한 최홍희 총재
떠나는 순간까지 태권도와 함께한 최홍희 총재
떠나는 순간까지 태권도와 함께한 최홍희 총재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영웅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들을 살펴보면 역시 범인(凡人)들과 다른 것을 엿볼 수 있다. 태권도 창시자로서 목숨이 끝나는 순간까지 태권도를 위해 살다가 얼마 전 타계(他界)한 故최홍희 총재의 평양에서 마지막 모습의 사진이 관계자들의 유언장과 함께 그의 가족에게서 공개되었다.
최 홍희 총재의 유언을 받은 관계자들은 아래와 같다.
부총재 이 기하 사성
사무총장 톰 메칼론 사현
자문위원장 룡와이멩 사현
대변인 겸 특별보좌관 황광성 사성
자문위원 박 종수 사성
자문위원 황 진 사현
조선태권도위원회 황 봉영 위원장
국제무도경기위원회 정 재훈 사무총장
조선태권도위원회 라 봉만 서기장
유언장 서두에서 최 총재는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한 행복한 사람" 이라고 했다.
평소 최 총재는 자신이 죽으면 관 위에 "태권도"란 세 글자만 올려 달라고 하며 태권도 창시자로서 죽음까지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고 이야기 했다.
최 총재는 죽는 순간까지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최 총재가 죽는 순간까지 평상심을 잃지 않고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그의 강인하고 자신감 있는 성격과 유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은 할 일을 다한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자긍심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30년을 살아온 캐나다를 떠나면서 평소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 준 사람들을 위해서, 위암 말기의 고통에서도 평소 그가 아끼던 것을 베풀면서 직접 챙겨 주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을 만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다.
또한 최 총재는 목숨이 끝나는 며칠 전 까지 찾아온 사범들에게 광개틀을 직접 가르치며, 지쳐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앞둔 고통 속에서도 과연 태권도를 가르치고 싶었을까?
이것은 그가 위암 수술 후 집도했던 의사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캐나다로, 그리고 그 다음달 미국 세미나에 참석해 세미나를 직접 주관 한 것은 최 총재의 태권도에 대한 열정을 반영하는 것이다.휠체어를 타고, 링겔 호수를 꽂은 채 강행한 감동적인 덴버 세미나는 그가 평생을 해온 세미나중의 마지막 세미나가 되었으며, 그 후 2달이 지나 최 총재는 떠났다.
그는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태권도와 함께 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 1800여 개의 태권도 술어와 3200여 개의 동작을 만들어 낸 것은 최 총재가 사선(死線)을 몇 번씩 넘으면서 일구어낸 그의 인생 파노라마와 같다.
해방 전 일본 중앙대를 다니면서 단순히 싸움 목적에서 쇼토깐 가라데를 시작한 그가 25년 앞서 자리잡은 가라데보다 우월한 태권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시대적으로 일제하에서 벗어나고, 나아가서 일본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태권도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학병으로 봉기해서 일본과 대적하려 다가 발각되어 해방이 되어 사형 3일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것이 그 유명한 "평양학병사건"이다. 그는 가라데를 했기 때문에 태권도를 만들 수 있었다고 했다. 일본 무술인 가라데 보다 더 우수한 무술을 위해 노력한 것이 한 평생 그가 만들어 놓은 태권도 인 것이다.
최홍희 총재는 비록 물리적으로는 일본을 응징하지 못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일본을 다스렸다.
1960대부터 그가 만들 틀(型)명칭을 삼일(3.1),중근(안중근) 등으로 지금에 와서는 일본인들(JITF)이 스스로 안중근 의사를 설명하고 3.1절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 국제연맹소속의 태권도인들 에게 해당되지만, 역사 교과서 왜곡과 독도 문제로 한국이 일본에게 끌려가는 것을 비교하면, 태권도가 일본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일본에 최 총재의 태권도인 많아진다는 것은, 다르게 해석하면 태권도가 일본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 된다.

1960대 가라데, 공수도를 고집하던 現 태권도계 이종우 원로 같은 사람들이 단체로 공수도와 태수도(태껸+공수도)를 고집하고, 주장할 때 최 홍희 총재는 혼자서 민족정신으로 틀(型)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 태권도계의 이종우 원로가 만들어낸 跆拳道 型이 지금까지 국기원을 통해서 교육하고 있는 太極형이다.
지금도 가라데 교본에 실려 있는 太極형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면서 제 밥그릇만 챙기는 것이 한국 태권도계 원로들의 주체성 없는 현실인 것이다.
최 홍희 총재가 생전에 한국 태권도를 사이비 태권도라고 한 이유가 일본인 가라데 술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한국 무도계의 초창기인 1950년대부터 오직 자기 실익만 쳐다보고 태권도를 이끌어 온 원로 관장들의 형태들이 지금 한국 태권도계의 비리사태를 만들어 냈으며, 그들은 아직도 我田引水 식으로 해석하며, 최 홍희 총재를 부정해 왔다.
얼마 전 태권도 최고 원로라고 할수 있는 이종우 부원장이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언론상에 공개한 것이 한국태권도계를 지금까지 이끌어온 원로의 인격이며, 지금 태권도계의 얼굴 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최 홍희 총재를 더욱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들의 비리와 치부가 이 세상에 일부 알려 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작은 거인 최 홍희"가 떠난 지금, 이제 국제연맹은 風前燈火라고 쾌재를 부르고 있을 그들은 한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들이 끝까지 부정한 최 홍희는 같지만 태권도는 영원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소 태권도통합이 남북 통일의 초석이라고 부르짖던 최 총재는 기어이 그의 조국 반쪽인 남한 땅을 30년 동안 한번도 밟지 못하고 북녘 땅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통일을 열망하면서 평생을 연구해온 모든 태권도자료와 세계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남긴 유품들을 평양 태권도전당에 기증했다. 태권도의 모든 것이 결국에는 南이 아닌 北으로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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