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또 하나의 큰 산 - 최홍희
태권도의 창시
"이얍 이얍"
80세 고령의 노인이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기합 소리가 나는 무대를 향해 꼼짝도 않고 10분째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눈가엔 눈물이 글썽거렸고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 "이것을 전군에게 가르쳐야겠다."
그가 그토록 감탄하고 탄복한 것은 바로 하얀 도복을 입은 젊은 군인들의 무술시범이었다. 당수라고만 불리던 그 무술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지휘한 사람은 바로 최홍희! 그는 이 무술을 광복 후 무려 9년간이나 연구를 하며 현대적인 무도로서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한국의 고유무술인 태견에서 태(跆)-밟는다-와 주먹을 의미하는 권(拳)을 합쳐 이른바 태권도라는 공식 명칭을 세상에 내놓은 당사자이다. 불과 45년의 짧은 역사. 그 짧은 기간동안 전세계 150여 개국 5천여 만 명이 즐기는 무도로 성장한 태권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정식 종목이 된 태권도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 역사의 시작 속에는 최홍희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다.
공부는 낙제, 장난은 일등인 어린시절
최홍희는 1918년 11월9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이란 산골마을에서 양조장집의 5남 3녀 중 3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키가 작고 연약했던 최홍희는 장난이 심했고 학과공부를 등안시 해 12살이 되던 5학년 때에 낙제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아버지는 최홍희에게 한학을 가르치게 되었으며 그의 스승은 당대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서예가 한일동 선생이었다. 스승 한일동은 서예 뿐 아니라 전통무술중 하나인 택견에도 조예가 깊어 몸이 약한 최홍희에게 택견의 초보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스승을 좇아 한학에 열중했고 결국 그도 선생의 뒤를 이어 이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게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
일본유학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던 그의 친구들이었다. 방학 때 집에 온 친구들은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일본에 가서 신학문을 공부하라"고 여러 차례 권유를 했고, 이에 최홍희는 일본유학 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졸업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당시 최홍희의 고향이 사상적으로 불온하다고 낙인이 찍힌 상태라 비자를 얻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런 그에게 비자를 얻게 해 준 것은 그의 서예솜씨였다. 비자를 얻기 위해서 찾아간 경찰서에서 보인 그의 글솜씨에 반한 경찰서장이 쾌히 비자를 내 준 것이다. 학교에서 쫓겨나 배운 서예가 그를 일본유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이 전환점은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기 이틀 전 밤, 최홍희는 돈내기 화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계속 돈을 잃기만 하더니 결국에는 일본에 갈 돈까지 잃고 말았다. 돈을 모두 잃고 난 최홍희는 눈앞이 캄캄했다. 어렵게 비자를 얻고 돈까지 마련했는데, 그 돈을 다 날려버렸으니 너무나도 한심하고 어이가 없었다. 잃은 돈이 있어야 일본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최홍희는 상대에게 돈을 더 구해 올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상대는 기다릴 수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자신보다 열 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고향에서도 힘세기로 소문난 허씨라는 사람인 것이다. 당황한 최홍희는 마침 책상 위에 있던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그러자 장사로 소문난 상대방은 뒤로 넘어졌고, 이마에선 잉크가 섞인 피가 흘러 나왔다. 놀란 최홍희는 허씨의 주머니에 있던 돈 중 자신의 본전을 챙겼고 일정도 하루를 당겨 도망치듯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한지 3개월이 지나고 최홍희는 우연히 고향 선배를 만나 고향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선배는 허씨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최홍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말하자면 최홍희가 고향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최홍희는 난감했다. 자신은 허씨와 맞서 싸울만한 힘도 없었고 그렇다고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노릇이었다. 최홍희는 고민 끝에 마침 일본에서 유학중인 고향선배 중 한 명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최홍희의 고민을 듣고 고향선배가 그를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가라데 도장이었다. 한마디로 최홍희는 살기 위해서 가라데를 배웠고, 이 가라데가 후일 최홍희가 태권도를 창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쟁 그리고 광복
어렵게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최홍희에게 닥친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전쟁이었다. 1941년12월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이른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초기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시간이 흐를수록 곳곳에서 패주를 하기 시작했고, 1944년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급기야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최홍희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따라서 식민지의 학생인 최홍희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최홍희가 배속된 곳은 평양에 위치한 기관총 부대. 그러나 최홍희는 비밀리에 탈주 계획을 세웠다. 자국의 일도 아니고 더구나 자신의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있는 국가가 일으킨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탈주계획은 발각이 되었고, 최홍희는 나머지 주모자들과 함께 각각 독방에 수감되었다. 감옥은 그야말로 인간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영하 25-6도 의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에 최홍희에게 주어진 것은 죄수복 하나였다. 규율이 엄하여 인간의 자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그마한 동작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오직 꿇어앉아 앞만 쳐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더구나 최홍희는 가라데 유단자라는 이유로 특별 경계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최홍희에게는 행운이 따라주었다. 1945년 6월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까지도 각오하고 있던 최홍희에게 내려진 판결은 사형이 아닌 징역 7년이었고 그로부터 2개월 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을 함으로서 한국이 독립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군인의 길을 걷다
광복 바로 다음날 출옥한 최홍희가 선택한 길은 다름 아닌 군인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최홍희는 군 사관학교 격인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며 군 생활을 시작하였고, 1949년에는 미국 조지아주 포드베닝 보병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포트베닝은 당시 미 보병부대와 낙하산 부대의 요람으로 특히 고등군사반은 모든 군 간부들이 거쳐가는 유명한 곳이었다 (미국의 역대 전략가는 물론 세계 2차 대전시 사막의 여우 라고 불리며 탱크전의 1인자라 불리었던 독일의 롬멜 장군이 다니기도 했던 곳이다). 미국 군사학교에서의 생활은 최홍희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황폐화 된 상태로 나라가 독립 된지 몇 년 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보면 최홍희는 남들보다 훨씬 앞선 정규교육을 받은 셈이다.
한국전쟁 그리고 태권도 사단

고등군사학교 졸업을 바로 1주일 앞둔 시점인 1950년 6월. 최홍희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한국전쟁. 그의 조국은 독립한지 불과 5년만에 다시 전쟁이라는 회오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부랴부랴 본국으로 돌아온 최홍희는 육군종합학교 의 교수직을 거쳐 29사단장을 맡게 되었다. 전쟁 중이던 한국군의 사단은 계속해서 창설되고 있었고, 29사단은 당시 20여 개 사단 중 가장 마지막에 창설된 신규 사단이었다. 29사단장으로 내정된 최홍희는 부대 마크용으로 자신의 주먹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당시 당수 유단자인 남태희 중위와 한차교 하사를 사범으로 임명하여 사단내 전 사병에게 당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명 태권도 부대 의 창설인 것이다. 그리고 29사단장으로 있으면서 최홍희는 당시 국가수반이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무술시범을 보이게 된 것이다.
ITF 창설과 망명
태권도 라는 말을 공식화한 후 최홍희는 태권도를 보급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자국이 아닌 전세계에 태권도를 알리고 싶어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으니 바로 베트남 대톨령인 고딘 디엠(베트남 전 당시 까지도 대통령이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음)의 한국 방문이었다.1958년 한국을 방문한 고딘 디엠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의 태권도였다. 당시 베트남은 오랜 내전으로 인해서 군인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고민을 하던 고딘 디엠은 태권도에 푹 빠져 버렸다. 체격도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한국인들이 보여준 태권도시범은 그의 머리 속에 강하게 각인 되었다. 그리고 시범의 반응은 빠르게 나타났다. 본국으로 돌아간 고딘 디엠이 한국의 태권도 시범단을 초대했던 것이다.
다음 해인 1959년 최홍희는 20여명의 태권도 시범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순회 시범을 나섰다. 필리핀을 시작으로 베트남, 대만을 거친 이 해회시범은 성공적이었으며 특히 베트남에서는

그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에 힘을 얻은 최홍희는 본격적인 해외 시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6년, 최홍희는 마침내 9개국의 협회를 모아 국제 태권도 연맹 (ITF : 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 을 발족시켰다. 1966년 3월 22일의 일이었다. 서울의 조선호텔에서 열린 이 국제기구의 발족식에는 많은 축하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절, ITF와 같은 국제 기구를 만든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최홍희는 본격적으로 외국에 태권도를 심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일본 극진 가라데로 유명한 최영의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1967년 일본에서 만난 두 사람은 태권도와 가라데의 통합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하였다.1970년 최영희는 그와 가장 절친한 남태희와 함께 태권도 보급을 하기 위해 외국 순방에 올랐다. 1972년에 30여 개국을 돌며 태권도를 보급하던 중 캐나다에 도착 아예 그곳에 정착하고 말았다. 그 때 최홍희의 나이 54세 때였다.
북한에 태권도를 심다
캐나다에 정착한 최홍희는 실질적으로 본국과는 달리 자신의 독자적인 태권도를 보급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한국에서도 WTF(World Taekwondo Federation)을 설립하여 최홍희의 ITF 와는 분리된 상황이었다. 태권도종주국 한국은 ITF 와 WTF 라는 두 조직으로 분리가 된 셈이다.
그런 그가 남한과의 관계 뿐 아니라 상당수의 제자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바로 북한 방문이었다. 그가 북한을 방문하게 된 것은 1975년 2월 받은 뜻하지 않은 편지 한 통에서부터였다.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최홍희의 형 최붕희였다. 한국전쟁중에 서로 헤어지게 되었던 그의 형은 북한에 살아있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형의 편지를 가져온 사람은 최홍희가 원한다면 형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을 최홍희에게 전달했다. 한국전쟁이후 늘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던 최홍희에게 형이 살아있다는 소식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은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결국 최홍희는 중립국인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그리웠던 형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 또 한 통의 편지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북한으로부터 통일 문제를 의논해보자는 김일 부주석의 편지였다. 최홍희는 북한에 태권도 시범을 보일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하는 편지를 썼고, 이 요청이 수락되어 1980년 시범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국은 1950년의 한국전쟁이후 남쪽은 민주주의가 북측은 공산주의 정부가 각각 들어서 있었다(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최홍희가 북한을 방문했으니 최홍희는 한 순간에 적군의 신세가 되어버렸다.
철의 장막에 태권도를 심다
그러나 최홍희의 목표는 태권도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1959년 동남아시아 시범을 계기로 그의 관심은 태권도의 세계화였다. 그리고 1978년 최홍희는 동부유럽에 태권도를 선보였다. 당시 동부유럽은 공산주의 체제라 태권도의 보급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폴란드를 시작으로 헝가리, 유고 등에서 시범을 보이며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한 최홍희는1986년 중국에 태권도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태권도는 나의 인생
최홍희.
인생의 대부분을 태권도와 함께 해 온 그도 어느덧 80을 넘긴 노인이 되어 버렸다. 그런 그의 남은 바램은 다름 아닌 조국의 통일이다. 현재 그의 조국인 한국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태권도 또한 남한이 가맹국인 WTF 와 북한이 가맹국으로 있는 ITF 로 나뉘어져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분단되어 있는 그의 조국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WTF 와 ITF 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지도 모른다.
그가 뿌리를 내린 태권도는 이제 더 이상 한국의 것이 아니다. 이미 태권도는 세계인의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태권도가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아직도 식지 않은 태권도에 대한 그의 열정. 최홍희 그는 태권도의 창시자로서 그의 모든 것을 남기려고 하고 있다.
"태권도는 성장하여 지금은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태권도 도장과 수많은 수련생 그리고 애호가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권도는 동양사상과 윤리에 근거한 순수 무도입니다. 앞으로도 태권도가 더욱 발전을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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