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화랑정신, 그 노블레스 오블리즈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21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 oblige)란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짊어져야 하는 정신적 의무를 뜻하는데, 바로 화랑정신이 노블레스 오블리즈다. 태종 무열왕 7년(660년) 신라는 백제를 침공하여 황산벌판에서 백제의 명장 계백(階伯)장군을 맞아 큰 싸움을 벌였다.
황산벌 전투는 양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크나큰 싸움으로서, 양편 군사가 서로 대치하여 용호상박(龍虎相搏)의 힘겨루기를 하였다.
신라가 먼저 백제를 공격한 것이었으나, 식구들을 모두 죽이고 나온 계백장군의 용맹한 정신은 그대로 전투에 투영 되어, 신라군이 오히려 열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백제에 대패할 것이 분명하였다.
이때 김유신 장군의 동생 김흠순 장군이 아들 반굴(盤屈, ?~660)에게 낭장결의(郎粧決意)해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지금이 바로 충효를 이룰 기회다!”
“예!”
반굴은 아버지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말에 뛰어올라 적진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적진에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를 본 품일(品日) 장군 또한 자신의 아들 관창(官昌, 644~660)에게 똑같이 낭장결의를 요구했다.
“네 나이 비록 어리지만, 뜻과 기개가 충천하다. 어찌 용맹을 내지 않을쏘냐?”
“옛!”
관창 역시 즉시 말에 뛰어올라 창을 비껴들고 적진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저 편은 많고 이편은 혼자인지라, 결국 백제군에게 생포되어 계백장군 앞에 끌려갔다.
백제의 명장 계백(階伯) 장군은 사로잡은 관창의 갑옷을 벗기고 보니 그의 나이 불과 16세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했다.
“신라는 참으로 대단하다! 어린 소년이 이럴진대, 하물며 장수들이야 어떠하겠는가!”
계백장군은 관창의 나이 너무 어리고 그 용맹함 또한 퍽 사랑스러운지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살려 보내 주었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온 관창은 손으로 우물의 물을 움켜 마신 후, 재차 말에 뛰어올라 적진으로 다시 돌진하였다.
“내가 적진에 들어가 그 장수를 죽이지 못하고, 기(氣)를 꺾지 못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수치다. 내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
관창은 ‘임전무퇴(臨戰無退)’ 화랑정신을 발휘하여 맹렬하게 싸웠으나, 백제 군사들에게 또다시 붙잡혔다.
계백장군은 어쩔 수 없이 관창을 베지 않을 수 없었다. 벤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군에게 돌려보내니, 품일장군이 그 머리를 쳐들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울부짖었다.
“내 아들의 얼굴이 생시와 똑같구나! 능히 나라를 위하여 죽었으니, 아쉬울 것 없도다!”
이를 본 신라 군사들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일어났다. 다같이 죽기를 결심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니, 백제가 이를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이 황산벌 싸움에서 계백장군을 비롯한 백제의 모든 군사들이 전사하였고, 이를 마지막으로 백제의 사직은 무너졌다(660년).
황산벌 싸움의 승리는 반굴(盤屈, ?~660)과 관창(官昌, 644~660), 두 화랑의 용감한 죽음으로 이끌어낸 승리였다.
신라(新羅)는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멸하고, 마침내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우리 영토를 집어삼키려고 주저앉는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또 7년(670~676)에 걸쳐 나·당 전쟁을 치러야 했다.
문무왕 12년(672년) 황해도 석문(石門) 벌판에서 나·당 전쟁이 있었다. 이때 김유신 장군의 아들 원술(元述)도 비장(裨將)으로 출전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신라는 당나라에 패하고 말았다.
이때 원술(元述)은 적진에 뛰어들어 나라에 목숨을 바치고자 했으나, 그를 보좌하는 담릉(淡凌)이 말고삐를 놓지 않고 말렸다.
“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죽을 자리를 찾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죽어서 얻는 것이 없다면,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남아는 구차하게 사는 것이 아니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아버님을 뵐 것인가?”
원술(元述)은 말을 몰아 적진으로 치달리고자 했으나, 담릉이 끝내 말고삐에 매달려 놓치 않으니, 원술은 끝내 전사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쟁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아들 원술(元述)을, 김유신 장군은 참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원술은 왕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화랑도의 임전무퇴)까지도 저버린 놈이니 마땅히 참형에 처해야 하옵니다.”
그러나 왕은 김유신의 많은 공적을 생각하여 차마 참수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술은 임금에게는 용서를 받았지만, 부모에게는 끝내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화랑의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을 어기고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이었다.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 산에 숨어 지내던 중, 아버지 김유신 장군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아버지 얼굴이나 뵙고자 집에 갔으나, 어머니가 아들을 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인연 끊은 아들, 나 혼자 어미 될 수 없다.”
원술은 통곡하며 몸부림쳤으나, 어머니는 끝내 아들을 외면하였다. 할 수 없이 서러운 마음을 머금고 원술은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담릉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망극한 지경에 이르렀다.”
원술은 회한을 머금고 다시 태백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던 중 원술은 결국 675년 당나라 군대가 매소성(買蘇城)을 쳐들어왔을 때, 신분을 감추고 무명(無名)으로 참전해서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임금이 알고 벼슬을 내렸으나, 원술은 받지 않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화랑도의 이 엄격한 기질과 기백이야말로 신라를 수호한 정신이요, 사상이었다. 그리고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이루고 마침내 당나라의 세력마저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신라 화랑들의 대(代)를 이은 숭고한 충효사상,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 oblige)에 의한 것이었다.
오늘날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자식을 군대에서 빼돌리고, 재산을 해외로 은닉하는 작태와는 다른, 얼마나 숭고한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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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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