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태권도의 '도(道)'가 있었다
6월 3일 오전 8시. 난 머물고 있던 LA라마다 호텔 로비에 있었다. 대회가 열리는 CBS스튜디오로 가는 차량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CBS스튜디오로 가는 차량은 이미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사범들 만을 태운 채 사라지고 난 뒤였다. 미국 캘리포니아는 대중 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택시를 대절하지 않고는 혼자 대회가 열리는 CBS스튜디오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난 호텔 로비에서 대회 관계자가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 때 "CBS스튜디오를 어떻게 갑니까?" 뒤를 돌아보니 한 손에 운동가방을 든 한 미국인이 서 있었다. 태권도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내게 한 미국인이 CBS스튜디오로 가는 길을 물어 본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내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저도 그 곳에 가려고 하지만 차도 없고 길도 몰라 그냥 이렇게 다른 사람이 저를 태우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행이 옆에서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이 CBS스튜디오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내게 길을 물어 본 미국인은 나에게 CBS스튜디오까지 태워 주겠다고 했고 난 그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우리는 CBS스튜디오로 가는 동안 서로 통성명을 하고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네바다주에서 왔으며 이름은 스티브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CBS컵 국제태권도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전날 장시간 동안 캘리포니아까지 운전해 왔다고 한다.
"아, 시합에 늦으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흥분되지? 내가 시합에 나가게 되다니..."
그는 흥분해 있었다. 마치 소풍을 하루 앞두고 잠을 못 이루는 어린 아이처럼... 정갈하게 기른 그의 콧수염이 왠지 귀여워 보였다.
그는 이제 태권도를 시작한지 4개월째라고 한다. 그래서 국제라는 이름이 붙은 큰 대회에 나가는 것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를 더욱 흥분시키는 것은 따로 있었다.
"대회에 성룡, 스티븐 시걸 등 스타들이 참석한다는 데 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한 번도 검은 띠들의 경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도장에서 운동하는 빨간 띠들의 실력도 대단한데 검은 띠들이 벌이는 경기가 어떨지 정말로 기대가 됩니다. 와! 정말로 멋진 경기가 될 것입니다."그는 모르는 길을 운전하면서도 처음 만나는 나에게 쉴새 없이 말을 건넸다. 아마도 내가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이 그에게 친근감을 주었나 보다. 난 스티브에게 태권도가 왜 좋으냐고 물었다.
"그냥 좋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자기 나름대로의 태권도 철학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태권도는 예의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예의. 그리고 자신을 끊임없이 개발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어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 사고(?)쳐서 부모님에게 맞았던 얘기, 그러고 나서 부모님과 더 가까워졌다는 얘기 등. 하지만 그는 이제 자식이 잘못해서 부모가 자식을 때리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는 시대가 왔다면서 흥분했다. 이럴수가 있냐고...
"하지만 태권도는 다릅니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혼 내키고 그 아이들을 바로 잡아 줍니다.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태권도입니다."
스티브는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태권도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오전 8시 40분. 우리는 어느덧 경기가 열리는 CBS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경기시간 8시 30분보다 10분 늦은 것이다. 덕분에 스티브는 지각 벌금으로 10불을 내야 했다.
그러나 무사히 접수를 마친 스티브는 접수표를 흔들어 보이며 기뻐했다. 기대하고 또 기대하던 경기에 무사히 참가할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그리고 그는 나에게 고개 숙여 작별 인사한 뒤 경기장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이 후 난 스티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일찍 떨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한동안 나의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처음 만나고 헤어질 때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하던 모습, 말할 때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는 모습 등.
그와의 짧은 만남은 나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난 갑자기 한국의 태권도가 무도의 의미를 점점 잃어 가고 있는 현실이 부끄러웠다.
스티브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만들었고 또 한편으로 그런 사실이 당황스럽게도 만들었다. 우리는 스티브에게 태권도 기술을 가르칠 수 있지만 우리는 스티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스티브는 태권도 초짜였지만 그에게는 태권도인으로서의 도(道)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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