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창시자라고 자처하는 최홍희는 왜 역사를 날조했을까?
한민족의 국기인 태권도는 언제 어떻게 발생하였는가라는 화두는 아직도 풀지 못한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적 무예로서 그 역사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태권도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함께 그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태권도의 형태가 수박, 권법, 택견 등으로 불리워 오던 그 기술체계의 전통적인 맥을 직접적으로 이어왔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태권도 현상의 내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태권도>의 명칭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제정되었을까?
"1945년 해방을 계기로 정칭(正稱)을 찾고자 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 되어오던 중 드디어 1955년 사계에 조예 있는 인사와 사학자들로 구성된 명칭제정회의에서 제의된 여러 가지 명칭 중 저자가 제안한 태권 두 자가 만장일치로 채택 되여 금일의 태권도로 된 것이다.
이 명칭이 채택된 이유는
1. 고래로부터 내려오던 태껸이라는 이름을 연결시킬 수 있었고
2. 손보다 발을 더 많이 쓰는 이 무도의 성격자체를 나타내는데 적합한 글자이기 때문이다.
최홍희는 여러 문헌에서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또 다른 하나의 기록을 인용해 보자.
"연이나 사적, 술적 견지에 부합하는 명칭을 선택함에는 적지 않은 애로와 암운이 가로막혀 있던 차, 마침내 보병 29사단 창립 1주년 기념식전에 이 대통령(이승만 지칭)각하 임석의 영예를 갖게 되었다", "이 늠름하고 희망에 가득한 용사들의 믿음직하고 씩씩한 연무를 본 이대통령 각하께서는 태껸이 좋아! 남북통일 하는데 이것이 필요해 하시면서 절찬하셨다.
이 말씀에서 새로운 용기와 특별한 힌트를 얻고 필자는 본격적인 연구를 거듭한 끝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면서 널리 불리워 지고 있는 태권 이자(二字)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어 이 이자는 1955년에 개최된 사도 명칭제정회의에 다른 명칭과 함께 상정되었든 바 태권이 만장일치 채택되었던 것이다."(태권도교본 최홍희 성화문화사 1967:33)
명칭제정위원회 ; 유하청(미창사장), 손덕성(청도관장), 최홍희(3관구사령관), 이형근(합참의장), 조경구(국회부회장), 정대천(국회의원), 한창환(정치신문사사장), 장경록(정치신문 주간), 홍순호(공익통상 사장), 현종명(청도관 사범), 고광래(본사 주간)이상 11명이다.
여기서 고광래의 직위인 본사주간이라는 본사는 동아일보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홍희는 어느 신문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실이 없으나, 이에 대한 근거는 김명수의 박사학위논문(1992) 태권도의 스포츠제도화 과정에 관한 연구에서 동아일보 1955. 4. 11라는 기록이 145 및 232쪽에 두 번 나온다.
이 역사적 태권 두 자의 제정과정이 왜 허구이며 날조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자.
먼저 독자의 양해를 바라 건데, 위 내용과 관련 사진 및 신문기사를 여기 전재하지 못한 점인데 관련 문헌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최홍희의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는 관련 사진이란 명칭제정위의 사진인데, 그 사진에 적힌 기록은 4288. 12. 19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로 명시돼 있다.
단기 4288년은 서기 1955년에 해당되니 1955. 4. 11 과 상충하고 사진 옆 신문기사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여기 옮겨 본다.
유 사장 : 최 소장이 제출한 명칭을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명칭을 개명 공포한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니 만치 즉석에서 결정한다기보다는 이에 대한 사적고찰과 학리적 연구가 필요하니 일단 이에 대하여 한국 사학가들한테 의뢰하여 빠른 시일 내에 최 소장 제출명의 사적고찰을 마치고 그 기간에 각자 더욱 좋은 명칭이 있으면 제출하여 몇 개의 명칭을 첨부해서 대통령 각하의 재가를 얻어 공포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 부의장 : 결의사항으로 사적증거를 수집하기 위하여 3인 소위원회를 결성하고 학적 자료수집은 3인 위원회에서 금년 12월 31일까지 완료하여 학적 증거 사실을 각 고문에 개별적 통지를 한 다음 각 고문은 이 통지를 접한 후 1주일 내에 그에 대한 회답과 이대통령 각하의 재가를 얻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기사내용과 사진의 일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사진에는 1955. 12. 19이라고 적혀 있어 1955. 4. 11이 아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19일은 단지 청도관 제1회 고문회 모임에 불과하고 또한 명칭제정위에는 사학자는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최홍희는 명칭제정위회의를 모 요정에서 가졌다고 하는데, 그와 같이 중요한 회의를 요정에서 갖게 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태권도와 나 1. 사람다움 1997:344)
이는 최홍의가 태권명칭을 공론화하기 위한 청도관 고문회를 이용, 요정에 초대 한판의 술자리에서 모의한 술수에 불과하다. 위 내용이 결정적으로 허구이며 날조라는 사실은 1955. 4. 11동아일보 기사가 단서이다.
동아일보사는 1955. 3. 18∼4. 17 1개월간 한미석유협정에 관한 오보로 정부로부터 정간처분 당해 신문을 발행할 수 없었다.근간 필자는 두 차례 동아일보사를 방문 마이크로필름과 동아일보색인을 검색한 결과, 날조라는 것을 확인했다.
태권도 창시자라고 자처하는 최홍희는 왜 역사를 날조했을까?
필자는 누구보다도 그가 태권도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1965년 8월 5일 태권도 개칭의 주역이라는 행적을 상기할 때 그는 결코 후나고시가 1920년대에 당수를 공수로 개명한 역사적 전철을 답습하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기를 바란다.
한편「국기태권도교본」(국기원 1987:32)에서는 "점차 수련생이 늘고 도장간의 교류가 이루어지자 1954년에 명칭을 태권도로 통일하고 그 후 1961년 9월 16일에는 태권도협회의 명칭을 대한태수도협회로 개칭하였다가 1965년 8월 5일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 밝히고 있는데, 태수도는 협회가 구성되면서 새로이 제정된 명칭이지 태권도에서 개칭된 명칭이 아니다.
최홍희는 이를 의식한 듯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이전에는 결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아직도 태권도역사에 대한 구구한 설로 인한 오류에서 공사는 물론 여러 문헌에서도 잘못 인용돼 혼돈의 세계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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