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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태권도의 선구자 - 이종우


일상에서 공기의 존재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 마냥 한국인에게 태권도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4분의 일 이상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를 배우고 한국 남성의 대부분은 태권도를 배운다. 태권도 용어들도 일상언어처럼 사용된다. 그러나 인류사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그냥 만들어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현 태권도인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태권도의 아버지.
이종우 현 국기원 부원장이다.

태권도의 역사는 45년 남짓. 전세계 4천 5백만 명의 태권인들. 올림픽 입성이라는 놀랄만한 기록 앞에 그 주춧돌이 된 장본인이 바로 이종우 부원장이다.

"빨리, 강하게, 정확하게."


인생의 길 위에서 자신이 주인공으로 살아온 사람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비록 몇 줄로 짧게 정리되지만 그 짧은 행간에는 그의 태권도 인생이 담겨있다. 빨리, 강하게, 정확하게. 바로 태권도의 모토이다. 이런 기본에서부터 출발, 태권도의 용어 즉 앞돌려차기에서 품세까지 그가 태권도의 틀거리와 함께 창조해 낸 언어들이다.
그 많은 일들을 다하고도 그가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 탓에 단 한번도 원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현역이다. 태권도는 그를 잠시도 쉬게 놔두질 않는다. 자그마치 54년의 세월이다. 20세기의 태권도 연혁에서 그의 이름은 한번도 빠진 적이 없다. 태권도의 역사는 바로 그의 삶이다. 그런 그가 이제 21세기에 도전하고 있다.

승부욕이 강한 문학 청년


많은 위대한 발명들이 우연히 만들어 졌고 인류사의 업적과 위인들의 삶이 우연히 개척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시아식 표현으로 팔자라고 한다.
태권도는 그에게 운명이었고 팔자였다.
1946년 3월 22일. 당시 나이 19세. 해방 후 경신고에 재학 중이던 그는 친구의
권유로 대한보이스카웃에 들어가게 되고 그 친구의 권유로 무술을 시작하게 된다. 대개의 역사적 혼란기에 무술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던 터라 막내 동생이었던 그에게 그의 형은 무술을 배울 것을 권하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소공동의 조선연무관에서 무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당시의 무도나 스포츠는 소수의 것이었지 현대처럼 대중화된 붐은 아니었다. 그 당시 도장은 해방 직후 청도관, 조선연무관, 공수도부, 무덕관, 창무관, 송무관으로 대표적인 5개관으로 대개 유도와 권법, 가라데 등을 가르쳤다.
1946년 3월에 개관한 조선연무관은 유학파 엘리트 출신의 전상섭 선생이 운영했던 곳으로 그는 입관한지 얼마되지 않아 스승의 총애를 얻으며 그 도장 최고의 실력자로 자리잡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강한 승부욕. 수련 방법에 대해 물었을 때 그가 말한다. 사고력을 갖춘 훈련과 강한 승부력, 노력하는 사람만이 고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단순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그때까지도 그는 태권도가 그의 인생 전부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문학청년을 꿈꾸다.

피난 시 대한학생신문에서 활동했었고 한때 문학가를 꿈꾸기도 했다는 그. 서울 수복 후 서울에 돌아온 그는 택시사업을 하던 형님을 돕다가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당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김동진 주필이 그 사람이다. 그 다음 그가 하게 된 곳이 리더스 다이제스트. 그 후 화신백화점의 관리부장을 거쳐 상무이사를 지낸다.
그러나 이종우 부원장은 말한다. 언제나 돌아와 보면 그 자리더라고. 바로 태권도이다.
결국 그는 19세 이후 태권도와의 인연을 끊지 못한다. 외도했던 길들에서 언제나 태권도의 길로 돌아와 있었다. 그 덕에 그는 마흔이 넘어서야 결혼을 한다. 이 삼십대의 열정을 고스란히 태권도에 바친 셈이다. 팔자인가 보다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한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묻어나는 인생의 엄숙함이 있다.
인생은 공으로 얻어지는 것이 없다고 한다. 비록 한 때였지만 그의 상상력과 체계적인 사고는 그가 꿈꾸던 다른 길에서 얻은 선물로 결국 그것들이 지금의 태권도를 있게 한 셈이다.

세계의 태권도가 되다.


짧은 역사 동안 태권도가 세계화된 요인들은 바로 아시아의 무술의 특징인 자기 수련적인 방법론을 벗어나 조직적, 표준적, 기술적 진보라는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통합 의 장을 마련해서 소리를 하나로 모았다는 데 있다. 동료들이 관 확장에 전념할 때 아무도 손댈 엄두조차 못 내던 그곳에 자신을 투신한 단 한 사람이 이종우 부원장이다.

한국의 하나가 세계로 가자.

그의 인생은 한국근대사를 관통하는 선에 있다. 그 관통점은 바로 태권도.

1928년. 그가 태어난 해이다. 그 당시 조선은 식민지 상태였고 그의 나이 18세인 1945년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 직후 무술을 시작했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 중 부산 피난 시절에도 도장을 연다. 협회설립 의사가 나온 것은 바로 그 시절.
한국전쟁이라는 사회적 혼란기는 태권도 계에 통합의 기운을 가져오게 한다. 1961년의 5. 16 쿠테타는 유사단체 통합 바람을 가져오고 대한태수도협회 발족 시 그는 부회장을 지낸다. 또한 1965년 태권도협회의 통합작업의 주역이 된다. 통합의 이유는 단 한가지, 한국의 하나가 세계로 나가야 한다는 취지였다. 여러 개의 관으로 분리된 심사권을 하나로 합하며 그가 주장한 것은 미래를 보자는 것이었다.
그 미래에 그들은 선구자가 되었고 태권도는 세계의 것이 되었다.

세계의 태권도인들이 한국에 도착해서 처음 찾는 곳이 바로 국기원이다. 국기원의 설립목적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국기원은 중앙도장으로 태권도인의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단일화된 심사제도의 도장 역할과 사범의 재교육장으로 사용한다는 것으로 관통합 과정의 꽃으로 등장한 것이다.
태권도인의 중심에 있는 국기원의 건립부터 하늘· 땅· 사람을 아우르는 국기원로고의 제정까지 손수 이종우 부원장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1973년. 태권도가 세계화되기 시작하면서 국기원에서 세계태권도대회가 열리게 된다. 그 대회에서 출발된 것이 세계태권도연맹이다. 이전 1966년, 당시 태권도협회 최홍희 회장에게 이종우 부위원장은 국제태권도연맹을 제안한다. 그러나 국제태권도연맹이 캐나다로 이주하며 한국 내에서의 구심점에 대한 필요로 탄생한 것이 바로 세계태권도연맹이다.
현재 세계태권도연맹은 가맹국 160여개국으로 세계의 태권도인들의 연결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결국 이종우부원장은 국제태권도연맹과 세계태권도연맹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하다.
태권도를 태권도답게 하다.

태권도 초기, 코리안 가라데로 불리던 때 가라데는 세계에서 주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종우 부원장은 고민에 빠진다. 도장별로 기본이 다 다르다는 점이었다. 세계화를 위해서는 표준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대한태권도협회 기술심의회의장으로 태권도의 지도방법과 개선책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품세에 대한 정의를 통한 검증을 통해 경기에 대한 공정한 심판을 이끌어 낸 것이다. 품세는 품성 품, 세력 세로 기술적인 힘의 발산으로 사용되는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972년 12월 1일 대한태권도협회에서 태권도교본 품세편을 발간했는데 엮은 이가 바로 당시 기술심의회 이종우 의장이다.

그가 기술심의회를 집행기관이 아닌 심의 기관으로 한 이유는 태권인들의 요구와 아이디어가 쉽게 수용되기 위해 열린 곳이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태권도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태권도의 달인으로 불리운다. 기술체계를 정립한 장본인인 그만큼 태권도의 기술체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태권도에 스포츠과학 이론이 적용된 것은 이 삼 십 년이지만 그 이전에 그는 생활 속에서 발견한 물리원칙을 통해 생체역학의 이론을 발견해 낸다. 후진들에 의하면 아직도 과학이론은 격파의 원리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한다.

현재 그는 기술진보와 개정사항들에 대해 연구 중이다. 그 중 한국어로 기술용어를 사용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쉽게 공인될 수 있는 언어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해야하는 지에 대한 순서 정립을 통해 기술의 정체성을 제시하려 한다. 이제 시작하면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일의 순서를 아는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한국의 무도가 세계의 것으로.

그가 세계화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세계연맹사무총장을 지내며 현장에서 느낀 필요성 때문이었다. 동양의 무도로의 태권도가 세계화되고 기술적 진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 경기화였다.
그런 의미에서 태권도의 발달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술에서 경기로의 전환이라는 점이다. 진보주의자인 그는 스포츠적인 측면에서 단점을 보완, 기술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본다. 또한 의미부여에 대한 분류를 이전에 함으로 의미변질에 대한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기화의 핵심요소가 호구기술이다. 또한 가라데와 태권도의 경계를 나누는 지점이 호구기술의 변화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서서히 보이지 않게 등장한다. 호구나 도복 처음에는 검도복을 입고 천을 누벼서 대나무를 넣고 개량하여 스폰지를 넣었다.

현재 개발중인 전자호구의 경우도 이종우 부원장이 태권도의 과학화를 기하고 경기 때마다 시비가 되고있는 심판판정의 공정성문제를 어떻게 해소할까 골똘히 생각하던 중 고안한 것이다.

반목된 것처럼 보이지만 경기 태권도와 무도 태권도의 경계는 거의 없다. 무도 태권도가 호신 목적, 인격도야의 측면이라면 경기화 되면 페어플레이 정신이 강화된다. 그러므로 중간과정에는 정신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인격자를 길러내는 것,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목표의 정립이 그것이다.

그는 결국 스포츠 사상과 무도사상은 마음의 예의로 배려의 마음을 갖춰야 한다고 본다. 그는 무술은 기술적 의미로, 무예는 예적 단계의 좋은 기술을, 무도는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 정의한다. 인간의 동작은 예술을 만들어야 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복을 만든 그가 도복개념을 갖지 말라고 한다. 옷이 아닌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정신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

미래의 꿈이 실현되다.

이종우 부원장이 관통합을 꾀하며 태권도인들에게 강조했던 것이 바로 미래를 보자는 말이었다. 그런 그의 주장은 그리 오래지 않아 실현되었다. 그 중요한 정점으로 베트남 전쟁이라는 통로로 많은 태권도인들이 세계로 나가기 시작한다.
결국 한국의 하나가 세계로 간 셈이 된다.

1970년대 들어 국내 태권도 수련인구는 대략 1백 30만 명으로 내적 성장은 외부적인 성장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 태권도의 해외 전파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종우 부원장은 해외의 태권도에 대해 자연법칙에 의해 여러 형태로 발전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아시아 내에서 한·중·일은 문화적으로 많은 부분이 공유되지만 중국은 부드럽게 넘어가는 대륙기질, 일본은 틀의 짜임새, 한국은 자연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본다. 민족성에 맞게 변질되는 것. 그러므로 자신의 지향점에 따른 자기개성, 자기철학이 담겨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뿌리내리는 것이 바로 태권의 정신인 것이다.

세기의 파트너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그는 태권도에 있어서는 일인자로 불리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안주하지 않는다. 태권도의 발전을 위해 그는 많은 유능한 인사들을 영입하게 된다.
1971년. 태권도에 있어서 운명의 해이다. 그 운명의 주인공이 바로 현 김운용 총재이다. 이종우 부위원장은 현 김총재가 태권도계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이종우 부원장은 기술진보나 경기화를 위해 태권도의 내실을 기하는데 전념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함으로 그 후의 국기원 건립과 세계태권도연맹의 창립 등을 통해 세계화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드디어 그 팀웍은 45년만에 올림픽진출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현재 세계인들은 코리안 가라데라는 말대신 입을 모아 제패니스 태권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종우 부원장은 그 말은 태권도를 본 국민들의 입을 통해 불려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판단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세계인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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