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연재

[무예사랑방] 호위무사(護衛武士)의 의리

이정규 사범의 무예 사랑방


이정규 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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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 한편은 지친 생활 가운데 기운을 돌려주는 좋은 활력소가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에 숨 막히는 액션이 가득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별 내용도 없이 그저 세상을 다 때려 부술 듯 싸우기만 하는 영화에 점차 식상해져선지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받아보는 한국영화를 더 선호하고 즐겨본다. 그 중 <광해>라는 영화가 기억에 남는다. 신들린 주인공의 연기며 밀도 있고 코믹하게 전개된 스토리도 좋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정작 내 가슴에 남은 것은 임금 곁을 지키던 ‘호위무사’ 캐릭터였다.

호위무사의 의리

최측근에서 임금을 지키는 무사라면 임금을 위해 목숨을 내 놓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자기가 섬겨야 할 진짜 임금이 아님을 알고도 거기다 충성을 다해 목숨을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뭔가 울컥하는 것이 올라와 목이 메었다. 요즘 흔해빠진 무협영화처럼 현란하게 날아다니는 전설적인 검술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액션도 없었건만 유독 이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임금의 대역(代役) 광대를 위해 일국의 왕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목숨을 내 놓다니.......

가만 생각해 보면 극중의 호위무사는 한낱 왕의 곁을 지키는 도구였을 뿐 누구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남들처럼 권모술수를 부려가면서 권력을 차지할 욕심도 없고, 가증스런 웃음 속에 피비린내 숨긴 정치에도 관심 없었다. 그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에 목숨을 다하는 충직한 무사(武士)의 모습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순수한 마음의 무사를 왕이라는 자조차 적들에게서 자기를 보호할 방패막이 소모품으로만 사용할 줄 알았지 그 마음을 보듬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록 가짜 임금이었지만 그 대역 광대가 임금의 자리에 있을 때 호위무사를 자기 몸같이 아껴 준 것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즉, 그 광대야 말로 무사의 존재와 가치를 알아 준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가짜 임금인걸 알았음에도 이 무사에게는 그 광대야말로 의리를 지킬 수밖에 없는 진짜 임금이었던 것이다.

옛말에도 여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단장을 하고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하지 않았던가? 이렇듯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려가며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 의리라는 단어만으로도 피가 끓는 심장을 가진 맑은 영혼의 소유자들이 바로 우리 무인(武人)들이 아닐까 싶다.

의리에 관한 고사(故事)들

의리의 중요성을 역설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숱하게 전해진다. 친구를 위해 목을 내 놓을 수 있는 관계를 이르는 문경지우(刎頸之友), 백아가 자신을 알아주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해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는 백아절현(伯牙絶絃), 두 사람이 마음을 합치면 쇠도 끊을 수 있다는 뜻으로 절친한 사이를 이르는 기이단금(基利斷金), 벗은 신의로서 사귄다는 교우이신(交友以信), 난초같이 뜻 높고 맑은 친구 사이를 이르는 지란지교(芝蘭之交)등 의리를 강조한 사자성어들은 오늘날에도 수없이 회자되고 있다.

이런 의리란 비단 친구 사이에서만 지켜야 할 관계는 아니다. 도원결의(桃園結義)로 뭉친 유비, 관우, 장비는 형제의 의리를 맺었었고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지켜야 할 의리는 삼강오륜의 틀이요, 시대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임을 배우지 않았던가.

풀을 엮어 은혜를 갚다.

손바닥만 한 풀밭이 드넓은 초원으로 보이던 어린 시절, 잡초 무성한 풀밭을 뛰어다니며 나무 작대기 하나 들고 건너 동네 아이들과 결사항전을 벌이던 때가 있었다. 하루는 우리가 공격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건너 동네 아이들이 강둑 한 편의 풀밭을 내주었다. 무주공산의고지를 점령하려 달려들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 편이 가다말고 하나씩, 둘씩 픽픽 꼬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나도 달려가다 무언가에 발목이 걸려 호되게 엎어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건너 동네 아이들이 긴 풀을 서로 잡아 묶어 놓은 장애물 덕분이었다. 무성한 잡풀 사이에 낮게 얽어 놓은 발목지뢰(?)는 쉽게 눈에 띄지도 않았고 대지를 잔뜩 움켜쥔 질긴 뿌리 덕에 웬만한 힘으로는 끊어지지도 않았다. 그 땐 몰랐지만 그것이 결초보은이란 고사성어에서 유래된 작전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춘추시대 진나라 때 ‘위과’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임종을 앞 둔 그의 아버지가 ‘내가 죽으면 아끼던 젊은 첩도 함께 묻어 순장(殉葬)시키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하신 말씀이라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그 첩을 새로운 곳으로 개가(改嫁)시켜 살게 해주었다.

그 뒤 전장에 나가 전투를 치르던 중 열세에 몰려 패색이 짙어가던 찰라, 한 늙은이가 나타나 곧 전투가 벌어질 초원에 쭈그리고 앉아 풀들을 잡아 서로 엮더란다. 그것을 모르고 달려든 적장의 말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적장을 사로잡고 전쟁에서도 이겨 큰 공을 세웠다. 그 날 밤 위과의 꿈에 나타난 늙은이는 자신이 바로 위과가 살려준 젊은 첩의 아버지인데 죽어서도 딸을 살려준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풀을 엮어 은혜를 갚았다고 했다. 이것이 결초보은(結草報恩)의 고사다. 이처럼 상대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심어주면 죽어 영혼이 되고 귀신이 되어서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근본성품이 아니겠는가.

의리의 근본

사람이란 내가 상대에게 얼마만한 정성을 다해 노력을 하였느냐에 따라 의리를 지키게 된다. 별다른 노력 없이 대충 대했다면 의리를 기대하기란 이미 물 건너 간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상대를 위해서 들인 정성과 노력의 정도가 깊고 그 마음을 감동시킨 바가 있다면 총을 쏴도, 목숨을 걷어가도 의리를 지키려 드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누비며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백성을 지켜내던 무인들에게 의리란 서로에게 목을 내어 맡길 만큼 강력하고 든든한 무기가 되곤 했다. 앞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동안 뒤를 돌아 들이치는 적은 동료에게 맡긴 채 앞만 보고 전진할 수 있었던 것도 목숨을 담보한 의리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관우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가 숱한 적장들을 베고 장비의 장팔사모(丈八蛇矛)가 적장을 줄줄이 꿰어 큰 위세를 떨쳤다지만 정작 촉나라를 세운 것은 그들의 예리한 창이 아닌 형제의 의로 맺어진 의리의 힘이 아니었겠는가?

과연 내겐 이런 문경지우가 될 만한 친구가 있는가, 그 정도가 아니라면 지란지교가 될 만한 친구는 있는가,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어려울 때 의리를 논할 만한 친구 하나 지인(知人) 하나 가까이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더 없이 큰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의리가 상하는 원인

그런데 우리는 의리를 지켰다는 말보다는 “잘해줘 봐야 소용없다.”, “의리로 대했는데 배신당했다.”, “필요할 땐 달라붙더니 배부르니 떠나더라.” 등의 말을 자주 듣곤 한다. 그래선지 의리라는 단어를 함부로 들이대기엔 척박해져만 가는 삶에 기분이 씁쓸할 때도 더러 있다.

흔히 좋았던 의리가 깨어지는 것은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작은 일에 섭섭해서 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면 상대와 소통이 안 되니 관계는 막히고 막히다 마침내 끊어지고 만다. 이 때 문제는 떠나가면서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할퀴고까지 간다는 점이다.

의리로 맺어진 사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이런 상처를 입고 나면 무척 속이 상하겠지만 이것을 냉정히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행여 내가 해 준 것은 작으면서 상대에게는 큰 것을 취하려 하진 않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그 욕심의 차이만큼 섭섭한 짓을 당한 것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가는 것이 있어야 그 만큼 얻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하면 그 욕심만큼 내가 상처를 입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의리를 지켜주고픈 사람

진짜 의리를 지킬만한 사람을 하나 얻게 되면 그것은 그 사람의 목숨을 얻는 것과도 같다.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받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리라는 큰 것을 얻을 욕심낸다면 그 큰 욕심만큼 상대를 위해서 마음도 들이고, 시간도 들이고, 정성을 다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내게 의리를 지키길 원한다면 당연히 나도 상대를 위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알든 모르든 사람들은 누구나 ‘아~, 누가 나를 알아줄꼬?’ 탄식하며 자기를 알아줄 사람을 찾고 있다. 나를 진정으로 인정해주고 받아줄 사람,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사람이 친구일수도 있고 연인 일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 하나 잘 찾으면 더 이상 외로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의리를 지키고픈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마냥 찾아 헤매기보다 거꾸로 내가 먼저 의리를 지켜주고 싶은 귀한 사람이 되어 주는 것은 어떨까? 정말 이 시대에 만나기 힘든 의리 있는 사람이 되어주자는 말이다.

이 시대의 호위무사들

의리를 지키고픈 사람이란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이라 뜻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위해서라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몸을 날려 날아오는 총탄을 대신 맞고 쓰러져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한 순간에 가버리고 나면 남은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도리어 가버린 사람 때문에 한이 맺히지 않겠는가?

사실 인생을 살다보면 멋지게 마지막을 장식하고 죽는 것보다 버티고 사는 것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니 단순히 한 순간의 희생으로 끝내기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그 곁을 오래오래 지켜주는 것이 더 큰 희생이 될 수가 있다.

요즘은 뉴스 보도마다 호위무사란 명칭이 일개 권력자들의 경호원 따위로 불려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비록 날선 검은 빗겨 차지 않았지만 그 마음만큼은 어느 호위무사 못지않은 분들이 있다.

곤하게 잠든 자식의 머리맡에 앉아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지쳐 주저앉고 싶은 몸과 마음을 추슬러 일으키는 이 시대의 부모들이 바로 그 호위무사들이다, 사랑스런 아내를 지켜주기 위해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남편들이 바로 이 시대의 호위무사들이다. 이들은 살아서 거룩한 희생을 하고 죽어서도 별다른 영예를 바라지 않는 가장 순수한 호위무사들이다.

소망

깊은 밤 굵게 내리던 빗줄기가 멎어 고요하기만 하다. 이런 때면 이런 저런 상념들이 머리를 스친다. 오늘 난 누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 어떤 이에게 의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여 지켜줄 사람하나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불타는 심장 속에 순수라는 검(劍)을 품고, 의리라는 단어에 혈관의 피가 끓는, 숭고한 희생이라는 말에 목이 메는 그런 친구 하나 갖고 싶다. 이 시대를 지켜 나가는 호위무사로, 지킴이로 삶을 관통해 무(武)를 닦아가며 자존심을 지켜가는 그런 이들을 만나고 싶다.


[글 = 이정규 사범 ㅣ Lee’s 태권도교육센터ㅣmasterjung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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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seo 2015.06.02
thank you sir ...great story.
김사범 2015.07.14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