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연재

배에서 배로 뛰어 살아남다… 병마절도사 이일제


조선후기에 이희평(李羲平, 1772~1839)이 편찬한 것으로 전하는 야담집인 계서야담(溪西野談)에는 이일제(李逸濟)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일제는 영조 39년(1763) 12월 12일(갑오)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인물이다.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일제는 판서 이기익(李箕翊, 1654~1739)의 손자로 용력이 뛰어나고 빠르기가 나는 새와 같았다. 아이 때부터 호방하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아 글공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할아버지 이기익이 걱정을 하였다.

14~5세에 관례(冠禮)를 치르고 아직 장가는 가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에는 몰래 창기의 집에 갔다. 액정서의 하례인 액례와 포교의 무리들이 가득 앉아 있고 술상에 음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어지러웠는데 작은 소년 하나가 곧장 자리로 들어와 기생과 서로 즐기며 놀자, 모여 앉은 여러 악소배들이 모두 “이처럼 무례하고 젖내나는 아이는 때려죽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더니, 무리를 지어 일어나 발로 차는 것이었다.

그들이 발로 차자, 이일제는 손으로 한 사람의 발을 잡아 가지고 몽둥이 삼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땅에 엎드렸다. 그 모습을 본 이일제는 그 사람을 던져두고 문을 나서더니 몸을 날려 집으로 올라가 지붕을 따라서 달리는데 혹 대여섯 간을 건너뛰기도 하였다.

이 때에 어떤 포교가 마침 오줌을 누러 문 밖으로 나와 있었기에 그 일에 끼지 않았는데,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기고 자기 역시 지붕으로 뛰어올라 뒤를 밟아가자 일제가 이판서 집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포교는 바로 그 친지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다음 날 아침에 와서 이 사건을 전하자, 이기익은 매질을 하고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 결혼을 한 이일제가 벗을 따라 꽃을 찾아서 남산 잠두봉으로 올라갔는데, 이 때에 한량들이 활쏘기를 익히며 수십 명이 소나무 그늘 아래에 모여 있었다. 이일제가 오는 것을 보더니 동상례(東床禮)를 받아먹을 수 있겠다며 일시에 함께 일어나 그의 손을 잡고 거꾸로 매달려고 하였다.

동상례는 혼례가 끝난 뒤에 신부의 친척과 어린 벗들이 신랑을 잡아 포목으로 다리를 묶어 거꾸로 메고 몽둥이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면서 점잖지 못한 말로 억지를 써서 술과 음식을 뜯어내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발바닥으로 때리기 때문에 동상례를 ‘족장때린다’고도 한다. 이에 이일제는 몸을 솟구치며 한번 뛰어올라 소나무 가지를 꺾더니 좌우로 휘두르자 일시에 바람결에 휩쓸리 듯이 흩어졌다. 이에 산에서 내려왔다. 이 뒤로부터 차차 이름이 퍼져서 별도로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아가 무직(武職)을 맡았는데 지위가 아경(亞卿)즉 종2품의 참판에 이르렀다.

영조 24년(1748) 판서 조엄(趙湄, 1719~1777)이 일본에 통신사로 갔는데, 이일제로 하여금 막빈(幕賓) 즉 비장(裨將)으로 따르도록 하였다. 항해하려 할 때에 상선(上船)에서 불이 나 화염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여러 사람이 각기 목숨을 구하고자 달아나 급히 왜인의 구조선으로 내려갔다. 그러고서도 또 불이 이어 붙을 염려가 있어 노를 저어 피하였는데, 상선으로부터 거의 수십간이나 떨어져서야 비로소 정신을 수습하고 서로 사람 수를 세어보니 일제 한 사람만이 없었다. 여러 사람이 놀라고 당황하며 그 사람은 불에 탔으리라고 여겼는데 얼마 있지 않아 멀리서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여러 사람이 뱃머리에 서서 바라보자 이일제가 화염가운데 서서 손을 들고 큰 소리로 “잠시 배를 멈추거라”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비로소 그가 이일제임을 알고서 배를 멈추고 기다리자, 일제가 불 가운데로부터 배 위로 날아 내리는지라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일제가 취하여 상선의 선창 아래에서 자느라고 불이 난 지를 몰랐던 데다 여러 사람들도 창황 중에 미처 살펴보지 못하였던 것인데, 잠이 깨어 불길을 보자 바로 옆의 배로 뛰어내렸던 것이니, 그의 귀신같이 날램이 이와 같았다.

조명채(曺命采)가 쓴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는 1748년(영조 24) 2월 21일(을해)에 이일제의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역풍이 있어서 악포(鰐浦)에서 묵었다. 밤은 깊었으나 아직 잠들기 전에 정사에서 보내 온 시가 있어서 바야흐로 화답해 보내려는 때에 문득 떠드는 소리가 배를 대어 둔 근처에서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마치 까마귀와 참새가 지저귀는 듯하다. 마을 안의 왜인의 무리도 서로 외치어 일어나나 아무도 그 까닭을 모르므로,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바삐 하인을 시켜서 나가 보게 하였더니, 부사기선(副使騎船)에 불이 났다고 보고한다. 놀래어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모르며 곧 물가에 배가 닿을 수 있도록 다리처럼 만들어 놓은 부두 위로 나가 보니 부방군관(副房軍官) 이일제가 겨우 불꽃 속에서 왜선으로 뛰어내려 뭍으로 올라 들어왔으나, 위아래가 벌거숭이로 헐떡이며 산 사람의 얼굴색이 없이 다만 한 손으로 제 상투를 쥐고 오는데,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만난 듯이 보였다.……배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살아서 언덕 끝에 나온 자는 다 벌거숭이인데, 몹시 데어서 죽어 가는 자도 있고, 고통에 신음하는 자도 있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자도 있으니, 광경이 아주 슬퍼서 차마 볼 수가 없이 참혹하였다. 배에 들어가 자던 비장(裨將)원역(員役)들이 물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곁의 배에 뛰어내리기도 하고, 밧줄을 따라 내려와서, 죽을 지경에서 살아나느라고 뼈가 부러지고 살갗을 다쳤다.

이 때 불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좌수영(左水營)의 사령(使令) 1인과 창원(昌原)의 악공(樂工) 1인이 그 안에서 타 죽기도 하였다. 󰡔계서야담󰡕에 전해지는 것과 달리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일제도 여유있게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얼굴이 하얗게 뜰 정도로 겨우 살아남았음을 말해준다.

마상재 중 등리장신


[봉사일본시문견록]에는 이일제의 무예솜씨를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 중 영조 24년(1784) 6월 10일(계해) 기록을 보자.

맑음. 일기가 매우 추웠다. 강호에 머물렀다. 상판사(上判事) 2원(員)이 활쏘기를 할 사람들을 거느리고 관백궁에 들어갔는데, 상방비장(上房裨將) 이백령(李百齡), 부방비장 이일제(李逸濟)와 이방일(李邦一), 삼방비장 이주국(李柱國) 및 장사 군관(壯士軍官) 김수정(金壽鼎)과 임세재(林世載), 마상재인 인문조(印文調)와 이세번(李世蕃)을 보냈는데, 모두 8인이다. 김수정은 몇일 전에 대궁(大弓)을 고를 때에 활이 젖혀지는 바람에 다쳤다. 다행히 상처가 위태로운 지경은 면했으나 어깨가 붓고 아픈데도 오늘 능히 일어나서 활시위를 잡고 사원(射員)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가니 그가 장사임을 알 만하다.

신시(申時) 뒤에 활쏘기를 하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활을 쏘는 사장(射場)은 상조원(常照院) 앞에 설치하였는데, 상조원은 곧 왜국의 황자(皇子)로 스님이 된 자가 주지를 하는 곳이었다. 관백이 때때로 상조원의 스님을 와서 본다고 하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육량궁(六兩弓)은 사정 거리가 매우 짧고 또 기해년 사행 때에 화살이 인가에 떨어져 집안으로 뚫고 들어갔으므로 왜인이 매우 두려워하여 이번에는 쏘지 못하게 하였다.

먼저 사후(射帿)를 시험하는데 걸음 수는 겨우 1백 30여 보였다. 이주국이백령김수정은 모두 5발을 맞히고, 이일제이방일임세재는 모두 3발을 맞히고, 인문조도 3발을 맞히고, 이세번은 2발을 맞혔다. 왜인이 맞힌 자의 화살 수효를 종이에 기록하되, 한 가운데인 정곡(正鵠)을 맞힌 자는 ‘범(帆)’자를 쓰고 언저리를 맞힌 자는 ‘각(角)’자를 썼는데, ’각‘은 사각(四角)의 뜻이나 ’범‘은 그 뜻을 알 수 없다.
다음에는 기추(騎芻)를 시험하는데, 허수아비 모양의 추인(芻人)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추적(芻的)보다 조금 컸다. 임세재인문조이세번 3인은 3발을 맞히고 그 이외의 사람은 모두 5발을 맞혔다. 말이 매우 살찌고 훌륭하여 나는 듯이 달리는데, 이일제는 첫 추적을 맞히고서 말안장이 기울어져 떨어질 뻔하다가, 곧 몸을 솟구쳐 안장에 바로 앉아서 나머지 화살을 달리면서 다 맞히니, 사면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모두 입을 벌리고 감탄하였다. 대개, 왜인은 말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날쌘 말이 내닫는 것을 보고도 기이하고 장하게 여겼었는데, 더구나 사람마다 화살을 헛되이 쏘지 않으니, 구경하는 사람이 모두 혀를 내두르며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784년 일본사행을 간 통신사 일행들 중에 활쏘기에 능한 이들이 천황을 대신하여 정무를 총괄하는 관백의 궁에 들어가 활쏘기를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관백이 조선 무인들의 활쏘기를 구경하려고 한 것은 그만큼 일본에서는 조선의 활쏘기만큼 활을 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일이 조선 군관들의 활쏘기를 보고 그 맞힌 것을 기록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시각의 북새선은도 부분


이 사행에서 기해년 즉, 1719년(숙종 45)의 사행 때에 화살이 인가에 떨어져 집안으로 뚫고 들어갔으므로 왜인이 매우 두려워하여 육량궁을 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육량궁은 그 길이가 166cm정도 되는 클 활로 정량궁이라고도 하는데, 활의 힘이 너무 강해 쏘는 사람의 팔을 상하게 할 정도였기 때문에 조선 내에서도 쏘는 것을 기피할 정도였으므로 그 위력을 본 왜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이 당시 이일제는 천으로 된 과녁을 쏘는 사후를 할 때는 5발 중 3발을,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추에서는 5발을 모두 명중시켰을 정도였다. 만만치 않은 활쏘기 솜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일제는 기추할 때에는 말안장이 기울어져 떨어질 뻔하였다가 몸을 솟구쳐 바로 앉아 화살을 다 맞혔다고 하는데, 불이 났을 때 상선에서 왜선으로 뛰어내린 것과 같이 생각하면 매우 몸이 날랬으며, 마상재에도 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사행에서 앞서 영조는 영조 23년(1747) 11월 계묘에 이일제(李逸濟) 등 통신사를 따라가는 군관들을 불러 “막중(幕中)의 임무가 유별하므로 그대들로 하여금 가려 보내는 것이다. 이처럼 불러 면전에서 타이르는 것은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저들의 사정․도로의 멀고 가까움․산천의 험함과 평탄함․무예의 장점과 단점․인심․습속을 잘 엿보고 오라”고 하였다. 당시 영조가 일본에 대해 가지는 경계심을 알 수 있다. 이일제는 이 사행에서 아란(阿蘭) 즉 네덜란드의 화포와 일본의 진법도(陣法圖)를 몰래 구해 오라는 명을 받아 그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글.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ㅣ heoinu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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