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희와 태권도
최홍희와 태권도의 관계성은 그의 삶의 한 방편이라 하겠다.
오늘날 그 사실을 부정할 어떤 이도 이 지구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최홍희는 일제식민지시대 일본 유학 길에 올라 경도에서 가라데에 입문하여 이단까지의 기량을 숙달했다고 한다. 그에 앞서 그는 당대 서예의 명필가였던 한일동 선생에게서 서예를 익혔고 또한 고대 "태껸"을 배웠다고 한다.
"한일동 선생은 명필이었으며 또한 고대 "태껸"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든바, 체질이 허약한 저자의 건강을 위하여 서도를 가리키는 틈을 타서 "태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태권도지침 최홍희 정연사 1966:298)
서예에 대한 그의 솜씨는 높은 경지에 이르고 하나의 독창적 경지를 이룰 만큼 그의 서도(書道)의 세계와 태권도의 세계는 분명 그의 삶의 방편이라 하겠거늘 "도(道)"의 세계에서 일생을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태권도라는 고유명사로서 오늘날 보편화된 국제적 무도·스포츠로서 발전한 명칭의 창안자이고 또한 공식 명칭으로 정착화하는 데 기여한 공적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최초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4년 말경 당시 일부 관을 중심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1955년 4월 11일에 명칭제정위원회 회의에서 채택하게 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1958년에 대한태권도협회를 설립하여 당시 대한체육회에 가맹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의 자서전에서는 "그러나 이 협회는 대한체육회 가입절차를 밟고 있던 중 1960. 4. 19의거로 인해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태권도와 나1, 396쪽)라고 바르게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태권도협회의 전신은 1961년 5월 16일 군사정권의 유사단체 일원화를 위한 포고령 제6호에 의거하여 문교부로부터 사도계 대표를 소집한 자리에서 자율적인 통합을 자청하여 협회창립위원회를 구성, 1961년 9월 16일 창립된 대한태수도협회이다.
1965년 1월 대한태수도협회 제3대 회장(1965.1.15∼1966.1.29)으로 추대된 최홍희는 자식처럼 애정을 가졌던 태권도라는 명칭을 회복하고자 이사회를 소집, 제3차 회의에서 가까스로 한 표차로 태수도에서 태권도로 개명하는데 성공했다. 바로 그 역사적인 날이 1965. 8. 5이다.
태권도 명칭 탄생, 1954년 또는1955년
그의 최초 국문판 저서 「태권도지침」을 보면 석연치 않은 저자소개의 글이 있다.
당시 주 서독 대사 최덕신의 글을 인용해 보자.
"1953년은 그의 전군대 생활을 통하여 가장 잊을 수 없는 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 해에는 그가 전공한 정보일반론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29사단을 제주도에 창설하여 전군에 태권도를 본격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기간요원을 양성하였기 때문이다."
"1956년 그는 이 무도를 "태권도"라 명명했고 학생연맹을 창설하여 군대도장과 사회도장에서 분리시켰으며 1957년에는 태권도 총본부의 부회장을 지냈다."
위 내용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잠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 데, 그것은 태권도 명칭의 명명과 연도 등이다.
이와 관련 최근 태권도사단 창설기념비 복원 운동이 남제주군에서 착수했다는 언론의 보도는 감동적이다. 그 기사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태권도공원 유치를 적극 나서고 있는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개발협회(회장 강수일)는 육군 제1훈련소 교육연대 병력으로 지난 1953년 창설된 육군 29사단 창설기념비를 발굴, 역사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작년 11월에 밝히고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차원에서 창설기념비를 복원키로 결정, 이 달 초 복원사업에 착수키로 했다고 지난달 29일 밝혔다."(태권도신문 2001.9.10 제227호)
29사단 태권도 사단은 바른 표기가 아니고 실은 익크 부대" 창설이 옳은 표기이다. 사단 마크는 한반도 형상에 가운데 주먹이 그려져 있다. 익크라는 기합 소리는 태권도가 아닌 택견 수련시 기합 소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볼 때, 당시에는 태권도라는 명칭이 지구상에는 없었다고 봐야 한다.
최홍희 본인도 어느 인터뷰에서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을 기준으로 주장하고 있다. 익크 부대의 당시 <29사단가>는 풍운에 찬 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사해에서 피가 끓는 애국 투사들 모여 놓은 그 이름을 익크라 하니 대한민국 새 역사를 이룩하고자 강건한 체력을 향상시키자...."
태권도 명칭의 구상은 실은 그의 자서전에서도 명백히 밝혀 놓았듯 1954년 9월 이후부터이다. 당시 29사단 1주년과 제1군단 창설 4주년 합동 기념일에 당수시범대회를 가졌다. 이에 대단히 흥미를 가진 이승만 대통령이 한 말 즉 "저것이 우리 나라에 옛날부터 있던 택껸이야"에서 태권도 명칭의 산고는 시작된 것이다.(태권도와 나 1, 최홍희 334쪽)
그 날을 계기로 이 대통령의 택껸이라는 말 한마디에 힘입어 "나는 먼저 이곳에다 국제 태권도 연맹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오도관을 창설해 앞날 전군에 보급할 수 있는 사범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아직도 당수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 사이에 동작도 많이 개선됐고 남태희 사범의 도움을 얻어 화랑 및 충무형을 완성함으로써 점차 태권도의 토대를 구축해 나아갔다."(338∼339쪽)
우리는 최홍희의 「태권도교본」(성화문화사 1967)에서 제1장 태권도의 기원과 제2장개명의 의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태권도의 기원을 신라시대에 뿌리를 내린 태껸에 두고 있다. 그리고 1945. 8.15 광복 후 당수 공수 화수 그리고 권법 등 각종 명칭으로 불리어 오던 사도(斯道) 명칭에 대한 개명을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태껸이라는 어음을 연결시킬 수 있었고, 손보다 발을 더 많이 쓰는 이 무도의 성격자체를 나타내는데 적합한 글자이기 때문이다."라 설명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태껸과 가라데의 장점을 절충하여 오늘날의 태권도로 체계화 할 수 있는 기점을 이룩하여 일생의 사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태권도지침 298쪽)
최홍희의 공과(功過)
그가 태권도에 헌신한 공적과 현재 83세의 고령임에도 총재로서 태권도행정과 기술발전에 진력하고 있는 열정을 높이 기려 마땅하며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의 독특한 기술체계의 확립이며 국문, 영문판본의 다양한 태권도교본 저술이며 특히 15권의 「태권도 백과사전」은 불후의 역작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회고록「태권도와 나 1, 2」권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본인의 표현대로 그 자체가 한편의 대하드라마이다.
1966년 3월 22일 서울에서 창립된 국제태권도연맹(ITF)의 초대 총재로서 출발, 1970년대 캐나다로 옮겨(본인은 망명이라고 함) 지금도 총재직을 고수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최중화는 연맹 사무총장으로 있어 족벌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비난이라 모양새가 좋지 않다.
그는 1980년대부터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했고 태권도를 통한 남북통일을 염원하고 있다며 "남북이 통일된 나라가 내 조국"이라고 한다. 태권도 양대 산맥에 대해 그의 변은 "불행하게도 오늘 세계는 태권도가 두 개의 조직으로 갈려져 있다고 하며 하나는 내가 창시한 국제태권도연맹이요, 다른 하나는 세계태권도연맹(WTF)이다.
태권도는 언제고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배달민족의 얼과 슬기가 담긴, 동양철학이 바탕이 된 우리 순수 무도 본연의 기술과 이념을 후세에 바로 전하기 위해서라도 두 개의 태권도 존립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라는 지론이다. 그가 주장하듯 태권도단체의 통합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실의 현상으로 봐서 통합이라는 주제는 하나의 화두(話頭)이며 선문답의 가상 세계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태권도가 채택되었을 때 내겐 기쁨보다는 마치 불구자식을 세상에 내 보내는 듯 가슴아픈 순간이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그는 자기만의 태권도기술체계를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그의 철학이라면 태권도의 통합은 요원한 것임을 알면서도 통합을 부르짖고 있는 그의 철학은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이다.
1960년대 중반 태권도분규와 1980년대 두 단체간의 통합시도 등 태권도가 걸어온 그 파란만장의 길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최홍희는 왜 아직도 불가능한 하나의 태권도를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일까.
1988년 4월 1일 총재 최홍희는 국제올림픽위원장 앞으로 장문의 호소문을 보내다.이 호소문의 주된 내용은 세계태권도연맹의 태권도를 가짜 태권도라고 비난하고 세계태권도연맹이 태권도의 탈을 쓰고 왜 뒤늦게 나타나게 됐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태권도연맹은 태권도 이름 아래 가라데 기술을 가르치고 있으며 경기규정도 가라데와 비슷하다고 매도, 태권도단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순적인 변(辨)은 "나는 태권도를 내가 만들었다고 하여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 때문에 국제태권도연맹과는 달리 일정하고 표준된 기술이나 체계가 없이 각 도장마다 제멋대로 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등.
그리고"이 정통 태권도를 국제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게 하는데 협력해 주기를 나는 이 무도의 창시자로서 또한 국제태권도연맹의 총재로서 촉구하는 바입니다."라는 요지이다.(태권도와 나2 399∼400쪽)
최홍희와 태권도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의 삶의 한 방편인 무도철학을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것만이 태권도라고 주장하고 다른 기술체계는 가짜 태권도라고 매도하고 비난하는 등 반성하지 않는 한, 그의 삶인 태권도의 철학과 정신은 추앙받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태권도연맹이 국제스포츠기구인 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GAISF)의 공식 단체이며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의 대표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것인가.
최홍희와 태권도는 체용의 관계이다.
태권도 기술개발과 저술, 보급 등 그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은 과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상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억지와 세습체제를 서두르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양식 있는 태권도인의 바람이라 하겠다.
비단 최홍희 뿐만이 아니라 세계태권도연맹을 장기 집권하고 있는 총재 김운용도 결코 예외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유구한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 장기 집권 후의 종말이 어떻게 전개된다는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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