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명 칼럼] ‘나’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품새에서 주체로서의 ‘나’
품새선 방향 기호는 ‘가’에서 ‘마’로 오행(五行) 과정이다. 그 중 ‘나’ 방향 기호는 의미가 깊다. 품새를 행하는 자의 시작점을 ‘나’위치(방향)라고 한다. ‘나’는 행하는 본인이 서 있는 곳이므로 ‘나’로 표시하고 ‘나’의 위치에 대해 앞 방향을 ‘가’로 표시한다. ‘나’는 하나는 위치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행하는 자, 즉 주체를 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품새선 상의 ‘나’의 함의는 두 가지가 가능하다. 하나는 시종(始終·시작과 끝)의 위치지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 즉 자기(self)를 함의하는 것이다. 도대체 ‘나’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 품새를 수련하기 위해 ‘나’위치에 들어서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이 화두를 붙들고 우리는 품새 수련 시 ‘나’를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닦음이요, 깨달음을 갈구하는 구도(求道)의 길이다. 하나의 품새를 두고 수백, 수천 번 반복하여 단련하는 의미가 여기에 있을 듯하다.
품새에서 ‘나’란 화두는 수련자의 마음가짐이 핵심이다. 바로 내가 ‘나’라는 개념의 정체성을 확고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남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철학자들이 이천 년이 훨씬 넘게 ‘자아’를 이야기했고, 보통 사람들도 누구나 자기 스스로를 지칭하는 의미로 ‘나’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저항의식을 지녔던 것이다. 그는 ‘나’라는 단어의 사용에 큰 어려움을 느꼈다.
그가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 “나는 일정하게 규정되고 그래서 다른 것과 명확하게 구별되는 불변적인 단위”가 아니었다. 인간의 뇌에 존재하는 것은 나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연구는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시도했으나 ‘나’ 즉 ‘자아’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실패했다. 자아는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었고, 상상에 불과하였다. 흄에 의하면 이러한 ‘나’에게 구원이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나’는 ‘모든 감각의 총집합’이라는 생각 정도였다.
심리학자들은 ‘나’라는 개념을 피하고, 그 대신에 ‘자기(self)’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자기’라는 개념에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결단을 내릴 때에 그 중심이 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독자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상으로서의 나(me)'와 대립되어 쌍을 이룰 때에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고 한다. ‘나’는 행동하는 주체이고, ‘대상으로서의 나’는 평가하는 주체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라는 개념을 선호하고 남과 다르다는 자기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나’란 남과 구분되는 정신성의 차이를 내세울 수 있다. 우주의 도처에는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는 생명의 흐름이 있다. 어디에서 생명이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 것인가는 인간의 의식에서 영원히 숨겨진 일종의 신비한 영역이다. 생명 그 자체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무한한 연속이다.
‘나’와 ‘남(他人)’을 아우르는 개념인 ‘인간’은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으며 또 무엇 때문에 태권도를 수련하는가? 태권도 품새 사상은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났으며(태극 품새), 자연은 바로 큰 변화의 흐름이 경계이고, 우리는 자연에서 고갈되지 않는 생명의 기운을 얻어 쓰고 있다.
‘나’란 자기를 말한다. 자기라는 것은 특정한 인간으로서의 나와 동일시되는 속성의 집합체이다. ‘나’자신이란 나의 신체이며, 나의 기억이며, 나의 성격이며, 나의 공포심이며, 나의 자질 등. 남의 눈과 나 자신의 눈에 나의 사람됨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비치는 모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인간은 자연과 둘이면서 하나가 되어, 생명 전체는 더욱 서로 융화하고 교섭할 수 있게 된다. 일관된 도(道) 안에서 내재하는 생명과 외재하는 환경은 서로 부드럽게 융화되어 조화를 이룬다. 나아가 인간의 본성은 천지의 창조적인 변화에 근본을 두고 다양한 특성과 중요한 사명을 지닌 다양한 형태의 정신적인 것이다.
우리는 정신적인 창조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품새를 수련하는 것이리라. 인간은 자신의 모든 잠재적인 정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연에서 얻은 그 생명을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완성해야 한다. 그 과정이 유단자용 태극인 품새를 두고 인간적 세계관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창조적 노력으로 완전한 이상적 경지에 올랐을 때 인간은 이상적인 완전한 인격, 즉 전인(全人)이라 불릴 것이다. 이상적인 인격은 인간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한 옹호이다. 태극인 품새는 인간과 인간 그 자신의 관계이다. 하나의 품새를 수백 번 수천 번 숙달해야 하는 어떠한 고난도 굳게 참고 견디어, 이를 극복하고 더욱 노력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창조적이기 때문이다.
위대함을 이룬다는 것은 곧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좁게는 품새를 고되게 숙달하고자 하는 단련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17단계의 품새는 “자연”이라는 환경 아래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도록 한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을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하늘이 명한 것을 본성이라고 하며, 본성에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화(敎化)라고 한다. 이럴진대 우리는 고귀한 인간성의 이름 아래 생명 이상을 완성하는 정신의 위대한 성취를 위해 ‘나’란 도대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란 선(禪)불교의 “이뭣고”라는 화두와 통하고,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친 소크라테스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품새 수행 중 “얏‘하고 외치는 기합은 결정적 순간에 “발성(소리)을 통해 호흡을 조절하고, 정신을 집중하여 흐트러진 얼(기)을 바로 잡아 주는 외침인 데 그것은 형이상학적 의미로 불교에서의 ‘할’ 즉 가르침을 위해 꾸짖는 소리와 같다. 그 소리를 통해 기합을 넣는 스스로가 놀라 ‘참나’ ‘깨달음’을 얻는 방법과 같다.
품새에서 위치설정으로서의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주고, 체험주체로서의 ’나‘는 나의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인상과 나의 내면에서 형성된 감정은 실제로 나에게 고유한 것으로, 남의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주체적이고 통제적인 ’나‘는 나의 사고와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는 남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명백하게 해주는 주체가 된다.

[글. 이경명 태권도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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