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명 칼럼] 최홍희와 국부의 ‘태권도 우남’ 휘호 (2)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1875~1965)은 서예에도 경지에 이른다. 그것을 증빙하는 대목에서 故 최홍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다음날부터 오도관에다 태권도의 새 이름을 쓰라고 지시하고 직접 경무대 서장실에 연락하여 한자로 ‘跆拳道’라고 쓴 이 대통령의 휘호를 요청했다. 그런데 2, 3일 후 나의 기대와는 달리 경호 대장으로부터 ‘대통령 각하께서 한글로 택견이라 쓰시겠답니다’하는 전화가 왔다.” “나는 본의 아닌 아첨으로 ‘여보, 대통령께서는 온 세상이 다 아는 명필이신데 한자로 쓰셔야 예술미와 실력이 그대로 나타나 만고에 빛나지, 한글로 쓰시면 그렇지 못하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한자로 쓰시도록 잘 말씀드려 주오’ 했다. 그러나 며칠 후 경무대에서 온 연락은 역시 한글로 써 주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속담에 ‘먹은 소 똥눈다’고 내가 원하는 태권도(跆拳道) 세 글자를 받아 내는데 성공했다. 이 휘호가 발표됨으로써 태권도는 누구의 모략도 받을 수 없이 공식 명칭으로
떳떳이 사용되었다”(『태권도와 나』 I, 회고록 1997:346).
두 차례 대통령에게 ‘태권도’ 휘호를 요청한 날은 1956년 1월 중이었다. 최홍희는 언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한자로 쓴 ‘태권도 우남’이라는 휘호가 내려졌는지 자신의 그 많은 어느 저서에서도 밝히지 않고, 아니 정확히 말해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가 주창하는 ‘跆拳道 雩南’(태권도 우남) 휘호! 그는 단 한 번 ‘태권도교본(1959)’에 ‘우남’ 형과 함께 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1960년 발간된 ‘태권도교본’ 재판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책마저 정보기관에서 회수되는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나는, 그의 전 3권의 회고록 등에서도 휘호를 게재하지 못한 것은 진정성을 의심받게 한다. 또 다른 하나는, ‘휘호’에 낙관이 없다는 것이 더욱 신빙성을 희박하게 하는 것이다. 그 중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행위에 대통령이 휘호에 낙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작이라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다른 작품에는 단지 ‘우남’이라는 호만 적고 있는 경우도 있되 반드시 낙관을 빠트리지 않고 있다. 태권도의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는 그 ‘휘호’는 누가 보관하고 있다는 것일까? 그는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그(휘호) 작품을 사무실에 뒀는데 없어졌다 고 했다.
국부의 휘호가 결코 내려지지 않았다는 결정적 사건의 전말(顚末)은 이러하다. 앞서 ‘태권도’ 휘호 요청에 두 번씩이나 거절당하고, 1956년 1월 30일 소위원회 3인이 최종적으로 경무대를 방문하기로 한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랄까! 그날 새벽에 김창용 특무대장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3인(소위원회)이 직접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방문, 면담을 요청하고자 한 시도는 결국 수포가 된다. 이후 최홍희는 경무대와의 접촉 시도를 포기하고 군에서 독자적으로 ‘태권도’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보급하게 되었다.
김창용 특무대장 저격사건은 그 다음해인 1957년 9월 22일 허태영 등 범인 4명(신초식, 송용고, 이유희)이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짐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태권도의 어제와 오늘’, 어문각, 2002).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의 ‘태권도’ 재가마저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적이라는 증빙은 한참 뒤에야 밝혀졌다. 1959년 9월 14일자로 ‘공수도 창무관 전국도장’ 명의로 일선 도장에 내려 보낸 이 공문은 ‘대한체육회 가입 결정에 관한 건’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당시 무술단체들은 통일된 단체에 쓸 무술명(名)에 대해 한자 태권도와 한글 택껸을 놓고 토론했으니, 결론을 내지 못하자 그해 9월 당시 문교부장관이 국무회의를 마친 후 대통령에게 문의한 결과 한자 ‘跆拳’이라고 확인함에 따라 ‘태권’으로 결정됐다(부산일보, 2009.01.19).위의 기록은 1959년 9월 3일 대한태권도협회(KTA)를 창립하는 과정에서 창무관에서 최홍희가 주장하는 ‘태권’ 명칭 관련을 '택견과 태권도 중' 어느 것인가의 진위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사실로 밝혀진 것이지 1956년 '이 대통령의 재가' 진위와는 무관한 것이다.
“跆拳道 雩南” 이라 쓴 휘호의 사본이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김호재 사무실(서울 장충동)에 휘호액자가 걸려 있고, 태권도 관련 책에서는 '태권도의 역사철학적 탐구(2007)'와 '글로벌 태권도(2008)' 등에서도 대할 수 있다.
최홍희가 ‘태권’ 무도개명에 기여한 공로는 물론 그의 생애가 바로 태권도적 삶이었듯이 태권도의 발전에 큰 공적을 남겼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누구도 부인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의 일생은 무인(武人)이었으면서도, 태권도사에서 지울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난 3월 세계태권도연맹(조정원 총재, WTF)의 초청으로 고국을 방문한 재미 원로 남태희(84)는 태권도 미디어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최홍희와의 관계로 인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도로 그쳤을 뿐일 듯싶다.
역사의 기록이란 원래 진실과 거짓이 난무하는 법이라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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