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태권' 명칭 1955. 12. 19 청도관 고문회에서
오늘날 태권도는 국제 스포츠로서 보편화된 개념이다. 태권도가 무도인가 스포츠인가라는 논쟁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우리는 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 올림픽대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게 한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태권도의 정체성은 속성상무도가 본(本)이라면 스포츠는 체(體)로서 사상, 철학, 문화 등 상호보완적인 동시에 그 인터페이스가 태권도동호인에게 어떠한 한계를 느껴지지 않는 무도·스포츠문화를 추구하며 자연스럽게 발전해 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직도 태권도 명칭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개명(제정)되었는가를 정확히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태권도 관련 여러 문헌에서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태권도 명칭을 창시(제안)했다는 최홍희 본인이 바른 기록을 남겨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창시자로 자처하고 있는 최홍희는 명칭제정일을 1955, 4, 11이라 하고 있어 대부분의 태권도 문헌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1956년 1월 중 이승만 대통령은 태권 승인 요청을 두 차례나 기각했으며 친필 휘호를 내린바 없다. 최초 태권 명칭은 1955. 12. 19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11명)에서 채택되었다. 그 후 태권, 태권도라는 명칭은 주로 손덕성, 최홍희 계열의 청도관, 오도관을 중심으로 사용돼 오다가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회장 최홍희)가 창립되기도 했으나 이듬 해 4. 19. 사태로 인해 대한체육회 가맹이 좌절되었다.
1961. 9. 16. 창립된 대한태수도협회는 1965. 8. 5. 대한태권도협회(회장 최홍희)로 바꾸어 태권도의 공식적인 명칭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국기태권도라는 휘호는 1971. 3. 20.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내려졌다.
태권 명칭 유래
최홍희는「태권도교서」(1973)에서 다음과 같이 태권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후 근 10년간 발만 쓰던 태껸과 주로 손의 기술에만 의존하던 가라데를 종합연구하여 오늘과 같이 체중에 구애됨이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현대적이며 과학적인 무도로 발전시킨 다음, 이 무도의 성격에 알맞고 역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이름을 짖고자 고심하다가 마침내 1955년 4월 11일 개최된 명칭제정위원회에서 본인이 제출한 태권도가 만장일치로 가결됨으로써 여태까지 구구 각각으로 불리어 오던 이름을 태권도로 단일화하게 되었다.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①
"그해 4월 11일 사계의 조예 있는 인사와 사학가 그리고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명칭 제정위원회에서 제의된 여러 가지 명칭 중 저자가 제안한 태권 두자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이 때부터 당수, 당수, 권법, 택껸 등등 구구 각각으로 불리어 오던 명칭을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통일시킨 해로 저자의 일생을 통해 가장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명칭제정위원회: 유하청(미창사장), 손덕성(청도관 관장), 최홍희 장군(3군관구사령관),이형근 장군(합참의장), 조경규(국회부의장), 정대천(국회의원), 한창환(정치신문사 사장), 장경록(정치신문 주간), 홍순호(공익통상 사장), 고광래(본사 주간), 현종명(청도관 사범). 1955년 4월 11일"②
그리고 명칭제정위원회 참가자 명단 사진과 신문기사(참가자 명단 및 회의 내용일부)로 사실을 증빙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역사적 자료로 제시한 한 장의 기념사진이다. 사진에는 4288(주;1955년에 해당). 12. 19.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라고 명기돼 있다. 그리고 신문기사(회의 참가자 명단 및 중요 회의내용)의 출처 및 연월일 등을 밝히지 않고 있고, 태껸, 택껸 등 용어를 혼용해 쓰고있다.
필자는 이 회의 내용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청도관 고문회를 명칭제정위원회로 둔갑하며 1955년 12월 19일 회의날짜를 1955년 4월 11일로 날조한 전말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1955. 12. 19 청도관 고문회에서
위 관련된 회의 내용을 저자(최홍희)의 각기 다른 두 문헌의 기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회의내용 사례 1;
최장군: "태권"(태拳)에 대한 글자의 뜻을 기술과 역사적인 견지에서 설명했다.
유하청:나는 최홍희 장군이 제안한 태권을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무도에 관한
명칭을 제정하는데는 국가원수인 이승만 박사의 승인을 얻는 것이 퍽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참석자전원: 만장일치로 찬성.③
회의내용 사례 2;
최장군: 태권도에 대한 글자의 뜻을 기술과 력사적 견지에서 설명하였다.
유사장: 최 소장이 제출한 명칭을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명칭을 개정 공포한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만치 즉석에서 결정한다기보다 이에 대한 사적 고찰과 학리적 연구가
필요하니 일단 이에 대해 유명한 사학가들에게 의뢰하여 빠른 시일 내에 최 소장이 제출한
명칭의 사적 고찰을 마치고 그 기간에 각자의 다른 명칭이 있으면 제출하여 몇 개의 명칭을
첨부해서 대통령 각하의 재가를 얻어 공포함이 좋겠습니다.
조부의장: 결의 사항으로 사적 증거와 학적자료 수집을 위해 3인 소위원회를 결성하고 금년(1955
년도를 지칭) 12월 31일까지 완료하여 각 위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통지한 다음 이 통지를
받은 위원은 일주일 안으로 그에 대한 해답과 대통령 각하의 재가를 얻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④
사적 증거와 학적 자료 수집의 한 방편으로 최홍희는 그의 『태권도교서』(1973)에 당시 "영남대학교 총장 사학박사 이선근"은 "태권도의 역사"라는 글을 썻다.
이선근의 장황한 넋두리를 빼고, 그의 글에서 "택껸과 수박의 전통을 이어받은 창헌류는 벌써 10여 년 동안 널리 해외에 소개되어 오늘에 와서는 이미 50여개 국에 천여 만의 수련생이 있는 현실이며…,"로 최홍희 본인이 말한 태껸과 가라데를 이선근은 택껸과 수박으로 왜곡, 미화하고 있으며, 최홍희는 태권을 태권도로 둔갑, 1983년 평양에서 발간된「태권도백과사전」에 회의 내용을 왜곡하고 있다.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이호성 기자가 쓴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스포츠조선, 1995)에서는 최홍희의 기록과비교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는 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최홍희) 태권도라는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한 명칭위원회를 구성했다. 제1차 명칭위원회는 1954년 12월 19일에 열렸다. 참석자는 손덕성 청도관 관장, 이형근 합참의장, 조경규 국회부의장, 한창환 정치신문사 사장 등이었다.
이 위원회는 만장 일치로 태권도(태권)라는 말을 승인했다.
그러나 조경규 국회 부의장이 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경무대의 회신을 기다리게 되었다. 목마르게 기다리던 대통령의 회신은 "태껸"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라는 것이었다.
제2차 명칭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거기서도 태권도가 채택되어, 경무대에 결과보고가 올라갔다. 내려온 대통령의 회신은 여전히 태껸이었다. 최홍희는 경무대 비서실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 회의에 참가한 손덕성, 이형근, 조경규 등 3명이 대통령의 승인을 받기 위해 대표로 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되는 바람에 이 면담은 취소되었다.
몇 달 후, 이승만 대통령은 친필로 태권도라는 휘호를 내렸다. 1955년 4월 11일, 이날이 바로 태권도의 탄생일로 태권도의 날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최홍희와 이호성, 두 저자의 책 내용 중 회의 일자와 회의 횟수를 서로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최홍희는 1955. 4. 11은 명칭제정위원회의 회의일자라고 밝히고 있는데 반해 이호성은 이 대통령 휘호를 받은 날짜라고 밝히고 있다.
엇갈리는 기록을
최홍희는 자신의 회고록『태권도와 나 1』에서 소설에서나 흥미를 느껴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편 이날 저녁 회의에서 형식적으로 결의한 3인 소위원회 구성에 관계없이 나는 다음 날부터 오도관에다 태권도의 새 이름을 쓰라고 지시하고직접 경무대 서장실에 연락하여 한자로 태권도라고 쓴 이 대통령의 휘호를 요청했다.
그런데 2, 3일 후 나의 기대와는 달리 경호 대장으로부터 "대통령 각하께서 한글로 택껸이라 쓰시겠답니다"하는 전화가 왔다.(중략)
그러나 며칠 후 경무대에서 온 연락은 역시 한글로 써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이라 나로서는 마지막 수단으로 이 대통령의 손발 노릇을 하는 경호대의 실력자 서정학과 곽영주 그리고 심지어는 경무대 부서장까지도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정에다 초청했다. 나는 이 좌석을 이용하여 이 박사가 태권도를 한자로 휘호하도록 그들을 설득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결국 그들은 속담에 먹은 소 똥눈다로 내가 원하는 태권도(跆拳道) 세 글자를 받아 내는데 성공했다. 이 휘호가 발표됨으로써 태권도는 누구의 모략도 받을 수 없이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나는 태권도를 창시하기 위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과 술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태권도가 탄생한 1955년 4월 11일 저녁 내 기쁨이란 그 어떤 말이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⑤
이제 태권, 태권도 명칭에 관련, 최홍희의 여러 문헌에서 지적할 수 있는 함정을 살펴볼 차례이다.
첫째. 최홍희는 1955. 4. 11. 이날을 명칭제정위원회 최초의 회의 날짜라고 하며 또 다른 책에서는 휘호가 내린 날짜로 상반된 말을 하고 있다.
둘째, 이호성이 말한 1954. 9. 16 제1차 명칭위원회의 연도는 1954년이 아닌 1955년이 바르다는 것은 사진의 기록이 단기4288(1955)이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1954년 9월 중순에 보병 제29사단 제1주년 창설 기념식에 이 대통령이 참석, 최홍희의 당수도시범대회를 지켜보고 저것이 택껸이라는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뒷날에 태권 두 자의 명칭을 작명하게 된 것이었다.
셋째, 1955. 4. 11 회의를 가졌다고 할 때 "금년 12월 31일까지 완료"라는 기간은 너무 길고, 이호성이 말하는 회의일자가 9. 16.이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단지 연도가 틀리다는 것 외에 회의날짜는 사진의 기록과 일치한다.
넷째. 이 대통령의 승인, 휘호를 요청했는데, 두 번씩이나 태권이 아닌 택껸을 고집하며 거절당했다고 한다.
다섯째, 이호성은 3인이 직접 경무대를 방문, 면담을 요청한 날짜가 바로 특무대장 김창룡 저격사건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호성이 말한 특무부대 대장 김창룡 저격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다. 최홍희는 그 사건에 대해어느 태권도 저서에서도언급하지 않은 것은 1956년을 은폐, 1955년으로 모든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1955. 12. 19. 회의날짜를 철저히 위장하고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 김창룡 특무대장 저격사건은 1956년 1월 30일 발생했고 그 역사적 사건은 익년 1957년 9월 22일 허태영 등 범인 4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형에 처하게 됨으로써 사건이 종결 되었다.
이승만의 태권,跆拳道 휘호는 사실무근
이 대통령에게 태권용어의 승인 및 휘호를 요청한 시기는 1956년 1월중이고 이호성이 말한 같은 시기에 가진 2차 회의마저 최홍희는 그것마저 숨기고 있다.
최홍희가 말한 1955. 4. 11이라는 날짜는 한마디로 날조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태권도문헌은 기록마다 상이한 내용이며, 회의개최 연월일, 대통령 사용 승인 및 휘호하사 등. 특히 이 대통령에게 한자로 써 달라고 요청, 跆拳道 휘호가 정말 내려졌다고 하는데, 그 귀중한 역사적인 친필을 누가 보관하고 있다는 것인가.
두 번씩이나 택껸을 쓰라며 승인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3인이 경무대 면담을 요청한 날이 바로 저격사건이 발생하였다. 국기(國基)가 흔들릴 정도의 긴박한 상황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경무대 요원들이 재삼(再三) 대통령에게 승인 요청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저격사건 이후 그 와중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 및 휘호가 내려졌다는 것은 최홍희 회고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소설 속의 스토리이다.
1956. 1. 30 김창룡 특무대장 저격사건으로 인해 이 대통령의 휘호하사는 명백한 허구이다. 정말로 이 대통령의 친필로 휘호가 내려졌다면 지금껏 이에 대한 어떠한 증빙자료는 왜 없는 걸까. 당시 가장측근 인물이었던 손덕성, 남태희(이상 재미), 현종명(사망)원로 등뿐만 아니라 그 휘호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는 태권도인은 지금껏 아무도 없다.
최홍희는 대통령의 친필을 보관 중 부주의로 분실하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분실되기전까지 행적에 대한 사료(史料)를 제시해야 한다.
그는 『태권도창시자 최홍희 회고록, 태권도와 나』두 권을 쓸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수집, 보관하고 있는데, 하필 그 귀중한 역사적인 대통령의 휘호를 분실했을까. 그 대안으로 증빙할 수 있는 어떠한 자료라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최홍희가 주장하는 태권도 명칭은 명칭제정위원회 1955. 4. 11. 제정 아니고 「1955. 12. 19 대한당수도 청도관제1회 고문회 회의에서최홍희 소장이 제안한 태권(跆拳) (태권도가 아닌 태拳 二字)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라고 사실적 기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최초의 태권, 태권도라는 명칭 채택에 있어‘청도관 고문회’를 은폐하고 ‘명칭제정위원회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 및 휘호’를 내세워 태권도사를 왜곡, 날조한 장본인이 바로 최홍희이다.
오늘날 태권도인들은 그러한 허구적인 태권도사의 전통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이 날조된 태권도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태권도에 대한 최홍희의 공과를 사실대로 겸허하게 수용해야 할 것이며 80이 넘는 고령임에도 태권도발전에 헌신하고 있는 그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태권도가 이처럼 허구적 슬픈 역사의 역경 속에서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요인은 태권도의 뿌리가 한민족 고유의 문화요 사상이며 철학의 토양에서 태동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010919)
주:
① 최홍희,『태권도교서』 정연사 p13
② 같은 책 p507
③ 같은 책 p507
④ 최홍희, 『태권도백과사전 1』 평양 p247
⑤ 최홍희, 『태권도와 나 1』 다음 p346∼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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