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KAS IN USA] '날아다니는 귀신' 조상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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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태권도의 개척자 조상민(70) 사범은 현재 세계태권도연맹(WTF)과 국제태권도연맹(ITF)의 한 가운데에서 태권도의 통합과 발전이라는 대의 명제를 수행하고 있다. 혹자는 그를 두고 국제태권도연맹(ITF)이네, 세계태권도연맹(WTF)이네 라며 묻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태권도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라며 소신을 밝힌다. 브라질 백과사전에 수록된 ‘브라질 태권도는 대한민국 태권도 6단 조상민이 최초로 보급했다’는 내용이 바로 조상민 인생의 축약판이다.

조상민 사범
- 조상민과 태권도의 만남은?“17살부터 친구와 동네에서 복싱을 수련했습니다. 같이 운동을 하던 그 친구는 너무 강했습니다. 오기가 발동했죠. 그 친구를 이기기 위해서는 손이 아닌 발이 필요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수도를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역전에 성공했죠. 손이 발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웃음). 군 제대 이후, 청도관에서 운동을 하다 1963년도에 서울 청룡관 사범으로 취업을 했습니다. 이후 진무관 관장을 하기도 했죠. 친구를 이기려고 배운 태권도가 저의 평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 ITF와의 인연은?
“당시 미 8군에서 태권도 시범을 할 때였습니다. 최홍희 총재가 저의 시범을 보고는 따로 불렀습니다. 당시 최 총재가 ‘자네, 참 운동하는 것이 민첩하네, 잘하네, 맘에 드는군. 우리 ITF에 와서 일을 좀 도와줄 수 있겠나’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거기서부터 ITF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입니다.”
- 그래도 조상민은 ITF 골수파 아니냐고 말합니다.
“당시 ITF 의 수석사범으로 근무하면서 국제사범 교육을 맡아 사범들을 차출하고 해외에 파견하는 중요한 일을 맡았습니다. 당시 WTF와 ITF의 분규(통합) 수습위원으로까지 활동한 경력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태권도의 하나됨을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현재의 틀에 갇혀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조 사범에게 ‘당신은 ITF입니까? 아니면 WTF입니까’라는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져봤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저의 답은 태권도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태권도를 갈라 놓거나 찢을 수는 없습니다. 뿌리는 같으니까요. 화합의 정점을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끼어야할 대상(태권도)에 치우침은 필요치 않습니다.”
- WTF와의 인연은 어떻게?
“저는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정부의 태권도 일원화 정책, 다들 아시죠? 전 세계의 태권도 사범들을 한 데 모으기 위해서는 하나의 구심점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WTF 였던 것입니다. 당시 최홍희 총재는 북한과 깊은 관계를 보였습니다. 고민 끝에 조국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 이제부터 장소를 브라질로 옮겨 보겠습니다. 처음 출발은 어땠습니까?
“정부 차원에서의 파견이었다고만 밝히고 싶습니다. 당초 브라질로의 계획은 없었죠. 최홍희 총재가 미리 준비를 해놓았던 것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사모아 등지의 파견 사범들은 선원 신분으로 나갈 정도였으니까요. 통상적으로 사범들은 유학생 신분이었는데요. 1968년경 외무부와의 협의를 통해 처음으로 여권란에 ‘태권도 사범’이라는 직업이 생겨난 것입니다. 아직도 제가 가지고 있는 구 여권에는 태권도 사범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태권도 사범은 한국의 준 외교관이었습니다. 제가 먼저 정착을 하고난 2년 뒤에 가족들을 불렀습니다. 너무 예민하고 복잡하죠?(웃음) 당시의 시대상은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조상민 사범이 겨루기 자세를 시연중이다
- 당신을 브라질 태권도의 아버지라고 합니다.“1970년 8월 8일 브라질 쌍파울루에 최초의 태권도 도장을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밀집되어 있는 동네(RUA. concereiro furutado 1044 Liberdade SP)에 50여명의 영향력 있는 한국 교포들과 총영사를 초청해 개관식을 치렀죠. 그런데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당장 관원을 모집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가 남았던 것이죠. 엄청난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지역 내에서 가장 큰 축제에 시범공연 초청을 받았습니다. 얼마돼지 않는 한국인 수련생들을 모아 놓고 멋지게 시범을 했죠. 각 언론사의 관심이 쏟아졌고 이때부터 도장 경영은 상향선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개인지도를 하던 브라질의 유력 정치인인 한 수련생의 도움으로 CHO TAEKWONDO CENTER CLUB이라는 두번째 태권도장을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쌍파울로 위성도시에 30여개의 지관을 설립하게 된 출발점이 된 것이죠. 이렇게 브라질 내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고 도장을 개관한 최초의 사범이었던 까닭에 붙여진 명성이라고 봅니다.”
혼자였다. 낯선 브라질에서 하얀 도복을 입은 조상민을 그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다. 브라질은 주짓수와 카포엘라의 진원지였다. 여기에 이미 자리를 잡은 가라테의 텃새 때문에 그가 한국에서 가져온 ‘태권도’는 어쩌면 사막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진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겨냈다. 브라질 전역에 ‘날아다니는 귀신’ 조상민이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고 50여명의 한국 사범을 브라질에 정착시켰다. 그는 독종이 되어야했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이뤄낸 성공이었기에 그의 이름 앞에 ‘브라질 태권도의 아버지’라는 수식어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 왜 태권도를 고집하셨습니까. ‘코리아 가라테’를 사용했다면 정착이 쉬웠을텐데요
“만약 브라질에서 태권도 도장을 개관할 때에 ‘코리아 가라테(KOREA KARATE)’라고 간판을 걸었다면 오늘날의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에서의 태권도는 없었을 겁니다. 한국인이었고, 정부의 파견이었던 까닭에 가라테를 쓰고 싶지도, 쓸수도 없었습니다. 당장 돈을 쫓는 것은 수명이 짧습니다. 하지만 명예를 보면 생명이 길죠. 많은 분들이 저에게 ‘당신 돈 벌려면 코리아 가라테 간판 걸어’라고들 말했죠. 빨리 먹고 살려면 가라테를 붙이라고들 성화였습니다. 배가 고프고 가족들을 빨리 데려오기 위한 유혹이었지만, 조국에 당당하고 싶었습니다.”
브라질에서 8월 8일은 ‘태권도의 날’이다. 조상민 사범이 브라질에서 처음 도장을 개관한 날이기도 하다. 브라질복싱협회 산하에 태권도가 속해 있었던 당시의 시대상, 지금태권도가 브라질 내에서 올림픽 효자종목으로 취급되기까지 조상민, 그가 있었다.

조상민 사범이 소장하고 있는 무술용품들
-브라질 정착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교포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도장을 개관하고 하루 빨리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죠. 하지만 70년대 당시 브라질의 한인 사회는 둘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저는 현지에서 두 단체 중 하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한국에서 파견을 나온 태권도 6단의 깡패로 오해를 사고 있었죠. 이를 풀어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웃지못할 에피소드이죠. 그런 교포들과도 점차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시간이 약인 것 같습니다. 교민들이 돈을 모아 저의 첫 도장 오픈 자금을 마련해 주었을 정도로 나중에는 융화가 잘 되었죠.”
많은 태권도인들이 조 사범을 ‘의리 있는 남자’라고 평한다. 남의 일에 조건 없이, 대가 없이 도와주는 남자라고 말한다. 브라질 현지에서도 교민들의 영주권 취득과 우연치 않은 사건에 휘말려 형무소에 있는 동포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녔던 그다.
-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그리고 힘들었던 순간은?
“태권도인 조상민이 브라질 백과사전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내용인즉슨 '태권도 6단의 조상민 사범이 1970년 브라질에 처음으로 한국의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였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죠. 백과사전에 나의 천직인 태권도 사범으로 나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그 동안의 고생과 시련을 모두 보상받은 것 같은 기쁨이 넘쳐흘렀죠. 가장 힘들었을 때는 당연히 브라질 초기 정착 과정이었죠. 더운 나라라고 해서 반팔만 가져갔는데 겨울이 있더군요. 새벽이 무서웠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너무 추웠거든요. 밤에는 떨다가 아침이면 햇빛으로 가서 태양을 쏘이던 생활이었죠.”
- 조상민이 종주국에 던지는 질문?
“스포츠에만 치중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남태희 관장을 중심으로 한 선구자연합회가 발족하게 된 것입니다. 무도 태권도를 부활시켜야합니다. 현재 세계태권도연맹(WTF)의 교육에는 인성이 없습니다. 우선 무도정신을 가르치며 사람됨을 강조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번엔 좀 구체적입니다. WTF는 경기 도복과 룰을 바꾸어야 합니다. 월드컵을 예로 들어보면, 국가별 유니폼의 도입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기 룰입니다. 태권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권도입니다. 발도 쓰고 주먹도 써야한다. 지금처럼 상대를 건드리는 수준의 발차기로는 안됩니다. ITF에서의 좋은 점을 벤치마킹해도 좋습니다. 조정원 총재 역시 이런 건의들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 당신의 지도철학은 무엇입니까?
“지도자는 분명한 목적이 서야합니다. 목적을 망각하는 태권도인들이 많습니다. 또 사명감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성입니다. 무도정신을 가르치며 사람됨을 중시해야하는 것입니다.”
조상민 사범이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한 가지. "세계 태권도인들이 어느 나라를 가도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태권도인들의 휴식처 조성이죠. 장소요? 가능한 많은 국가들입니다. 꿈이 너무 크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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