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황창랑과 본국검(하)
본국검(本國劍)의 기원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황창랑(黃倡郞)과 관창을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말 조선초 문인 이첨(李詹, 1345~1405)은 그의 문집인 ‘쌍매당집(雙梅堂集)’에서 “청랑(淸郞)이 아니라, 기실은 관창이 와전된 것이다”라고 했다. 황창랑 이야기가 황산벌에서 백제와 신라의 국운을 건 싸움에서 계백에게 죽은 관창의 이야기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황창은 황창(黃昌)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편찬한 ‘임하필기(林下筆記)’의 해동악부(海東樂府) 황창랑무(黃昌郞舞)조를 보면,
관창이 황창랑으로 와전된 것인데
역사에서 격검장(擊劍場)을 근거를 찾을 수 없네
여덟 살의 애꾸눈 아이[?童] 보복을 계획하여
술 단지 앞에서 부여왕(夫餘王)을 깜짝 놀라게 했네.
라는 시가 있다.
본국검(속칭 신검(新劍)이라 한다) ‘여지승람(與地勝覽)’에 말하기를 황창랑(黃倡郞)은 신라인이다. 속설에 나이 7세에 백제에 들어가서 시중에서 칼춤을 추었는데, 이를 구경하는 사람이 담을 이룬 것 같았다. 백제의 임금이 이 이야기를 듣고 불러서 칼춤을 추도록 명하였다. 창랑이 이 기회를 타서 왕을 찔렀다. 그러자 (분노한) 백제 사람들이 창랑을 죽였다. 신라인들이 이를 애통하게 여겨서 그 얼굴 모양을 본 뜬 탈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다. 지금도 그 춤이 전한다. 또 신라는 왜국(倭國)과 이웃하고 있으므로, 그 칼춤이 반드시 전해졌을 것이나 밝혀낼 수가 없다. 이제 황창랑을 우리나라 검술의 시초로 삼고자 한다.
7살 먹은 황창이 백제에 들어가 백제왕을 찌르고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동경잡기(東京雜記)’ 풍속 ‘검무지희(劍舞之戱)’조에도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첨의 ‘쌍매당집(雙梅堂集)’에는 을축년 즉, 1385년 겨울에 칼춤을 추는 동자를 경주에 가서 보게 되었고, 이 동자로부터 황창랑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7~8세의 소년이 아무리 검술에 능하다 해도 적국의 임금을 암살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조금은 허황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이첨의 언급을 통해,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 지역에선 검무가 오랜 시간 동안 전승되고 있었음은 알 수 있다. 경주지역의 검무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전승되고 있었음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황창랑이라는 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기 저 사람 아직 어린애
몸은 아직 석자도 못되는데, 어찌 그리 씩씩한가
평생에 왕기(汪錡)가 바로 나의 스승이라.
나라 위해 설욕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네.
목에 칼을 대어도 다리 안 떨리고
칼이 심장 가리켜도 눈 아니 흔들리네.
공을 이루자 춤추고 사라지니
산을 끼고 북해(北海)라도 뛰어넘을 듯하다.
‘현종실록’ 현종 5년(1644) 6월 임인조를 보면, 예전에 효종(孝宗)이 후원(後苑)에서 무예 재주를 시험했을 때, 이상진(李尙眞)이 임금이 너무 가까운 곳에서 관람하는 것은 위험하니 불가하다. 그 예로 황창랑의 검무 일화를 인용하면서, 가까이에서 관람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혹시나 있을 임금의 위험을 막기 위해 황창랑의 이야기를 그 근거로 이용했다면, 황창랑 이야기는 당시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음을 말해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다산시문집’의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이라는 시에서 “서라벌의 여악(女樂)은 동토(東土) 으뜸인데, 황창무보(黃昌舞譜)는 예로부터 전해오네”라고 했다. 그리하여 경주지역에 황창무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만큼 황창랑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창과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 할까. 황창은 공식적인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실제로 7~8세의 소년이 아무리 검술에 능한 들 한 나라의 왕을 암살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황창랑의 존재가 명확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런 점을 고려한 이첨은 역사서에서 황창의 존재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신라의 젊은 소년이 계백이라는 적의 우두머리를 살해하려고 한 관창의 사례를 보고, 동일인으로 이해하려 한 것 같다.
하지만 황창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직접적인 무력 충돌기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반면, 관창은 전쟁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황창은 임금이 직접 불러 보려한 반면, 관창은 자신이 계백을 죽이기 위해 백제 진영으로 침입했다는 점에서 이야기 구조가 사뭇 다르다. 아울러 황창은 시체를 찾을 수 없었지만, 관창은 적장인 계백이 신체의 일부를 돌려보냈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큰 틀이 차이 난다.
또한 앞서 언급한 ‘삼국사기’에는 관창이 활을 잘 쏘고, 단창을 잡고 백제의 진영에 돌격했다고 하고 있다. 이에 말 위에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창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도 만약을 대비해 칼도 휴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사실이 관창이 검술에 능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검술에 능한 황창과 관창을 동일인으로 단정짓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이고, 실제로 동일인일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이들은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본국검의 시초로 황창랑을 선택하였다. 무예서 편찬자들이 실제로 신라의 황창랑이 본국검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기보다는 본국검이 조선에 전래되어 오는 검법으로 그 시초가 외국에 있지 않으며, 조선에도 전통적인 검법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싶었던 탓에 황창랑을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즉, 본국검과 황창랑을 연결하려는 무예서 편찬자들의 태도는 그들의 염원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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