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연재

[허인욱의 무인이야기] 본국검의 시초(?)-관창과 황창랑(상)

관창의 순국


신라인 김관창(金官昌, 645~660)은 ‘관장(官狀)’이라고도 부르는데, 장군 김품일(金品日, ?~?)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참고해 관창에 대해 알아보면, 관창의 겉모습은 우아하였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잘하였으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에 능했다고 한다. 어떤 대감(大監)이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태종(太宗) 김춘추(金春秋, 602~661)에게 천거해서, 660년에 당나라 장수와 함께 백제를 공격할 때 부장(副將)으로 삼게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16살이었다.

660년 7월 9일, 지금의 논산군 연산면인 여산(麗山) 들에 이르러 양쪽의 군사가 서로 대치하였다. 하지만, 김유신이 이끄는 4만의 신라군은 계백이 이끄는 5천의 백제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전세가 백제군에게 유리하게 흘렀다. 이를 뒤집기 위해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金欽純, ?~?)은 아들 김반굴(金盤屈, ?~660)에게 “신하 노릇을 하기에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위태한 것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를 모두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니, 반굴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말을 달려 백제 진영으로 가서 싸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 모습을 본 좌장군 김품일도 자신의 아들 관창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네 나이가 비록 16살이지만, 그 뜻과 기백이 용맹하니 오늘 싸움에 있어 네가 능히 3군의 모범이 되겠느냐?”라고 물었다. 관창 또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단창(短槍)을 들고 백제 진영에 달려들어갔다. 관창은 백제병사 몇 명을 죽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백제 진영에 끌려간 관창은 백제 원수 계백의 앞에 서게 되었다. 갑옷을 해체 당한 채 사로 잡혀 온 관창의 모습을 본 계백은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맹한 것을 장하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신라를 대적할 수가 없구나. 오히려 소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사에 있어서야”라고 탄식하면서, 관창을 보내 주었다. 계백은 너무 어린 나이의 관창을 보고 차마 죽이지 못했던 듯 한데, 전쟁에 나서기 전 자신이 죽이고 온 아들의 모습을 관창에게서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관창돌진

계백의 아량으로 살아 돌아 온 관창은 아버지 김품일에게 “제가 적진에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기도 뺏어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닙니다. 두 번 째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마치자 우물물을 손으로 떠서 마신 후 다시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날쌔게 싸웠다. 하지만, 결국 다시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계백도 두 번째이고 백제군의 사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관창을 살려보낼 수는 없었다. 계백은 그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붙들어 맨 후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김품일은 아들 관창의 머리를 잡고 소매를 피를 닦으면서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을 때와 같구나. 나라 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신라의 3군이 이를 보고 모두 비분강개하여 다 죽기를 결심하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군사가 대패하였다.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商)?상영(常永) 등은 사로잡히고 말았다.

관창의 얘기를 들은 신라 태종무열왕은 그에게 6두품 이상만이 오를 수 있는 제9관등의 급찬(級飡)으로 올려주고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관창의 집에는 당견 30필과 20승 포 30필 및 양곡 100석을 장례비용으로 보내주었다.

현재 논산시 연산면 북쪽 3리 황산성(일명 성황산석성(城隍山石城))의 동쪽 산자락에는 관동(官洞)이라는 산골짜기가 있는데, 관창이 이 곳에서 죽었다고 전한다. 그가 죽은 이 곳이 이후 ‘관창골(官昌洞)’로 불렸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창’이 생략되어 ‘관골’로, 다시 현재에 와서는 ‘관동’이 되었다고 한다. 관창과 관련해서는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의 금성사와 관련된 설화도 전한다. 백제와 전쟁을 위해 신라군이 황산벌로 출정하는 가운데, 부용리의 부용산 골짜기 ‘중갱이골’에서 야영을 했으며, 아들 관창을 잃은 김품일이 돌아올 때 다시 ‘중갱이골’을 지나다가 관창의 명복을 비는 마음에 이 곳에 절을 짓고 ‘품일’과 ‘관창’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품관사(品官寺)’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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