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상무예 1장 -삼국시대 기마민족과 마상 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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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 한다. 원래 이 말은 중국 역사상 끊임없이 북방 변경을 괴롭혀 온 흉노족을 경계한 데서 유래됐다. 흉노족은 초원에서 목축과 수렵으로 살아가던 부족이다. 이들에게 겨울은 추위와 궁핍의 계절이므로 말이 살찌고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만 되면 농경민족인 한족들이 사는 변방을 약탈하여 먹을 것을 쌓아놓아야만 했다. 萬里長城(만리장성)도 따지고보면 흉노족의 끊임없는 침입을 막으려, 주나라때부터 변경에 쌓았던 성벽들을 증축한 것이다. 필자가 만리장성에 갔을 때 산등성이를 굽이 굽이 수천미터 가로질러 놓여있는 산성을 보고 이 산성이 기마 민족인 흉노족으로부터 보호를 하기위해서 3대가 죽을 때까지 성만 쌓았다는 소리와 그 가파른 산에 그런 높은 성을 그 광활한 평지를 향해서 쌓았나 하는 생각을 하니 그 기마민족이 얼마나 두려움의 대상이였나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고사성어를 보듯이 오래 전 기마민족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였다. 전세계 2/3의 영토를 점령하고 몽고를 통일시켰던 징키스칸의 힘은 아마도 기마민족의 특유의 신속성과 기동성이 있는 전투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본다.
그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아주 흥미로운 우리 민족의 기마민족으로서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8백 년 전 몽골의 기마민족 칭기즈칸의 군대는 중원을 제패하고 중앙아시아 를 거쳐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물밀듯이 점령해 나갔다. 이때에 가장 오랜 기간 몽골의 침략에 저항했던 민족이 고려였다. 북경에서 수천㎞가 떨어진 遠征(원정)에서도 웬만한 국가는 몇 달이면 점령했던 몽골이 인접국인 고려를 굴복시키는 데 40여 년이 걸렸다.
이후 몽골은 러시아를 3백년간이나 식민지로 지배하였으나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한 기간은 불과 1백여 년에 그쳤다.
그 후 기마민족 정신의 쇠퇴가 韓(한)민족의 왜소를 가져온다. 世宗(세종) 의 북방정벌과 대마도 정벌로 정신을 이어오던 조선이 世祖(세조)와 韓明澮 (한명회)의 金宗西(김종서) 암살 이후 文弱(문약)의 시대를 여는 것이다.
무인을 천시하고 문인을 중시하는 사상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사회의 주류로 형성되어있다. 하지만 우리민족은 많은 삼국시대 유물과 자료들이 말해주듯이 아주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기마민족 이였다는 증거들이 학계를 통해서 알려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기마 민족이 무력으로 일본을 정복한 학설이 나오고 있어 흥미를 더해준다. 일본을 무력으로 정복한 기마민족의 출자는 어디일까? 대한 해협을 건너 일본을 정복한 그 기마민족의 발 자취를 따라서 심국시대의 기마민족의 역사와 그들이 행했던 마상무예를 파헤쳐보자.
1.일본을 정복한 기마족의 出自는?
아직도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4 세기의 일본열도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 까? 4세기에 벌어진 엄청난 변화의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국수주의적 황국사 관에 사로잡힌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 본학자들은 4세기 급변의 동력을 일본 내 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이는 고분의 형태나 고분에서 나온 각종 출토물의 고향 이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 분명한 북방 기마민족風이란 점에서 타당 한 설명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4세기 신라와 가야에서 확인되고 있는 급격한 변화, 즉 기마족의 정복 흔적 이 왜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3국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된 힘이 존재하 고 있음을 증거한다. 나는 그 힘의 원천을 선비족 모용씨 기마군단으로 본다. 일본을 정복한 기마족의 出自(출자), 즉 기 원과 관련해 에가미씨는 한반도 남부지역 에 자리잡고 있던 三韓의 연맹장 辰王(진 왕)으로 보았다. 즉 퉁구스 계통의 기마민 족 지도자인 진왕의 지배를 받던 한 무리 의 기마족이 현해탄을 건너 북규슈 지방에 상륙해 토착민들을 정복하고서는 韓倭 (한·왜) 연합왕국을 세웠다는 가설이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한다면 기마 민족의 일본정복설은 분명 설득력이 있지 만 일본을 정복한 세력으로 삼한의 辰王 (진왕), 즉 마한 목지국의 왕을 상정한 것 은 문제가 있다. 에가미씨는 목지국을 일본 에 가까운 가야지방에 있던 나라로 상정했 지만 목지국은 마한의 맹주국으로서 충청 지역에 批正(비정)되고 있다.
또 진수의 三國志에 의하면 마한은 「소나 말을 타는 법을 알지 못한다(不知乘牛馬)」 고 기록돼 있다. 3세기 후반까지 말도 탈 줄 모른다고 관찰됐던 충청도 목지국의 진 왕이 4세기경 기마족으로 돌변해 일본열도 를 정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에가미씨 가설의 최대 약점은 열도를 정복한 기마족의 出自를 제대로 파 악하지 못한 데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4세기 후반부터 일본열도를 정복 해 가는 기마족은 어디서 나왔는가? 부여 를 상정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부여족이 한 반도를 관통해 왜국으로 진출할 정도의 대 형사건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제대로 내놓 지 못하고 있다. 백제가 왜국을 정복했을 것이란 주장도 많지만 백제는 4~5세기 일 본을 정복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북방 고구려와 國運(국운)을 건 대회전을 벌이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397년 백제 아신왕이 왜국과 우호하고 태자 月典支(전지)를 볼모 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으니 백제가 왜를 군사적으로 정복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또한 일본열도에서 출토되고 있 는 기마민족風 4~5세기 유물들의 원류를 백제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백제가 4세 기 후반부터 왜와 활발한 인적·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하면서 대륙의 선진문물을 전수해 주는 등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흔적이 일본 땅에 다수 남아 있는 것은 사 실이다.
일본 열도를 「무력으로 정복」한 사람들 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현재의 김해, 부산 등지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 상 식이라고 할 때 4세기 후반~5세기 초에 걸 쳐 왜국의 새 주인이 되는 기마족은 신라 와 가야 땅으로 진출한 선비족 모용씨로 봐야 한다. 가야의 해안 지방까지 휩쓴 모 용씨 기마군단 가운데 한 무리가 물길(海路)에 밝았던 토착 뱃사람들을 동원해 군 함을 만들게 하고는 배에다 말을 태우고 해협을 건너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한국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여류 동양학 자 존 카터 코벨 박사는 한반도에 살던 기 마족이 최소 2백 마리의 말을 배에다 싣고 가서는 일본 땅을 정복했을 것으로 추정했 다. 그는, 北규슈 후쿠오카현에 있는 다케 하라 고분의 벽화는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규슈로 상륙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풀이했 다.
모용 선비의 일본 정복을 입증할 결정적 단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발견되고 있는 기마민족풍 유물들이 신 라·가야, 나아가 선비족의 그것과 유사하 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사실 일본에서 나온 冠(관)과 갑옷, 투구, 칼, 안장·등자 를 비롯한 각종 마구류 등이 가야지역에서 발견된 것들과 극히 닮았다는 것은 상식화 돼 있다.
한 예로 1992년 일본 奈良縣(나라현) 현립 박물관에서는 新澤千塚(신택천총) 등 나라 현 주변의 고대 고분에서 나온 출토물의 뿌리를 찾는 도록을 발간했다. 도록을 펴낸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신택천 총 126호분에서 나온 관장식과 각종 보물, 유리그릇 등이 경주 대릉원의 신라 고분과 양산 金鳥塚(금조총)의 가야 고분, 나아가 중국 요녕성 일대의 고분에서 나온 출토물 들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이들을 그 원류로 보고 있다. 일본의 고고학자들도 고대 고분 에서 나온 출토물의 원래 고향이 중국 동 북방의 대초원지대, 구체적으로는 선비족의 땅이었을 가능성을 이미 제기한 것이다. 하 지만 그들은 선비의 유물이 어떻게 일본으로까지 이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답변을 내 놓지 못했다. 필자는 342년 前燕(전연)의 임금 모용황의 명을 받고 고구려를 침공했 다 낙오한 모용 선비 별동대 1만5천명 가 운데 일부가 신라로 들어갔고 그들 사이에 또다시 분열이 일어나 가야와 왜국으로까 지 진출했다는 가설을 내세운다.
계속
자료출처: 조선일보(기마민족 일본 출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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