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국선(國仙) 김유신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17
김유신(595~673) 장군은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17살에 홀로 중악(中嶽) 석굴에 들어가 수행하였으며, 18세에 국선(國仙)이 된 인물로서 삼국통일의 위대한 주역이었다.증조부는 김수로왕의 9대손이자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김구해(金仇亥)였다. 김구해가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신라에 투항한 이후, 조부 김무력(金武力)과 부친 김서현(金舒玄)은 신라의 장군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부친 서현공(舒玄公)은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南方火星)과 진성(鎭星:中央土星),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모친 만명부인 또한 신축일(辛丑日) 밤에 동자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기를 배어 낳았는데, 등에 칠성(七星) 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김유신이 15세에 화랑이 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이 그를 기꺼이 따랐는데, 그의 무리를 일러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17살이 되었을 때는 고구려, 백제, 일본 등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혼자 중악(中嶽) 석굴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告)하며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적국이 무도하여 짐승같이 우리의 영역을 소란케 하니,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제가 일개 미약한 신하지만, 나라의 환란을 없애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부디 하늘은 굽어 살펴 저를 도와주소서!”
이렇게 하늘에 소원을 빌고 나흘이 지나자, 거친 베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서 무서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무슨 일로 혼자 머무는가?”
“노인께서는 어디서 오셨으며, 누구시온지요?”
“나는 일정한 주거가 없이 인연 닿는 대로 가고 머무나니, 이름은 난승(難勝)이다.”
김유신은 노인이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간파하고, 거듭 절하며 간청하였다.
“저는 신라인으로서, 나라의 원수를 보니 가슴이 미어지듯 아픕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부디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옵소서.”
유신이 눈물을 흘리면서 거듭거듭 간청하자, 노인은 입을 떼었다.
“공자가 어린 나이로 삼국(三國)을 병합하려는 큰 뜻을 품었으니, 장하도다.”
노인은 말을 마치며 유신에게 비결(秘訣)을 알려 주었다.
“부디 함부로 쓰지 말라. 만약 이를 의롭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해를 입으리라.”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흔적 없이 사라지고, 오직 산위에 오색찬란한 빛만 서려 있었다.
김유신은 더욱더 뜻을 깊게 품고 보검을 차고 홀로 인박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향을 피워놓고 하늘에 맹세하며 기도했다. 그러자 천관신이 빛을 비추며 보검에 영기를 쬐어 주었다. 허숙(虛宿)과 각숙(角宿) 두 별자리의 빛이 환하게 내려오며 칼이 흔들렸다. 김유신의 정성이 마침내 감응(感應) 된 것이었다.
진평왕 51년(629년) 가을, 신라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략하였다. 이때 김유신은 부친 서현(舒玄) 장군을 따라 전쟁에 첫 출전을 하였다. 그런데 공략은 신라가 먼저 했으나, 고구려 군사가 오히려 사기충천한지라 신라군은 곧 패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김유신이 부친 서현 장군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가 스스로 충효(忠孝)를 다하기로 맹세했으니, 어쩔 수 없이 적진에 들어가 용맹스럽게 싸워야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김유신은 말에 올라타더니, 적진을 향해 칼을 빼어들고 돌진했다. 그리고 이내 적장의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 이에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치솟아 분연히 일어나 공격하여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1년(642년)에는 백제와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재차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때 김유신의 가족들은 모두 문밖까지 나와 김유신 장군이 잠시라도 집에 들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김유신 장군은 그대로 집을 지나쳐 갔다. 다만 부하를 시켜 자기 집의 물을 한 그릇 떠오게 했을 뿐이었다.
“우리 집의 물맛이 옛 맛 그대로구나. 됐다, 가자!”
이를 본 군사들은 모두 마음을 다잡았다.
“대장군이 이러하신데, 어찌 우리가 집에 못 가는 것을 섭섭하게 여길 것인가!”
이에 신라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충천하였으므로, 백제군은 감히 근접을 못하고 그대로 물러갔다.
660년. 김유신 장군은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백제를 크게 공략하였다. 김유신 장군은 태자 김법민(金法敏)과 함께 육로로 나아가 황산벌판에서 백제의 명장 계백(階伯)장군을 맞아 싸움을 벌였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둘째아들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함께 수로로 진격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 김유신 장군과 백제 계백장군의 황산벌 싸움은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이었다. 식구들을 모두 죽이고 나온 계백장군의 용맹한 정신은 그대로 전투에 투영 되어서, 신라군은 점점 열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때 김유신 장군의 동생 김흠춘 장군은 아들 반굴에게 낭장결의해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지금이 바로 충효를 이룰 기회다!”
반굴의 장렬한 전사를 본 품일장군도 자신의 아들 관창에게 똑같이 낭장결의를 요구했다.
“네 나이 비록 어리지만, 뜻과 기개가 충천하다. 어찌 용맹을 내지 않을쏘냐?”
아버지의 말에 관창은 즉시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적진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렇게 두 화랑의 죽음에 힘입어 김유신 장군은 고전 끝에 어렵게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계백장군을 전사시켰다.
전투가 끝나고 김유신 장군은 소정방 부대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소정방과 김인문 부대 또한 기벌포(伎伐浦, 금강하구)에서 백제군을 대파하고 이미 김유신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렵게 싸움을 이기고, 지친 군사들을 이끌고 도착한 김유신 장군에게 소정방은 기약한 날에 늦었다는 이유로 김유신의 부하인 독군(督軍) 김문영을 목 베려 하였다.
이에 김유신 장군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황산벌 싸움을 보지 못하고 단지 늦었다는 이유로 죄를 삼으려 하니, 나는 죄 없이는 욕을 받을 수 없다. 내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벌인 후에 백제를 멸하리라!”
김유신 장군이 큰 도끼를 땅에 내리꽂으며 소리치자, 성난 머리털이 위로 치솟고, 허리에 찬 칼은 저절로 뛰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놀란 소정방은 김문영을 풀어주며, 김유신 장군에게 사과하였다. 소정방은 당나라 고조(高祖)로부터 일찍이 ‘백제를 멸하고 나면, 틈을 보아 신라까지 내쳐 뺏으라.’는 밀지를 받은지라, 걸핏하면 트집을 잡고 거들먹거리며 갖가지 횡포를 자행하고 있던 차였다.
삼국(三國)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당나라의 음모를 간파한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를 제압하기 위해 선수 칠 계획을 세웠으나,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아무튼 신라는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멸하고, 마침내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라는 또 당나라와의 전쟁이 남아 있었다. 우리 영토를 집어삼키려고 주저앉는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7년(670~676)에 걸쳐 나·당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672년 나·당 전쟁의 석문(石門) 벌판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아들 원술(元述)을, 김유신 장군은 참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은 김유신의 많은 공적을 생각하여 차마 참수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술은 임금에게는 용서를 받았지만, 부모에게는 용서받지 못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몸이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이다.
산 속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하던 원술은 결국 당나라 군대가 매소성을 쳐들어왔을 때, 신분을 감추고 무명(無名)으로 참전해서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임금이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이내 종적을 감추었다.
신라인의 이런 강건한 의지는 결국 우리 영토를 집어삼키려는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676) 하는데 마침내 성공하였다.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주역 김유신 장군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 만명부인이 있었다. 유신이 젊어서 천관 기녀와 알고 지낼 때, 만명부인이 이를 알고 호통을 쳤다.
“네가 장차 삼국통일의 큰 꿈을 천하에 펼칠 대장부란 말이냐?”
어머니의 엄한 꾸지람을 들은 유신은 천관 기녀의 집에 발길을 끊었다. 그런데 훈련으로 피곤해 말에서 졸고 있는 사이 어느새 백마가 천관 기녀의 집으로 간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안 유신은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백마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이러한 단호함이 있었기에, 김유신 장군은 마침내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이룩할 수 있었으리라.
만명부인의 위대한 일화는 또 하나 있다. 유신이 아기일 때 만명부인은 아기를 업고 친정집엘 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가에서 굶주린 거지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만명부인은 주저 없이 자기 젖을 물려서 살려냈다.
혹자는 이 거지가 바로 관세음보살이었다고 하는 이도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실화인 모양이다.

* 위 내용은 외부 기고문으로 본지 편집방향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