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신라의 화랑도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16
화랑도는 우리민족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현묘지도 풍류도의 맥(脈)을 이었으며,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낭(郎)은 곧 신라의 화랑(花郞)이니, 화랑은 본래 상고(上古)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武士)이니, 곧 그때에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조의(皂衣)를 입어 ‘조의선인(皂衣仙人)’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하여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다.”
신채호 선생이 ‘화랑(花郞)’을 ‘상고(上古)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武士)’라고 정의한 것은, 화랑이 고대(古代)의 고유사상(固有思想)을 계승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화랑도의 상무(尙武) 정신은 본래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있었던 소도무사(蘇塗武士) 정신의 계승이었다. 그리고 화랑도는 바로 신라 이전부터 전해오던 민족 고유사상인 풍류도(風流道)를 기반으로 하여 출범한 신라의 범국가적인 ‘인재양성’ 제도였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 같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신라 24대 진흥왕(540〜576)은 본디 천성이 멋이 있어 신선(神仙)을 크게 숭상하였으며, 나라를 흥케 하려면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일으켜야 된다고 생각하여, 양가 출신의 덕행(德行) 있는 젊은이들을 뽑아 그 이름을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다.
김유신 장군이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17살에 홀로 중악의 석굴에 들어가 수행하였으며, 18세에 국선(國仙)이 되었다는 것을 보면, 낭도(郎徒)들을 거느리는 여러 명의 화랑(花郞)이 있고, 화랑의 총지도자로 1명의 국선(國仙)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화랑(花郞)이나 국선(國仙)은 신라 때 처음 사용한 명칭은 아니고, 이미 고조선(古朝鮮) 시대부터 사용해 오던 명칭이었다.
제11대 도해 단군께서는 오가(五加)에 명을 내려 12명산(名山)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國仙)의 소도(蘇塗)를 설치하시고, 박달나무를 많이 둘러 심게 하셨다.
제13대 흘달 단군께서는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시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으셨다. 그리고 미혼의 자제들로 하여금 글을 읽고 활을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였다. 그 국자랑(國子郞)들이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를 꽂았으므로,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불렀다.
《태백일사(太伯逸事)》에는 ‘원화(源花)는 여랑(女郞)을 말하고, 남자는 화랑(花郞)이라 하며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시기(神市記)》에는 ‘랑(郞)은 곧 배달의 신하요, 삼신(三神)을 수호하는 직책을 세습한 것’이라 하였다.
이상으로 화랑(花郞)이나 국선(國仙)의 명칭이 신라 진흥왕대에 처음 쓴 것이 아니고, 고조선 시대에 이미 수행자들에게 부여되었던 명칭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화랑 국선도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풍월도는 ‘밝돌사상’의 이두적(史續的) 표현이다. 풍월도(風月道)가 신선사상(神仙思想) 곧 광명사상(光明思想)의 체(體, 내용)라면, 화랑(花郞) 국선도(國仙道)는 용(用, 형식)으로 불리어진 명칭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신라의 화랑도는 상고시대의 민족 고유사상(固有思想)인 현묘지도 풍월도를 기반으로 하여 출범한 범국가적인 인재양성 제도로서, 신라에 와서 아주 큰 꽃을 피우게 된 것이었다.
《화랑세기(花郞世紀)》서문에 ‘화랑은 선도이다.’ 라고 적고 있듯이, 선도(仙道) 풍월도는 곧 화랑의 사상 국선의 정신이며, 동시에 나라를 흥하게 할 민족정신이었다. 그러므로 진흥왕은 국풍(國風)을 되살리는 민족국가 진흥 발전책으로서 ‘풍류도’를 채택한 것이었다.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은 신라의 화랑이었던 ‘난랑’을 위해 쓴 비석문인 〈난랑비서(鸞郞碑序)〉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말하기를 ‘풍류’라 한다. 이 종교를 일으킨 연원은 선사[仙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유·불·선 3교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 예를 들어, 집으로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가 가르쳤던 교지(敎旨)와 같다.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교지와 같다.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현묘지도 풍류도란 한국인이 먼 옛날부터 자생적으로 계승하여 온 한국 고유(固有)의 전통 사상(思想)이며, 이것이 제도화 되어 신라의 화랑도 국선도가 된 것이었다.
평상시 화랑들은 시가(詩歌)와 음악(音樂), 가무(歌舞) 등 풍류를 수행하였으며, 대자연에 대해서는 종교적 신앙심과 경외심을 갖고 관조(觀照)하였다. 또 그것에 기도하고 그 정기(精氣)를 호흡하며, 마침내 그 속에 침잠함으로써 속세를 초월하고 지극히 고매한 정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풍류도의 수도장(修道場)으로 이용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자유로이 주유하며, 산수(山水)가 빼어난 곳에서는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경건히 기도드리며, 또한 마침내는 그것과 합일함으로써 현묘지경(玄妙之境)에 들어가 무한한 정신의 자유와 정신적 쾌락의 신선적(神仙的) 체험을 맛보았다.
이들은 ‘도의(道義)’로 서로 연마하고, 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기며, 산천(山川)을 찾아 노닐었는데, 먼 곳까지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들의 도의(道義)란 두말할 것도 없이 민족의 전통과 신앙을 존숭하면서 5계(戒)와 3덕(德)의 정신을 체득 연마하는 것이오, 가악(歌樂)으로서 즐긴다 하였으니 ‘멋’있고 예술적인 풍류생활을 장려했던 것이다. 나아가 산수(山水)간에 노닌다고 하였으니, 내 향토의 멀고 가까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발보하고 소요함으로써 국토와 대자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호연지기를 길렀던 것이다.
이렇게 인격을 도야한 화랑 국선들은 맑고 깨끗한 품격의 풍월주인의 삶을 보여 주었으며, 숭고한 정신과 엄숙한 기백을 함께 갖추었다. 그리하여 국가와 민족에 위난이 닥쳐왔을 때는 단연히 일어나 정치와 군사의 제1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紀)》서문에서 ‘어진 재상과 충신이 모두 이에서 뽑혀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또 단재 신채호 선생 역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대(古代)의 선인(先人)과 화랑의 종지(宗旨)는 매양 곳을 따라 현신하여 명장(名將)도 되며 용사(勇士)도 되고 충신(忠臣)도 되고 정치가(政治家)도 되나니, 여씨는 대개 선인(仙人)의 도(道)를 받은 자이며, 조선(朝鮮)이 조선되게 하여 온 자는 화랑이라.”
이렇듯 화랑도는 범신교적(汎神敎的)이면서 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이고, 풍류·예술·도덕적이면서도 상무적(尙武的)인 것이 화랑도(花郞道) 사상이 지닌 특징이라 하겠다.
신라 48대 경문왕의 휘는 응렴(膺廉)이니, 18세에 국선이 되었다. 하루는 산수(山水)를 주유하고 돌아오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이 국선 응렴을 불러 물었다.
“낭(郎)은 국선이 되어 사방을 주유(周遊)하였으니, 무슨 이사(異事)를 보았는가?”
그러자 국선 응렴은 전국을 소요하며 본 3가지 미덕(美德)을 아뢰었다.
1.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남의 아래에 앉는 이가 있으니, 그 하나요.
2. 부유하면서도 검소한 이가 있으니, 그 둘째요.
3.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는 이가 있으니, 그 셋째입니다.
헌안대왕은 국선 응렴을 칭찬하고 사위로 삼아, 다음 왕위를 물려주었다. 경문왕 이전에도 화랑 국선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이가 있으니, 바로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였다.
화랑도의 기풍과 기질이 어떠했는지는 다음 몇 가지로써 잘 알 수 있다.
1. 위로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 지기(知己)를 위하여 죽는다.
2. 의(義) 없이 사는 것은 의(義) 있게 죽는 것만 못하니, 그 의가 아니라면 비록 천금의 이(利)라 하더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3. 장부는 모름지기 병(兵)에 당하여 죽을 것이니, 어찌 상석(床席)에 누워 가인(家人)의 손에서 죽으랴.
4. 전진함이 있으되 후퇴함이 없음은 사졸(士卒)의 상분(常分)이니, 장부가 일에 임하여 자결할지언정 어찌 무리를 따라 쫓겨 가랴.
이렇듯 가장 척박한 환경에 처해 있었던 신라가 마침내 국난을 극복하고 삼국(三國)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저력은, 우리민족 고유사상으로 무장된 죽음을 불사하는 화랑들의 장렬한 기백과 씩씩한 기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땅에 불교가 수입된 것만 보더라도 고구려가 372년, 백제 384년, 신라는 이보다 150여 년이나 뒤인 527년이었다. 이것은 신라가 삼국(三國) 중에서도 우리민족 고유사상(固有思想)의 흐름이 가장 강했음을 말해주는 예라 하겠다.
‘죽음은 있어도 패전은 없다.’는 화랑정신! 이는 바로 우리 겨레의 얼의 진수(眞髓)요, 풍류도의 맥(脈)이었다.
* 위 내용은 외부 기고문으로 본지 편집방향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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