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화랑세기와 미실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26
티벳에는 곰파(사원)가 참 많다. 그런데 개방하지 않는 곰파가 딱 한 군데 있었다. 여행자들 사이에 떠도는 말로는 그 곰파에는 아주 큰 천으로 부처님을 가려 놓았는데, 그 이유는 성교하는 부처님상(像)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그러나 필자는 그것이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현교(顯敎)와 밀교(密敎,탄트라)로 나누어져 있고, 현교는 가섭존자에게로, 밀교는 부처님의 친아들인 라훌라에게 전승되었다. 그리고 밀교가 특히 발전된 곳이 바로 티벳 불교이다. 밀교(密敎) 즉 탄트라는 성교를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갈래인 것이다.
또 인도의 힌두교는 어떤가? 시바신과 그 파트너 파르파티와의 교신상(交神像)이 도처에 널려 있으며, 카주라호에 있는 힌두사원 하나는 사원 전체가 성교하는 미투나(mithuna) 상(像)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체위들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성경책은 또 어떤가? 딸들이 아버지와 성교하는 장면도 있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성교하는 장면도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神) 제우스는 또 어떤가?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바람둥이 신(神)이다!
중국의 도교 역시 불교와 마찬가지로 청정파와 제접파로 나뉘어진다. 중국에는 또 《소녀경》이라는 경전(經典)이 있고, 인도에도 《까마수트라》라는 경전이 있다. 이 두 경전의 공통점은 모두 성(性)을 주제로 한 경전(經典)이라는 점이다. 경전이란 ‘진리를 수록한 글’을 말하는데, 이 두 책이 그런 숭고한 타이틀을 얻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1. 성(性)을 통해 깨달음을 얻거나
2. 제왕(帝王)의 건강 또는 왕실의 대(代)를 무사히 잇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실은 바로 《소녀경》이나 《까마수트라》의 역할을 맡은, 막강한 파워를 가진 성(性)의 여교사(女敎師)였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상식에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들이 모든 종교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종교의 본질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극단에는 무엇이 있나? 생명의 창조가 있다.
극과 극은 하나로 통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현교(顯敎)와 밀교(密敎)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며, 죽음과 Sex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신라에는 제왕(帝王)의 혼인 대상을 배출하는 가문으로 진골정통(眞骨正統)과 대원신통(大元神統)이 있었으며, 모계(母系)로서 대를 잇는다. 미실은 바로 대원신통의 대(代)를 이었다.
대원신통의 미실 외조모 옥진은 법흥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궁주였으며, 미실의 이모 사도 또한 진흥왕의 총애를 받은 왕후였다.
미실이 태어났을 때 용모는 절묘했으며, 풍만하면서도 명랑한 아름다움은 마치 백화(百花)의 영검한 정기(精氣)를 하나로 뭉친 것 같았다고 하였다.
법흥왕의 총애를 받은 옥진은 이러한 외손녀를 보며 “이 아이는 가히 나의 도(道)를 부흥시킬만하다.”고 만족하며, 손수 옆에 끼고 교태부리는 방법[媚道]과 가무(歌舞)를 정성스레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미실이 처음에는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의 명령으로 세종전군(世宗殿君)에게 시집보내졌다. 세종전군은 지소태후의 아들이며, 진흥왕의 이부동모(異父同母) 동생이다. 이에 외조모 옥진이 근심하며 탄식하기를,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제(帝)를 섬기게 하고자 함이지, 어찌 전군(殿君)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
그러자 미실이 외조모를 위로하였다.
“소녀의 도(道)는 색공(色供)에 있는데, 어찌 제(帝)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
그러자 외조모 옥진이 크게 기뻐하며 안심하였다.
“이 아이는 족히 도(道)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
그 후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3조(三朝)를 색공(色供)으로 모셨다.
미실의 아버지 미진부공은 2세 풍월주였고, 미실의 연인 사다함은 5세 풍월주였으며, 미실의 남편 세종전군은 6세 풍월주였고, 미실의 측근이자 내연인 설원랑은 7세 풍월주였다. 또 미실의 남동생 미생은 10세 풍월주였고, 미실의 아들 하종은 11세 풍월주였다.
게다가 미실 자신은 진흥왕의 총애로 권력을 쥐게 되자, 남편 세종전군을 6세 풍월주에서 폐하고, 스스로 원화가 되었다. 이로서 원화가 폐지된 지 29년 만에 다시 부활된 것이다.
원화가 된 미실은 신라의 권력 순위 2인자가 되어, 남편 세종전군을 상선(上仙)으로, 문노를 아선(亞仙)으로 삼아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을 앉히기도 하였다.
진지왕은 본래 미실 덕분에 왕위에 올랐는데, 미실이 속한 대원신통과 경쟁 구도에 있는 진골정통의 여인을 총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골정통에서 태자를 생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색을 밝히고 방탕하다는 이유를 붙여 마침내 폐위시킨 것이었다.
진평왕이 즉위하였을 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고 한다. 진평왕의 할머니 사도태후는 미실로 하여금 제(帝)를 ‘도(導)’ 하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미실로 하여금 진평왕의 성교육을 시키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실은 진평왕의 사랑을 받았다.
도(導)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이끌 도(導), 인도할 도(導), 열어줄 도(導), 다스릴 도(導), 통할 도(導) 등의 뜻이 있다.
조선시대가 규범과 제도 속에 갇혀서 죽은 듯이 산 시대라면(특히 여성들이), 신라는 반대로 생(生)의 약동하는 창조적 생명력이 살아 숨 쉬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명의 약동, 생동하는 기운, 자유로운 생명의 원초적 행위들은 살아 움직여서 신라의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으며, 마침내 화랑도가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미실 가문의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미실의 남동생 미생은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미생이 한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자가 없었으며, 유화(柳花)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여자가 천백을 헤아렸다고 한다.
미실이 진흥왕의 총애를 받자 미생도 궁에 들어가 공주들에게 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공주들이 모두 미생과 사사로운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에 진흥왕이 미생을 문초하려 한즉, 미실궁주 왈 “이는 우리 집안의 풍류나비입니다. 어찌 모름지기 문초를 하겠습니까?”
이에 진흥왕은 미생을 문초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을 못 꺼냈다고 한다.
미실 남매의 어머니인 묘도 또한 만만찮은 여장부였다. 하루는 종이 옥배(玉盃)를 훔쳤는데, 미생이 처벌하려 하자, 담장을 넘어 도망하다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이에 어머니 묘도부인이 아들 미생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노비는 수족과 같고, 그릇은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물건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외척은 본래 사람들이 꺼리는 바인데, 너는 어미와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은 덕분에 천하의 재물을 가졌다. 그런데도 사대부에게 겸손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이에 미생은 친히 종을 풀어주고, 이후로는 도둑질하는 자가 있어도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한다.
문노(文弩)가 8세 풍월주가 되는 날, 예복을 갖추어 입고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 6세 풍월주 세종전군(미실의 남편)에게 절하고, 그 다음에 7세 풍월주 설원랑에게 절하였다.
또 신라의 신궁(神宮)에는 법흥왕과 옥진의 교신상(交神像)이 있었는데, 참배를 할 때 옥진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 법흥왕에게 절하였다.
법흥왕도 살아생전에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억조창생이 나를 신(神)으로 여기는데, 나는 옥진을 신(神)으로 여기노라.”
옥진의 남편 영실공 또한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하고 나서, 그 다음 법흥왕에게 절하였다.
이는 대원신통(大元神統)의 대를 이은 옥진이나 미실이 단순한 제왕(帝王)의 성(性) 노리개가 아니라, 성의 교사(敎師)였으며, 사상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미실의 남편 세종공(世宗公)은 태후의 아들이자 진흥왕의 이부동모(異父同母) 동생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미실을 지극히 받들고 섬기면서도 오히려 모자람이 있을까 늘 두려워하였다. 미실이 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간하였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으므로, 미실 또한 감동하여 그를 중히 여겼다고 한다.
설원랑은 미실에게 감사로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신(臣)의 머리카락 하나와 살갗 하나도 총주(寵主,미실)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설원랑은 실제 처음부터 끝까지 미실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미실이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자, 설원랑은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며 미실의 병을 대신하기를 기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설원랑은 미실의 병을 대신하여 죽었으니, 나이 58세였다.
미실이 슬퍼하여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지내며 “나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 하였다.
신라의 화랑이었으며 7세 풍월주를 역임한 설원랑은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증조부이다. 이런 인연으로 원효대사가 풍월도를 수련하게 된 것이며, 이것을 춘원 이광수가 《종풍당 수련기》란 제목으로 소설화 한 바 있다.
불교에 현교와 밀교(탄트라)가 있듯이, 미실의 가문은 대원신통(大元神通)으로서 좌도(左道)에 속하며, 성(性)으로서 제왕(帝王)이 건강하게 대(代)를 잇도록 돕는 것이 도(道)요, 임무요, 역할이었다.
그러나 정통(正統) 도맥(道脈)은 우도(右道)인 백두산(白頭山) 청정파(淸淨派)이니, 중악석굴에 나타나 화랑 김유신에게 무술을 가르쳐 준 도인이나, 이순신 장군에게 거북선을 만들도록 가르쳐 준 도인, 그리고 청산선사의 스승이신 청운도인과 무운도인 들이 바로 정통 청정파 도인(道人)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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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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