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다물(多勿)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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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15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374~413)은 국선도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시다.국선도는 오랜 옛날부터 스승 대대로 구전되어 내려오는 말씀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원래는 한인(환인,桓因)이 아니라 한얼(환얼, 桓얼-口 안에 흙土)이었다는 말씀이다.
‘한얼(환얼)’이란 하늘님, 하늘의 넋, 하느님이란 뜻이다. ‘얼’자는 口 안에 흙 토(土)자가 들어있는 글자로 ‘겨레의 얼’ ‘얼 빠진 놈’ 할 때의 ‘얼’자이다.
그런데 이 얼(口 안에 흙土)자가 자전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제시대의 식민사관학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얼’자를 인(因)자로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 ‘얼(口 안에 흙土)’자가 바로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광개토대왕 비문의 얼(口 안에 흙土)자는 바로 ‘국선도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회 칼럼에서 언급한 바 있다.)
먼저 광개토대왕의 ‘廣開土’ 글자 뜻을 옥편에서 찾아보자.
광(廣) - 드넓은. 광범위한.
개토(開土) - 땅을 열다. 땅을 다지다. 토지를 개간하다. 토지가 널리 퍼지다.
우리 옛말에 ‘말대로 된다’ ‘이름 그대로 된다’는 속담이 있는데, 광개토대왕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지금의 산동성과 안휘, 강서성까지 드넓은 영토를 경영했던 고조선 치우천황의 뜻을 올곧게 계승한 대표적인 왕도 바로 광개토대왕이시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초부터 탈환전을 개시하여 활발한 다물(多勿) 정책으로 잃었던 땅들을 수복해 나갔다. 그리하여 요동은 물론이고, 서쪽으로 요하를 건너 요서지방까지도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필자는 12회 칼럼에서 우리민족의 3대 경전 중 하나인 <참전계경>이 옛날 연(燕)나라의 침략 병화(兵禍) 때 소실 당했다가, 을파소 선인이 단군성조의 계시를 받아 다시 얻었다는 것을 거론 하였다.광개토대왕은 이에 대한 보복전을 펼쳐, 404년 후연(後燕)을 친정하여 무너뜨렸다. 그리고 전국시대 때 연(燕)나라에 빼앗겼던 고조선 땅을 700여 년 만에 되찾았다. 후연(後燕)은 바로 북경 인근지역으로서, 고구려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 이전인 392년에는 북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거란에 잡혀 있던 고구려인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시라무렌강 방면의 염수 가의 비려(碑麗)를 친정하여 많은 영(營)을 격파하고 가축을 노획하였다.
396년에는 산동반도 근처 지역과 하느쿵반도의 서쪽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410년에는 북부 시베리아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고 남하하여 황화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로란(Roran)을 격파하고 서부 시베리아를 확보하여 고조선의 옛 영토권을 수복하였다.
그리하여 요동은 물론이요, 서쪽으로 요하(遼河), 북쪽으로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쪽으로 훈춘(琿春), 남쪽으로 임진강 유역까지 세력권 안에 둔, 명실공히 만주대륙의 주인공이자 동아시아의 거대 강국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이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年號)는 ‘제국의 영원한 발전을 약속’하는 뜻에서 쓰인 연호이다.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나라의 대외적인 업적뿐만 아니라 내정정비도 갖추어서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고 칭송하는 기록이 후대에 남겨졌다.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장수왕은 414년 대형 훈적비를 세웠다.(길림성 집안현) 정식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보통 마지막 세 글자를 따서 ‘호태왕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비석(碑石) 4면에는 추모(주몽, 동명왕) 왕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광개토대왕에 이르는 왕계 및 그 약력과 비(碑)의 건립 경위,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대외정복활동과 각 지방의순수(巡狩) 행적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승천하실 때 그 아들에게 “이 세상을 ‘道’로서 다스리라.(以道與治)” 유언한 내용까지도 나온다.
동명왕은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의 왕으로서 당연히 우리민족 고유의 도맥(道脈)을 승계하신 왕이다. 그리하여 평양 근교에는 그의 대궐터와 함께 기린굴(동명왕이 기린마를 타고 들어갔다는 굴)과 조천석(朝天石; 하늘나라의 조회에 갈 때 출발하던 곳이라는 돌)이 지금까지도 고적으로 남아 있다.
우리의 3대 경전 중의 하나인 <삼일신고(三一神誥)>에는 ‘성통공완조천(性通功完朝天)’이란 말이 나온다. 성(性)을 통하고 공(功)을 완수하고 나면 조천(朝天)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토록 거대한 광개토대왕비가 존재한다는 것은 <삼국사기> <용비어천가> <지봉유설> 등에 언급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호태왕비도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80년, 밭을 개간하던 청나라 농부에 의해 호태왕비는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정작 한국 정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반해 만주 침략을 노리던 일본 참모본부 소속의 밀정 사카와 가게노부(酒匈景信) 중위는 1882년 이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우리의 호태왕 비문을 비밀리에 먼저 연구하였고, 일본에 유리하도록 일부 문자를 변조하기까지 하였다.
이 비석(碑石)이 고구려 시대의 희귀한 비(碑)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과 청나라는 서로 선명한 탁본을 얻기 위해 비면에 석회칠을 하는 바람에 우리의 호태왕비는 훼손되고, 글자도 많이 마멸되었다.
한국 정부는 190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호태왕비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정인보(鄭寅普) 선생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이라는 일본의 비문(碑文) 변조에 대한 비판으로 첫 연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고조선 제14대 환웅이신 치우천황의 능과 유적들이 왜 산동성에 있겠는가?
그때 팠던 우물이라든지, 진을 쳤던 자리들이 지금까지도 역사적인 유물로 남아있으며, 현지인들 간에는 치우천황의 무용담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2. 고조선 단군의 옛 비석인 단군고비(檀君古碑)가 왜 돌궐국(突厥國, 지금의 터키)에 있겠는가?
발해 왕 대조영의 친동생 대야발(大野勃)은 고구려 전쟁 때 없어진 <단기고사(檀奇古史)>를 13년에 걸쳐 복원·저술하는 동안 돌궐국(突厥國, 지금의 터키)에 2차례 들어가 고적 단군고비(檀君古碑)를 답사하였다.
3. 고구려 광개토대왕릉과 훈적비, 그리고 고구려 귀족들의 묘지가 왜 길림성 집안현에 있겠는가?
4. 현재 중국 요녕성(고구려 때의 안시성) 일대가 왜 지금까지 고려성, 고려문, 고구려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겠는가?
5. 요동반도의 남쪽바다 섬들에 왜 지금까지 고려장, 고려성산, 고려성, 고구려성이라는 이름들이 남아 내려오고 있겠는가?
우리 다같이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런데 몽고의 <무쿠리 계보>는 우리의<삼국사기>보다 더 광개토대왕의 치적에 대해서 자세하게 적고 있다. <무쿠리 계보> 는 몽골인이 쓴 고구려 왕들의 계보와 역사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는 점을 칠 때 ‘무꾸리 한다’고 하는데, 고구려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무쿠리 계보>라고 적은 것이다.
사실, 지금은 무(巫)가 천한 계급으로 전락되었지만, 본래는 그렇지가 않았다.
‘무(巫)’는 곧 단군(壇君)을 의미하는 바,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이 그대로 여실하게 드러나 있는 글자이다.
위  ̄은 하늘이요, 아래 _은 땅이다. 기둥 |은 하늘과 땅을 통하는 사람인데, 곧 신인(神人), 단군(壇君), 무당(巫堂)이다. 양편의 사람들은 중생들을 의미하는데, 사람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포함한 삼라만상을 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인(神人)이 하늘과 땅을 통하여 우주만류에 두루 유익함을 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이 그대로 들어있는 글자가 바로 ‘무(巫)’자다.
‘무(巫)’는 바로 대자연(大自然)과 상통하는 존재로서, 신(神)과 사람 사이에서 위의 뜻을 아래에 전하고, 아래의 뜻을 위로 전하는 신인(神人) 선인(仙人)들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조선이나 삼국시대 중반만 하더라도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였다. 그러므로 현재 티벳의 달라이라마처럼, 왕이 곧 제사장 역할을 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몽골인이 쓴 <무쿠리 계보>는 우리 역사에 많이 근접한 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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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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