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이야기] 평양박치기! 맛 좀 볼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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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대 선교사 이기풍 목사
조선시대 초대 선교사 이기풍 선생(1868년~ 평양)은 구한말의 평양거리를 주름잡던 소문난 건달(불량배)이었다. 잔칫집마다 찾아다니며 술과 떡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지르고 풍비박산을 만들기 일수였다. 어느 날은 대낮부터 술에 취해 활개를 치며 평양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그러던 중 말 타고 가던 높은 분(평양좌수)과 마주치게 되는데, 아니꼽다고 다리깨를 잡아채서 낙마시킨 죄로 목에다 칼을 쓰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또 있다. 모펫이란 분이 선교하는데, 친구들 함께 문을 부수고 난입해서 돌로 쳐 턱을 부스러지게 하는 등 한때 평양 건달로 유명세를 떨쳤다고 한다.
젊은 시절 박치기 명수로 아무도 그분을 당할 자가 없었다. 돌팔매질 또한 잘해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석전에서 대장을 맡기도 했다. 박치기? 중국 문헌인 ‘사기’, ‘술이기’ 등에 동이족의 체기(體技)로 치우희(蚩尤戱)란 것이 나온다.
‘소뿔을 쓰고 서로 막고 밀치는 놀이’로서 머리로 들이받기도 하던 것이다. ‘중국 무도사(舞蹈史)’에도 소개되고 있는 이 치우희는 검기무와 함께 무무(武舞)로서의 조종이며,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수박의 강력한 기술로서 현존하고 있다. “붙잡고 받아버리면 끝나!” 송창렬 옹의 말씀이다.

2004년 태릉선수촌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국회의원과 송준호 회장
2004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당시 필자는 태릉선수촌에서 모 대표 팀 트레이너 생활을 하던 때의 일이다. 유년시절 동경하던 김일 선생에 관한 책자화를 하고 싶은 마음에 운동이 없는 시간을 틈타 생전에 머무시던 곳을 찾아뵙고 관련 작업을 했던 적이 있다.
김일 선생(1929년생)의 박치기란 것은 고증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이었다. 생전에 가치 있는 무(武)의 전승자로서 연구, 정리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역도산 선생(김신락, 1925년생 일제강점기 함경도에서 도일 하셨음)께서 "너는 조선 놈이니 박치기를 해라!"며 "선생님께 배운 것이다"라고 확언하신 바 후에 기술을 응용하셨다 해도 그 맥을 인정할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
부언하여 "프로레슬링이 쇼라는데?"라는 짖궃은 질문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나는 한 번도 쇼를 해 본 적이 없고, 내 제자들에게 가르친 적도 없다"고 말이다.
아! 날파람
박치기를 주된 기술로 사용하던 민중 무술에 '날파람'이란 것이 있었다. 박치기의 속어로는 대갈받침이 있다. 날파람의 사전적 정의는 ‘바람이 일 정도로 날쌔게 움직이는 것(북한어)’이다. 날파람 꾼은 이와 같은 사람을 지칭한다.

1935년, 좌측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선생
[사진설명 : 1935년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선생. 조만식 선생의 청년학도시대. *조선일보 1938년 1월 6일자]
“조만식 선생의 소년시대 내지 초기의 청년시대에는 싸움과 날파람을 잘하고, 담배와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했고, 화류향에서도 장수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싸움판에서나 날파람터에서는 물론 석전판에서도 선생의 그림자가 한 모퉁이에서 나타나면 마치 솔개가 지나간 뒤에 병아리들이 조용해진 듯한 감이 없지 않아...” 그 당시 선생의 존재는 일반에게 공포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북한에서는 날파람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손과 발, 머리를 비롯한 온몸이 그대로 공격과 방어수단으로 되어 있는 날파람은 우리민족의 정통무술인 수박과 택견의 기술에 머리받기, 어깨받기, 몸동작 등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공격할 때 상대방의 몸을 잡을 수도 있고 손으로 치고 발로 걷어찰 수도 있다. 특히, 머리까지 쓰는 힘을 다한 특기가 있다. 그러므로 날파람은 온몸을 모두 쓰는 다방면적이며, 종합적인 무술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근대초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에서 부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근대시기에는 평양날파람이라고 하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무술로 알려졌었다. 평양지방에서 근대시기에 진행된 날파람은 남문 앞과 남문 밖, 관문 앞(종로거리)등에서 일정한 지역으로 나뉘어 경기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소년들이 나와 진행하였는데, 지는 편에선 대신 좀 더 큰 사람이 나서고 이렇게 하여 마지막에는 청장년들의 경기로 끝을 맺곤 했다. 날파람은 경기로 진행할 때에는 어떠한 도구(물건)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날파람에 관한 증언으로는 ‘평양 시가지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동네 패싸움 같은 것’ 또는 ‘처음에는 석전으로 시작하지만 그대로 투석전이 되었다. 서로 맞부딪쳐 육박전을 벌이게 되는 등’이라하여 내용이 일관되지 못한 듯하나 결국, 정리하면 날파람은 평양의 남문 밖에서 진행되던 단오씨름과 거의 흡사한 형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애기씨름에서 청장년으로 행위의 주체가 변하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경기를 치렀던 것이다. 패싸움, 석전 과정에서의 육박전 등은 상황에 따라 응용된 모습이라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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