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사랑방] 인종차별, 나만의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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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 사범의 무예 사랑방 6

이정규 사범
우리 도장이 있는 마을은 남북전쟁 당시 최고 격전지 중 하나였다. 단 이틀간의 전투로 3만 7천명이 죽어나간 곳이다. 아주 옛날에는 소위 잘나가던 도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우거진 숲 사이로 목장들만 즐비할 뿐 이렇다 할 것 없는 시골 마을이 되 버렸다.세월의 흐름에서 빗겨 나간 마을이라 그런지 변화에 무딘 고인 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특이한 것이 미국에서도 보기 드문 백인 중심의 마을로 남았다는 점이다. 물론 흑인들도 있지만 다른 도시들에 비해 현저하게 적다. 미국서 흔히 볼 수 있는 멕시코나 과테말라 출신의 남미(南美) 노동자들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마을에 처음으로 ‘Tae Kwon Do’란 간판을 달고 도장을 열었다. 어떤 할머니는 양말을 파냐고 묻기도 했고 어떤 이는 메뉴 좀 보자고 들어오기도 했다. 이런 마을에서 영어도 짧고 발음도 어색한 동양 사람이라면 가난한 나라에서 돈이나 벌러 온 사람 취급을 당한다. 그러니 웬만한 무시는 감수하고 살아가야 한다. 가게에 가도 점원과 손님들끼리 농담도 하고 인사도 잘 건넨다가 내 차례가 되면 입을 다물고 물건만 싸 주거나 힐긋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축제 때마다 거리에 나가 시범을 했다. 학교에 가서 봉사활동으로 전교생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렇게 십 년을 지내고 보니 학교에 갈 일이 생기면 복도에서 꼬마 아이들이 쪽~ 줄을 서서 손을 흔들고 아는 체를 한다.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다 싶은 녀석들은 달려와 한 번씩 안기고 간다.
건축자재상에 가면아저씨들이 먼저 말을 걸며 반가워한다. “또 블록 깨려고 하느냐? 한 번에 몇 장이나 깰 수 있냐?” 어떤 때는 다짜고짜 “내가 돈 낼 테니까 여기서 한번 보여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웃으며 젊잖게 대답한다. “제가 광대로 보이십니까?” 대번에 움찔한다. 돈 낸다고 아무 때나 재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주목을 받다보니 이 마을에선 행동이 자연히 조심스러워 지게 되었다.
마을에 중국식당이 있는데 가끔씩 수련생들을 몰고 가 함께 식사를 한다. 물론 테이블에선 나를 중심으로 대화가 오가고 웃고 떠든다. 어떤 때는 다른 테이블의 손님이 대신 계산을 하고 가기도 한다. 아마 가족 중에 누군가 나에게 태권도를 배운 사람이었으리라. 그러니 이 중국 분들이 나를 보는 눈이 의아할 수밖에. ‘같은 동양인인데다가 영어도 벅벅거리는데 왜 이 놈만 이리 대접을 받나?’
도장에서는 수업시간에 한국말로 구령이 붙여진다. 차렷, 국기에 대하여 경례, 하나 둘 셋 넷, 준비, 시작, 그만, 감사합니다 등등. (꼬마 아이들은 아예 발음이 한국 사람과 똑같다!) 그러니 수업시간엔 사범이 최고다. 영어 못한다고 무시당하는 일도 없다. 그런데 어떤 영어단어는 아무리 반복해서 발음을 해줘도 못 알아먹는다. 그러면 “학창시절 영어 선생님이 일본 유학파라서 그래!”하며 영어 못하는 책임을 일본에 슬쩍 떠넘기기도 한다.
스미스 아저씨네 추수감사절 식사에 초대 받아 간적이 있었다. 동네 이웃들도 초청한 자리였다. 큰 식탁에 둘러 앉아 칠면조 요리를 잘 먹고 나서 차를 마시는데 내 옆의 아주머니가 돌발적인 발언을 했다. 발언의 요지는 대충 이랬다.
자기는 컬러드 피플(colored people, 유색인종: 이 표현자체가 이미 심각한 인종차별이다.)들이 너무 싫다. 흑인들은 못 배우고 무식한 것들이 목소리만 크다. 동양 것들은 돈만 안다. 게다가 애들은 혹독하게 공부시켜 우리 애들을 다 잡아먹고 있다.
딸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가봤더니 유색인종들이 많더라. 교장한테 가서 왜 우리 딸이 이렇게 많은 유색인종 사이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가? 유색인종들을 받지 말라고 따졌다. 교장이 그럴 순 없다고 하자 아예 딸을 유색인종이 거의 없는 이 마을 학교로 전학을 시켜버렸다고 했다.
듣는 이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물론 나 때문이다. 나를 초정한 스미스 아저씨 내외는 아예 창백해졌다. 자꾸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그 주제만 물고 늘어졌다. 식사 전에 인사를 잠깐 했었지만 내가 여름 한 철 잘 놀고 까맣게 타버린 백인으로 보였었나? 이처럼 백인들끼리만 모인자리에 유색인종이 끼어 있으리라곤 생각 못한 듯 보였다. 나중에 헤어질 때도 웃으며 악수까지 하고 헤어졌다.
스미스 아저씨 내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평소에도 말에 실수가 있는 아줌마니 부디 이해해 달라며 사과를 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당황하지도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항상 느끼던 장벽 너머 백인들의 솔직한 심정을 듣게 되어서 좋은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열 받아 경찰에 신고를 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혐오범죄(Hate crime)로 구분되기 때문에 혹독한 법의 심판을 받게 될 일이지만 말이다.
난 돈을 잘 못 버는(?) 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 물론 부지런하지도 못하고 실력도 형편없어서겠지만, 굳이 또 다른 핑계를 들자면 돈만 밝히는 동양인으로 비치기 싫어서이기도 하다. 난 태권도를 통해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전하러 왔지 돈만 벌려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내가 도움을 주러 온 거지 도움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이 평소 내 주장이다. 그러다 보니 돈과 연관 되는 일이 생기면 내가 손해 보더라도 대충 넘어가고 만다. 물론 이건 바른 일도 아니고 속도 쓰리지만 그래도 행여나 돈! 돈! 돈! 하는 모습으로 비쳐질까봐 그렇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모금행사를 한다고 쿠키며 초콜릿, 달디 단 팝콘 등을 팔러 다닌다. 어디 먼저 가겠는가? 가장 No 소리 못하고 사줄만한 사람에게 온다. 바로 나다. 이거 다 팔아 줄려면 지갑에 구멍이 난다. 사무실에 물건이 쌓이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남아 할 수 없이 이것들로 끼니를 때우기도 한다. 어쨌든 나를 좋아해주는 수련생들 덕분에 인종차별은 못 느끼고 살게 되었다.
군대 가면 효자 아닌 자식이 없고, 외국 나가면 애국자 아닌 국민이 없다. 내가 그랬다. 한국에 대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수업시간에 앉혀 놓고 보게 한다. 김연아의 동계올림픽 경기도 수업시간에 다 앉혀 놓고 보여줬다. 골프는 칠 줄도 모르면서 세리 박! 미쉘 위! 경주 최! 등을 외쳤다. 좋은 한국영화가 나오면 옹기종기 모여 감상하기도 한다. 요즘은 싸이 덕분에 또 고개 들고 산다. 기회 있을 때마다 금속활자, 첨성대, 석굴암, 한글, 신기전, 거북선 등을 들이대며 한국 문화의 우수성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한국에 대한 것은 무조건 좋은 것만 보여준다. 편파보도이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
한국은 해마다 유행과 첨단기술이 바뀌는 나라다. 그러니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보고 온 새로운 선진문물을 마구 떠들어 댄다. 미국은 땅이 워낙에 넓어 유행이란 것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더구나 세월의 흐름에 뒤쳐진 시골마을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 ‘우~아!’하고 놀란다. 나라는 작아도 국민이 작지는 않다! 인구는 적어도 인재는 많다! 그러니 한국을 만만히 보지 마라! 그게 내 주장의 요지다.
수련생들의 애경사를 챙기다 보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갈 때도 있다. 가보면 역시 동양인은 딱 나 하나다. 신랑 신부가 정중하게 허리 숙여 절을 하면 반갑게 손을 잡아 주고 장례식장에서는 상을 당한 가족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위로해 준다. 그 때 나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내가 이런 자리에서 남들 눈에 더욱 띠는 것은 바로 한복을 입고 다녀서이다. 난 수련생들과 관계된 자리에 갈 땐 꼭 한복이나 개량한복을 입고 다닌다. 시합장이나 심사장에 갈 때도 그렇다. 되도록 한국인으로서의 내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려고 노력 한다. 이런 복장은 우리 수련생들이 더 좋아하기도 한다. 우리 사범님은 좀 특별해 보이지 않는가?
난 국가대표다. 대부분의 내 도복에는 태극마크가 달려 있다. 아무도 나를 국가대표로 임명하진 않았지만, 외국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사니 나 홀로 국가대표다. 이곳에서 난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사절이다. 내 모습이 곧 한국의 위상으로 직결된다. 내가 못난 짓을 하면 한국도 못났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 내가 잘 하면 한국도 잘나 보일 것이다.
태권도를 배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현대, 기아차를 타고 삼성, LG 휴대폰을 들고 다니며 K-pop을 듣고 한국 영화를 보는 수련생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인들과 한국 문화는 우수하며 한국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대신 강변하고 다닌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요즘 들어 한국이 모든 방면에서 미국이 따라가기 힘든 눈부신 도약을 하고 있다. 물론 조국의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살아가는 분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 분들과 자랑스러운 내 조국 대한민국이 있기에 난 오늘도 미국 시골 땅에서 어깨에 힘주고 살아간다.
[글 = 이정규 사범 ㅣ Lee’s 태권도교육센터ㅣmasterjung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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