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이야기] 조선의 무예는 궁술뿐 이었을까? - 하
흔히 일본의 쥬도(유도)나 가라데를 무술이라고 한다. 놀이라고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게다. 그런데 유난스럽게도 씨름이나 격도(황소를 쳐서 넘어뜨리고 허리를 분지르는), 나아가 수박, 택견은 무술이라기 보단 놀이라고 하는 것이 설전을 피하기 좋으니. 어찌된 영문일까?

편싸움과 권태훈 옹(1900~ 1994)께서 증언한 ‘수박치는 모습’
궁금하여 사전을 보니 武; ㉠호반(虎班= 무관(武官)의 반열) ㉡무인 ㉢무사 ㉣군대의 위용 ㉤병법 ㉥병장기 ㉦발자취 ㉧굳세다 ㉨잇다 에서 ㄱ 과 ㅅ ㅈ 등이 제외 될 것이고 군대의 위용의 길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병장기의 길이나 굳센 길도 아닐 터.
예를 들춰보니 ㉠재주 ㉡기예 ㉢법도 ㉣학문 ㉤법 ㉥재주가 있다라고 하여 도(道)와 술(術)의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도에 재주의 뜻도 있고 술(術)이 길을 나타내기도 한다. 술(術)의 부(部)는 아니다, 길의 모양인 행(行)이다. 무예와 무도, 술이라는 것이 용어 자체만으로는 별로 다를 게 없다.
결론적으로 주먹질, 발길질 따위의 무도에 관한 기술만을 알면 무예이다. 불필요한 사족을 달지 않아도 된다. 혹여 그것이 무예 여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고 할 때 고려의 의종을 시해 한 이의민이란 자가 하던 기(技)는 무예가 아니고 또, 무인(武人)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일까.
역사의 한편에 등장하는 두경승과 이의민의 힘자랑에서 무인의 도리를 지키던 두경승이 하던 것은 전통 있던 수박이란 무예이고, 이의민이 하던 것은 시정잡배들의 막무가내 힘쓰기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박을 잘하여 운운은 어찌 정사에 등장 할 수 있겠는가.

수박 기본틀 ‘제몸치기’(단련과 힘을 과시하는 것) 상대와 마주보고도 함. 이때는 타격연
“화려가 이러할 제 놀인들 없을소냐 / 중략... 별감 무감 포도군관 정원사령 나장이라/ 남북촌 한량들이 각색놀음 장할시고/ 공물방 선유놀음 포교의 세찬놀음... 장안의 편사놀음 장안의 호걸놀음... 각색 놀음 벌어지니 방방곡곡 놀이철다” 1848년의 한양가(작자미상) 열거 된 놀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기 어려우나 활쏘기도 놀이의 일종이었다.
수박은 무예이고, 무술이며, 심성에 의존하여 무도가 되기도 한다. 또한, 상황에 따라 ‘놀며 장난치는 행위로서의 ‘유희(遊戱)’도 된다. 이렇게 사용 된 예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폭?
[사진 = 왈짜의 주먹질과 드잡이질이 끝난 후(신윤복, 기방난투그림), 조선후기의 검무(검을 쓰는법을 차용하여 동작이 만들어 졌다)]검계(劍契)는 살략계(殺掠契) 또는 홍동계(鬨動契) 등으로 불렸는데 노비가 주인을 죽이려고 만든 조직인 살주계(殺主契)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다. 검계는 봉건시대의 반체제적인 단체였고 폭력조직이었다.
검계의 당원들은 한밤중에 남산에 올라가 태평소를 불어 마치 군사를 모으는 것같이 하고, 성 안의 무뢰배가 결성한 검계가 습진(군사 훈련)을 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했다(‘조야회통’ 과 ‘숙종실록’)고 한다.
‘연려실기술(숙종)’에는 포도대장 장붕익(張鵬翼, 1674~ 1735)과 자객의 결투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영조 9년 5월). “잠결에 창밖의 사람 그림자를 보고서 칼을 들고 나가니, 낯선 이가 대청마루 위에 섰다가 이내 뛰어서 뜰 아래로 내려가므로 함께 칼날을 맞대고 교전(交戰)하여 외문(外門)까지 옮겨갔었는데, 그 자가 몸을 솟구쳐 담에 뛰어 올라 달아났습니다.”
그들이 소지했다는 '창포검(菖蒲劒)'은 외관상 칼처럼 보이지 않아 비밀스럽게 지니고 다니기가 편했을 것이다. 쓰임새는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아 휘두르기보단 찌르기가 살상력이 있었을 것이다.

검계들이 사용했던 ‘창포검’의 예
18세기 검계의 구성원이었던 표철주(表鐵柱)는 소싯적에 “용감하고 날래며 인물을 잘 쳤으며, 날마다 기생을 끼고 몇 말의 술을 마시는 사람이어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인물은 기생을 옆구리에 끼고 담장을 뛰어 넘기도 했다하니 신기(神技)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칭하기를 ‘왈자’라 하였다.
(*왈짜는 춘향전의 남원고사나 연암 박지원의 ‘발승암기(髮僧菴記)’라는 글에도 나온다. 발승암은 머리를 기른 스님이란 뜻이다. 참고로 단재선생께선 검계가 조선중기 문신이었던 정여립의 설에 다소 영향을 받았다고 하셨다. 검계원은 아니지만 실학자인 이익은 황석영씨의 소설로 잘 알려진 ‘장길산에 대해 본래 창우(倡優, 광대)로서 곤두박질을 잘하는 자로 용맹스럽고 민첩하기가 비상했다 한다.)
위의 예들이 ‘조선잡기’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긴 한다. 그러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던가?” 19세기 조선의 무예는 궁술뿐 이었을까? 조선인의 기백이 참으로 죽어 있었을까? 혼마 규스케에게 묻고 싶은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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