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명 칼럼] 도와 하나됨은 품새적 가치의 재발견
도와 하나(한)라는 글자의 의미는 형이하에서부터 형이상의 범주에 이른다. 도(道)자는 원래“하나로 이른 것을 도라고 한다(一道謂之道)” 라는 의미다. 은·주 시기에 도자가 생겨나고, 도의 관념이 형성되었으며, 도의 범주가 싹트기 시작했다.
동양의 철학은 태초에 ‘도’가 있었다. 그 도를 통해 모든 ‘있음과 없음’의 관계가 설정되고 천지만물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있음의 한자는 유(有)이고 없음은 무(無)이다.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유와 무가 아니고 형이상적 의미로 풀이되는 의미너머의 경계이다.
하나에 대해 ‘도덕경’ 제42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이하 생략).
여기서 우리는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만물이 생성되는 과정 즉 우주 생성론(生成論)부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적인 무, 절대적인 비존재로서의 ‘도’에서 모든 존재의 시초요 근원인 ‘하나’가 나왔다. 이 하나에서 음과 양이 나왔고 음과 양은 음기와 양기로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 제3의 힘이 된다.
하나란 모든 근원으로서의 도, 모든 존재를 뜻하는 힘으로서의 도를 말한다. 하나와 도는 완전한 동의어는 아니다. '도덕경‘에 따르면, 하나는 도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는 비존재로서의 도에 대응하는 존재의 측면으로서의 도, 비존재와 존재가 맞닿는 경계의 자리로서의 도라 할 수 있다. 신유학의 용어에 따르면, 하나란 무극(無極)에 대응하는 태극(太極)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있음(有)의 개념이라면 도는 없음(無)의 개념이다. 하나는 일(一)이라면 도는 무(0), 즉 1과 0의 개념이다. ‘태극도설’에서 ‘태극은 원래 무극’이라 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경에서 말하는 하나도 태초부터 비존재로서의 도와 함께 있었다.
단 현존하는 모든 것이 이 하나를 통해 이루어졌고, 그런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도의 근본 자리는 결국 없음(無)의 세계이다. 그러나 도는 그 자체 형상이 없고 모양도 없지만 모든 형상, 모든 모양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자체, 모양 자체라 할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 있음(有)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해 그것들의 근원되는 비존재, 무의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태극(太極)개념은 태권도人에게는 낯설지 않을 듯하다. 사람됨의 길을 인도하는 품새의 첫 단원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존재, 즉 있음을 일깨우는 생명적 자연관이 품새 태극의 사상이다. 그것을 체화 · 체인하려는 닦음의 척도가 중시되는 것이다.
태극으로부터 시작되는 품새는 일여로 끝난다. 태극(=도)에서 일여(=하나)로 수련의 완성은 “도와 하나가 되다 ”라는 구도가 성립된다. 도(=천)를 일관되게 닦는 인(人)으로 ‘천인합일’이 목표이다. 여기서 천(天)이란 ‘자연’이다. 자연의 신비로운 질서는 인간을 압도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절대적 권위로서 모든 가치와 의미의 근원이다.
그러기에 ‘중용(中庸)’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른다. “자연의 영원한 질서는 하늘의 길이고, 그 길을 본받는 것은 인간의 길이다(성자천지도 성지자인지도 誠者天之道 誠之者人之道).
품새 태극으로부터 일여에 이르는, 곧 도와 하나 되는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다. 17단계의 심사과정을 거쳐야 하는 데, 그 조건은 도전과 성취라는 과정성 · 반복성이라는 닦음의 인내심이 요구된다. 그 같은 인고의 과정에서 우리는 태권도 정신을 체득하게 된다.
부분의 전체에 대한 협력은 도덕이라 한다면, 우리는 도덕을 자발적 충동으로서, 그리하여 천인합일을 언제나 궁극적 자기실현으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Thales; B.C. 640~550)는 만물의 근원 혹은 생성 원리를 단 한 가지, 즉 물〔水〕로 보았다. 탈레스는 하나(一)로써 여럿(多)을 설명한 것이다. 모든 사물의 최초의 원리는 하나이다. 태권도 동작 원리는 하나에서 비롯된다. 물의 원리에 따르는 듯 그것은 물의 유연성과 기(氣)적 흐름이 도 자체라 할 것이다.
나〔自我〕는 인간이라는 보편자로서의 개별자, 즉 일자(一者) 존재이다. 내 한 몸의 일거일동(一擧一動)에서 태권도의 기술체계가 이뤄진다. 하나(一)로써 여럿(多)의 (동작)설명이 가능하다. 하나(一)의 동작은 여럿(多)이 하나로 뭉쳐서 기를 드러내는 기법이다. 그 중심은 나 즉 일자(一者) 존재에 말미암는다.
품새에서 ‘나’ 방향과 나〔自我〕는 동의어이다. 하지만 본질과 현상적 차이를 나타낸다. 나는 품새선 상의 동작군(群)을 체현(體現)하고 꼭 ‘나’ 위치에 회귀해야 하는 까닭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다음 편에서는 태권도, 그 본질과 현상, 그리고 존재의 세계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글. 이경명 태권도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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