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예이야기] 씨름소년 이야기 - 2

김준근 씨름하는 모양
소년은 “잘한다고는 못하겠지만, 한판 배우고 싶습니다. 다만 씨름에 내기가 걸리지 않으면 이기고 지고 간에 차이가 없어 구경꾼이 퍽 심심하지요. 스님이 아낌없이 내기를 걸어 준다면 구경꾼들도 한 바탕 옷을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승려는 팔뚝을 뽐내며 “하도 오랫동안 씨름을 못해서 몸속에 기운이 꽉 막혀 있었는데, 지금 나를 일깨우는 자가 바로 너로구나. 그런데 무슨 내기를 하겠느냐?”라고 말했다.
소년이 “스님이 저를 이기면 제게 한 푼도 주지 말고 그냥 제 아내를 데려가십시오. 제가 이기면 스님의 땅과 돈은 감히 바라지도 않겠고, 그저 아내와 함께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승려는 또 기뻐하며 “내기는 내기다만 잠자리가 돌기둥을 미는 꼴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되지도 않을 일에 덤벼드는 소년의 무모한 행동을 짐짓 비꼰 것이다.
소년은 “스님은 그저 돌기둥이 되시면 그만이지 무엇 하러 잠자리를 걱정을 대신해 줍니까”라고 하자, 승려는 또 웃으며, “씨름 전에 입씨름으로 기선 제압을 하려 하다니, 너 또한 쓸만 한 녀석이다”라고 하였다.
둘이 대결을 벌일 때는 늦봄이었다. 내리던 비가 갓 그쳐 길은 온통 진창이 되어 있었다. 다만 객점 앞에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는데, 수백 보쯤 되는 너비에 언덕 위가 평평하고 넓었으며 땅이 말라서 가벼운 먼지가 일어나려 했다.
소년은 언덕 위를 가리키며 웃음을 띤 채, “여기가 바로 하늘이 스님을 위해 만들어 준 씨름판이군요.”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함께 언덕에 올랐다.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뒤따라갔고, 곽운 또한 그 중에 끼어 있었다. 언덕아래에는 큰 구덩이가 하나 있었다. 온 마을을 똥을 받아 두었다가 매년 밭에 거름으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구덩이는 바닥을 모를 정도로 매우 깊었다.
두 사람이 동서 양쪽을 마주 서서 웃옷을 벗었다. 승려는 구경꾼을 돌아보고, “노승이 이제 이 아이와 시합을 한다.”라고 말했다. 소년은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무릎을 세우더니 등을 활처럼 젖히고 배를 내밀며 오른손으로 승려의 왼쪽 넓적다리를 움켜쥐고 다시 왼손을 승려의 등 뒤로 돌려 허리띠를 굳게 잡았다. 승려는 떡 버티고 선 채 여전히 껄껄껄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소년은 문득 기합을 지르며 우뚝 일어서서 왼쪽 어깨 위로 승려를 비껴 멨다. 승려의 두 손은 허공에서 버둥거리고 두 다리는 허공을 차는데, 마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헤엄치는 모습 같았다. 이에 소년이 몸을 돌리는데, 마치 붕새가 큰바람을 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했다. 승려는 여전히 소년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마치 물레가 바퀴 축을 따라 돌아가듯 힘을 전혀 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소년은 한쪽 어깨를 올리고 다른 한족 어깨를 내리며, 왼손으로는 그릇에 물을 담는 모양을 하고 오른손으로는 칼집에서 칼을 뽑는 모양을 짓더니, 별안간 허리를 굽혀 결국 못된 중을 똥 구덩이 속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 씨름 기술은 이른바 금강역사가 몸을 뒤집는다는 ‘금강번신(金剛飜身)’이다. 옥으로 만든 산이 공중에서 쓰러지는 형세였다. 하늘에서 별똥이 떨어지고 항아리에서 물이 쏟아지는 듯한 기세라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똥구덩이가 열렸다 닫히면서 청정한 스님의 몸이 구더기 똥통 속에서 그만 열반하고 말았다. 비록 1천 부처가 세상에 나와서 참회시키려 한들 미칠 수 없는 일이었다.
둘러서 구경하던 이들이 하도 많아 몇 백 명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승려가 소년의 아내를 빼앗으려 했을 때 누군들 분하게 여기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승려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했기에 분노했음에도 감히 분노를 드러낼 수 없었다.
소년이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제 아내를 내주겠다고 했을 때 누군들 가련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소년의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의심하면서도 충분히 의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자, 승려의 죽음을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고 또 승려를 죽게 한 소년의 능력을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지러이 소년 앞으로 다가가 그 성명을 묻는 자도 있고 그 나이를 묻는 자도 있고 그 고향을 묻는 자도 있었다. 소년은 “성은 이(李)가 이고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을 뿐 이름과 고향은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중이 받을 빚은 과연 300냥 이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시냇물 남쪽의 땅은 모두 경영(京營; 훈련도감 등의 군영을 가리킨다)이 군대의 군영이나 관청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경작하는 둔전입니다. 그 자가 어찌 송곳 하나 세울 만한 땅이라도 가졌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또 어떤 이가, “중이 씨름을 좋아한다는 것을 미리 들은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삼아 그 목숨을 빼앗은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소년은 웃음을 머금을 따름이었다. 소년은 객점으로 돌아가 밥을 재촉해서 먹었는데, 다 먹었을 때 사미승이 빚 문서를 안고 왔다. 소년은 빚 문서를 가져다 불사르며, “저 흉악한 자를 없앤 건 청정한 절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이 업장을 불사르는 것은 온 마을의 근심을 없애기 위함입니다.”라고 말하고 아내를 소에 태우고 조용히 떠났다.
곽운은 승려의 용력에 기가 팍 꺾이고 소년의 용맹에 간담이 서늘해져 집으로 돌아온 뒤로는 조심조심 지내며 감히 다른 사람과 다투려 들지 않았다. 더 이상 예전의 곽운이 아니자 이자명의 선친 상사공(上舍公)이 이상하다 싶어 그 이유를 물었다. 그 때서야 곽운은 씨름소년의 일을 이야기했다. 나는 이증조에게 그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 정곡노인(貞谷老人) 황경일(黃敬日)이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쪽이 더욱 자세했다.
씨름을 잘하는 소년 이야기는 어떤 사실이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말해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힘을 가진 것보다 그 것을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글.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ㅣ heoinu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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