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이야기] 또 다른 탁견?
제목을 정하고 나니 궁하기 짝이 없다. 쓸래도 주변에서 얻어들은 얘기 한 토막이나 뭐, 그렇고 그런 자료들이니. 사실 필자가 조선이나 그 이전을 살아보지 않았으니, 깊이가 부족할 수밖에 없겠다. 또한, 글 중에 특정 종목을 비하할 의도는 없으나 ‘시박’이라는 것을 소개하려니 서로 연관되어 간략히 적시하고 넘어가겠다.
택견은 발로 차는 것이다. 상세하게는 ‘발로 차는 행위의 총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재물보(1798년)
정조 22년 이만영(李晩永)이라는 사람이 쓴 책(재물보)에 나오는 유명한 글이다. 재물보(1798년)변 수박위변 각력위무 고금지(卞 手搏爲卞 角力爲武 苦今之)탁견 “수박은 맨손으로 치는 것이고 힘을 겨루는 것을 무(武)라 하며 지금은 탁견이라고 한다”.이때의 탁견은 武에 상당하는 포괄적인 의미의 우리말이었다. 이후 언제부터인가 탁견(특징적인 동작을 가지지 않는)이 변한 듯한 태껸, 택견 등이 발길질로 인식되어 졌고 유독, 차기가 눈에 띄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우선, 택견 관련 증언 일부와 기사를 보도록 하자.
경향신문 1974년 12월 30일자(칼럼/논단) ‘바둑야화(357) 제58화 기인 김영식’의 제하로 김영식 노인은 젊었을 때 태껸을 했다고 한다. 그가 일지기 항일청년운동을 할 때에 삼각산 밑에서 지나가는 일본 무장 기마경찰을 날아가면서 발로 차서 마하(말 아래)로 떨어뜨린 경력이 있다는 것. 좌우간 83세의 노인인 그가 태껸시범을 보이면 구경하는 젊은 청년들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그는 몸이 날쌔었다. 김 노인과 젊은 기사는 여러 사람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바둑판을 밀쳐놓고 팔씨름을 벌였다. 누가 보나 나이가 많고 체구가 작은 김 노인이 맥도 못 추고 질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젊은 기사는 얼굴이 붉어지도록 힘을 썼으나 끝내 노인을 이기지 못하고 져 버렸다. 이에 주위에 둘러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김용식 옹은 송덕기 선생이 1893년생이셨다니 조금 연배 이 신듯 하다).
1960년 초, 북한의 민속학자인 계정희 교수가 개성에서 발굴한 택견도 기술명칭(원앙각이니 모두걸이니)으로 발질 위주였다고 유추할 수 있으며 "택견을 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나는 나무로 연습했다, 너는 무엇으로 했느냐? 하고 나는 짚으로 했다 하면, 나무로 연습 한 사람이 짚으로 연습한 사람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답니다. 나무로 연습한 사람은 상대를 차서 죽일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발로 차는 힘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운운’이라는 20년대 기사도 그러하다.
또 다른 탁견. 시박!

군위군에서 시연되는 박시놀이(경북 의성에서도 같은 것이 이어지고 있다
시박? 낯선 이름이다. 위의 재물보에 수박과 함께 소개되고 있는 조선 고유의 체술 이었다. 유의할 것은 재물보의 저자가 시박을 일컬어 "씨름의 일종인데 또한 탁견(역시 무술이다)이라고 정의한 점이며 재물보의 ‘탁견’은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탁견인 수박, 탁견인 택견(각희와 더불어) 탁견인 시박이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전승 되고 있다.
박(撲)은 치다는 말이고 시(厮)의 경우 ‘서로’의 뜻이다. 시박은 “서로 치는 것은 씨름의 일종인데 역(亦) 탁견”이라고 되어 있다. * 亦은 또한 이란 뜻의 어조사(語助辭)이다.
‘조선의 향토오락(1941)’, 무라야마 지준을 보면 "옆으로 게걸음을 하고 어쩌고저쩌고…. 박새라고 되어 있으나 구전의 경우는 ‘박시’이다. 지애 밟기와 함께 전해져 오는 경북 군위군의 오래된 무형문화라고하며, 말 그대로 군위군(軍威郡)의 군사(軍) 놀이였던 것이다.
경상북도 군위 지방-박시 정월에 농민들이 한다. 마을대항으로 양쪽마을에서 장정을 골라 처음에 갑 마을 사람이 을 마을에 가서 게걸음으로 걸으면서 "박시를 합시다"라고 외친다. 그러면 갑 마을 사람들이 이 을 마을 사람들을 내 쫓는다. 이로 인해 양군의 싸움이 시작되어 서로 밀고 당기고 한다. 이 광경은 장렬하며, 때로는 많은 부상자를 내기도 한다. 이 싸움에서 진 마을은 이긴 마을에 향연을 베풀고 논물도 먼저 끌어대 쓸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한다.
* 수박의 걸음에는 게걸음이 유일하다. 완력이 센 자를 박시라하고 머리꾼을 박수(搏手)라함도 연계가 있다. 힘에 의존하고 어깨(상체)로 밀어 치는 부분들도 그러하다.
‘애기 박시’를 싸우게 되고, 차츰 발전하여 ‘어른 박시’로 변한다.
앞장선 머리꾼이 적진의 중앙을 뚫고 헤쳐나가면, 전원이 힘껏 밀어 중앙을 관통해나간다. 이때 농악대도 뒤쫓아 관통해나가야 승리하게 된다. 이 싸움을 ‘골목 박시’라고 한다. 패한 쪽은 곧 다시 뭉쳐 이번에는 동부군 쪽으로 쳐들어간다. 동부군은 곧 회군하여 진지를 구성하고 적을 맞이한다. 이렇게 두 마을에서 한 번씩 싸우고, 이 싸움이 끝나면 대개 흥이 돋아지고 격하게 되어 신작로에서 패싸움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난장 박시’라 한다.
머리꾼이 팔짱을 낀 팔꿈치와 어깨로 밀고 들어가는 방법이 동채싸움·가마싸움·나무쇠싸움 등의 놀이와 비슷하여, 이들 사이에 전파 변용의 가능성도 추측된다. 박시놀이(성병희(成炳禧), 우리 고장의 민속(民俗), 경상배도, 1978)
명주수건으로 상투를 동여맨 청장년들이 서로 어깨를 밀며 놀았던 '박시놀이'는 팔을 풀거나 걷어찰 수 없는 것이 불문율로 단지 밀어젖히기만 해야 한다. '박시놀이'의 기원은 구전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300년 전으로 알려졌다.
군위군의 박시가 재물보의 시박인가? ‘조선어 사전(1938)’, 결련(結連)태껸; 갑동(甲洞)과 을동(乙洞)이 각각 편을 먹고 승부를 결하는 태껸이라고 되어 있다. 결련을 거꾸로 읽으면 있다, 이어서 ‘한다’라는 뜻인 ‘연결’이 된다. 박수치는 것이 수박이고 박시가 시박이란 말이다.
싸움을 발로 한다고?

구한말 기산 김준근의 “싸움하는 모양”(武인 탁견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AH 새비지-랜도어라는 외국인이 지은 책)에 보면 격투기라는 제하에 조선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광경 중의 하나는 일대일 격투기이다.
싸움꾼은 대체로 주먹을 이용해서 싸우나 프랑스처럼 무릎과 발을 사용하는 것도 허용되어 있다. 훈련도감의 군인은 직접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다. 비가 오는 날 힘든 파수를 서고 나면 자연히 술집에서 한잔들 하게 마련이었다. 형편없는 대우와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급료가 주 토론거리였으며 그 와중에 싸움도 벌어졌다. 군인들끼리 하는 싸움이라도 조선인 남자의 싸움은 머리채를 잡아끄는 것이 제일이었다.
그리고 한양을 비롯한 대도회지의 풍속 중에 석전(石戰)이 있었다. 돌멩이와 곤봉, 심지어 칼까지 사용하는 것이 석전이다. 이 석전에는 훈련도감군과 같이 무골이 있는 병사의 선두에서 활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보통 정월 대보름 기간에 동리나 계꾼끼리 석전을 하는데 싸움 중에 입은 상처로 근무를 못서거나 심하면 죽는 일도 있었다. 한 번 석전이 시작되면 성문을 닫는다는 대종이 울릴 때까지 천명 이상이 싸우는 것이라 장관이었다. 정월부터 15일간은 그야말로 석전의 연속이었는데, 포졸들은 관중을 보호하기만 할 뿐 개입하지를 않았다.
싸움은 멱살 잡고 주먹질하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싸울 때 발로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필자에게 수박을 배운 모 택견 이수자의 질문이다. “택견하던 사람들은 여럿인데 수박은 왜 송창렬 선생님뿐이죠?” 고당 조만식 선생께서 날파람을 하셨다는 활자화된 기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했어도 하지 않은 것이 되는가?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말이다. 장백에 거주하시는 선생님은 전승역사가 500년이라고 중국조선족무용관련 책자에 실려 있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