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USA 다이어리] 홍당무 사범님이 되어버린 '마스터 DJ'


모든 준비를 마치고, Peewee(아동), Junior(어린이), BBC(검은 띠 클럽), Adult(성인) 등 각 클래스(미국에서는 통상적으로 태권도 수업 시간을 이렇게 나누어 표현합니다)를 가르치기 위한 본격적인 연습에 착수했습니다.

연습 대상은 스무 살 ‘쟈니’라는 동생이었습니다. 첫 수업이 오후 3시 15분에 시작하는 까닭에 2시부터 그 친구와 1대 1 상황극이 시작되었죠. 실제 상황이라 생각하고 연습에 임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당황하지 않을 테니까요.

차렷, 국기에 대한 경례, 사범님께 경례, 두 주먹을 꽉 쥐고 측면에 붙이고, 발을 모으고, 시선은 정면을 향한다. 영어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Everybody attention, bow to flag say JONJUNG, bow to instructor say YEUI. Hand by your side. Hold your fist. Toes touching, Feet together. Eye focus, body focus, brain focus.” 이런 식이죠.

조금 길어 보이지 않습니까? 근데 이 두 줄짜리 문장을 막상 학생들 앞에서 한다고 생각해보죠. 어떨까요. 무지 긴장됩니다. 더듬거리면서 말하는 것은 그나마 잘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 ‘백지상태’가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이때 생각만 하면 아찔합니다.

이 외에도 “손을 모으고 팔굽혀 펴기 자세를 취한 다음, 다리를 벌려 스트레칭을 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주춤서기. 한 번 지르기, 두 번, 세 번, 네 번. 발차기 준비 한번, 두 번, 세 번. 목소리는 우렁차게” 등을 아주 부드럽게 소화해 내야 했죠. 바로 이 정도까지가 10분 정도의 준비 운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수련을 진행하는 영어 용어들은 너무도 다양하고 많습니다.

그런데 참 말이라는 게 쉽죠? 이렇게만 말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하지만, 문제는 “내가 하면 어렵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연습한 끝에 미국 수련생들 앞에 섰습니다. 차렷 경례를 차례로 외치고 인사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스트레칭으로 넘어갔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죠.

“어라 이거, 쉽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군요. 주춤서기, 발차기까지 아주 완벽한 연결이었습니다.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다고 했던가요. 내친김에 본 수업을 조금 가르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용기를 냈습니다. 그리고 쟈니와 저를 가르친 패트릭에게 눈치를 주고 저는 제가 가장 가운데 섰습니다. 각 수련생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면서 세 줄로 나누어 발차기 훈련을 시키려는 계획이었죠.

‘혹시나’의 걱정은 ‘역시나’라는 결과로 이어지더군요. 저 이외에 두 명의 보조사범에게 타깃을 들게 한 뒤에 평범한 돌려차기 시범을 보이면서 무릎을 올리고 상체를 비틀어서 다리를 펴 타깃을 맞춘 다음 편 다리를 접고 내려놓는다를 설명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머릿속에 한국말이 맴돌더군요. 영어는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약 10여 초를 애꿎은 몇 학생을 지적하면서 줄 맞추는 척하며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래도 생각이 안 나더군요. 이건 영어 실력이 아니라 전혀 쓰지 않던 영어 단어를 쓰는 데서 오는 혼란이었습니다. 얼굴이 불덩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워낙에 하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니 다들 눈치 챌 것이 뻔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도 보고, 쟈니와 패트릭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또 10여초가 지났습니다. 아, ‘적막’이라고 표현하면 맞을 겁니다.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던진 말,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마디, 그건 바로 한국말이었습니다. “무릎 올리고, 기합! 이 야 아 압!” 정말 말도 안 되는 영어죠? 아니 이건 100% 한국말이었습니다. 정말 부끄럽고 창피한 상황은 그다음이었습니다.

패트릭의 한 마디, “감사합니다. 마스터 DJ. 타깃 잡으세요.” 타깃을 잡으라고 당당히 지시했던 저로서는 학부모 앞에서 심한 모멸감을 느껴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번 구겨진 자존심이 빨리 되살아날 리 없겠죠.

시종 풀이 죽은 채로 타깃을 잡고 앵무새처럼 “Good job” 만을 외쳤습니다. 채팅사이트에서 강제 퇴출당하고, 회원 자격까지 박탈된 기분이랄까요. 과유불급의 전형적인 사례였죠.

수업이 끝났고, 학부모들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죠. 펑펑 울고 싶었지만, 세수를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또 한 번 되새겼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고, 꼭 해야 한다면 최고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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