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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태협 새집행부 구성


대한태권도협회(회장 김운용)가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지난 4월 30일 긴급소집된 임시이사회에서 이사진 전원이 사임의사를 밝힘에 따라 일부 인사를 사임 또는 경질하고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했다.

대한태권도협회 김운용 회장은 지난 4월 16일부터 19일까지 열린 2001년도 국가대표최종선발대회에서 심판 선정 및 판정과 관련, 파문을 일으킨 데 대한 책임을 물어 기술심의회 김영태 의장, 경기담당 황춘성 부회장 그리고 임윤택 전무이사를 경질했다.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새로운 전무이사에는 박종석 대한태권도협회 상임이사가, 기술심의회 의장에는 박종명 심판1분과 담당부의장이 선임되었다.

또한 전 기술심의회 의장 겸 이사였던 노상석 영동중학교 교장은 신임 경기담당부회장으로, 새롭게 신설된 교육담당 부회장직에는 이규석 경원대 태권도학과 교수(전 이사 및 아시아태권도연맹 사무총장)가 각각 선임되었다.



댓글 5

왕초가 띄우는글 2001.05.11
내용 : 김운용회장 그리고 서성원기자 에게---------- 태권도협회가 신성한 임원으로 구성되어도 태권도 백년 대계로 향한 대로에 수많은 난관과 고난을극복해내기가 어려운현실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집행부 라고 하는 작자들이 어떻게 깡패새끼 ( 전과범)가 세계를 자우하는 태권도협회의 전무가 될수있는가 다같이 생각해보시다.임윤택보다 돈보따리를 더주었는가. ----- 이기사를 참조하여주십시요 소문은 항상 -------------------- 동아일보 기사참조
편집자 2001.05.12
아래 내용은 오마이뉴스와 외신 매체에 동시에 전송된 기사 입니다. -------------------------------------------------------------------- 태권도계에 불었던 4.19 바람 OHMYNEWS 기자 www.ohmynews.com 시위 학생들의 뜻 관철 되었지만, 재도약의 책무는 집행부 몫, 신임 기술심의회 박종명 의장, 심판시절 팀 관계자가 보낸 선물(?)에 웃돈을 얹어 준 청천 지난 4월16일 부터 19일 까지 나흘간 국기원에서 벌어졌던 2001년도 국가대표 최종선발대회에서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임윤택 전무가 심판의 편파선정 및, 부정 판정에 직접 관여 했다는 이유로 일어났던 태권도학과(경희대,용인대) 학생들의 연합 시위가 5월8일 대한태권도협회의 관련자 문책으로 완전 타결 되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이어, 5월9일 경기담당부회장에 노상석.교육담당부회장 이규석.전무이사 박종석.기심회 의장에 박종명씨를 전격적으로 임명 했다. 공교롭게도 학생들이 첫 밤샘 농성을 했던 날이, 과거 1960년의 4.15부정선거에 궐기 해 이승만 타도를 외치며 일어났던 4.19와 같은 날이여서 태권도의 4.19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번 사태는 추후, 태권도계에 몰고 올 파장이 심상찮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1962년 9월16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설립된 이 후, 지난 1978년 10여개의 개별 관이 하나의 총본관(중앙협회)으로 통합 되었던 업적과, 1973년 5월23-25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그리고 최근에 결정된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에 버금가는 요적 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사태의 실질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4월19일의 국기원 철야농성은 동안 구태에 만연했던 기성 태권도인들에 대한 젊은 양심세력들의 정중한(?) 경고 로써 고질적이였던 경기장 판정 불신에 쇄기를 박는 현장 이였다. 종주국에서 벌어지는 한국 국가대표선발전은 많은 외국팀 관계자들의 전력 탐색의 전진기지적 성격이 강해, 비디오 촬영 조차 금지된 적이 있을 정도로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 이다. 그 중요한 곳에서의 부정 판정이 너무나 노골적이였으니, 집단 반발은 자연 발생적이라 할 만큼 예고 되고 있었다. 4월16일에 벌어진 첫 날 경기 때 부터, 이미 전무의 조카 두명이 심판으로 배정되었다.는 말이 나돌았고 경기 이틀째인 17일에는 비리를 보다 못한 심판원이 기자에게 비밀히 다가와 양심 선언을 하겠다는 심정을 토로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상식 밖의 부정 판정이 연일 계속 되었던 것이다. 부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소청과 항의도 빗발 쳤다. 마지막 경기가 밤 10시45분에야 끝날 수 있었다. 때문에 국가대표 선발전은 한국 스포츠 사상 가장 늦게 끝난 경기가 되어 버렸다. 헤비급 결승전인 현재화(계명대).차용희(가스공사) 선수의 경기가 그것인데, 이는 지난 1998년 2월18일에 있었던 태권도국가대표 예선전 170번 경기에서 남자 웰터급의 민병석(동성고)선수와 이상훈(영천시청)선수의 밤 9시35분에 끝난 최장 기록을 한 시간 정도나 넘는 진기록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당시의 기록(?)은 예산 삭감 차원에서 경기 일수를 줄이면서 벌어졌던 상황이여서 "이번 경기와는 본질적으로 경우가 다르다"는게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번 사태의 규모나 성격으로 보면 전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읽지 못한 태한태권도협회의 오만과 독선이 원인제공이 되었음은 제론의 여지가 없다. 먼저, 사태의 대처 능력이 너무 미흡했던 것이다. 경기 중에 경기분과 위원장이 난데 없이 "경희대.용인대학교의 교수들이 경기장 난입에 대해 사과 하였음으로 경기를 속개 한다"는 장내 방송을 했다. 교수들은 다시 경기장에 입장 해서 "우리가 언제 사과 했느냐? 잘못도 없는데, 왜 사과 하냐? 우리를 어용 교수로 만들 참이냐!"며 격분했고, 결국 집행부의 정정보도를 이정연 장내아나운서가 방송 하면서 경기가 속행 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임윤택 전무는 "경기장에 난입한 사람들의 사진을 다 찍어 놓았다. 대회가 끝난 후, 모조리 징계 하겠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오후 3시40분경에는 심판원들이 "자신들의 명예도 중요 하다. 학생들의 사과가 없으면 심판을 못 본다"면서 집단 퇴장 해 버렸고, 3시48분 경에는 경기부요원들 마져 퇴장 해 버렸다. 만약 어린이들이 이 장면을 봤더라면 "어른들이 숨박꼭질 한다."고 했을 정도 였다. 그렇게 해서 끝난 경기가 밤 10시45분 이었다. 심판원들은 사태를 예감 했는지 경기 직 후, 자리를 떠났고, 경기장에서는 입상자에 대한 시상식이 진행 되었다. 그 시간 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며 인간띠를 형성하여 국기원의 모든 문을 가로 막았다. 때문에 시상을 마치고 나가려던 집행부 임원들이 고립 되기도 했으나 학생들이 임원들의 귀가를 허용하는 성숙함을 보여, 별 다른 충돌은 없었다. 그 때가 밤 11시 였다. 밤 11시3분경 국기원 관리차장이 학생 대표부를 찾아 와, 한시적인 농성에 대한 조건부 협조를 제의 했으나 대표부는 "촛불을 켜 놓고라도 농성한다. "는 최후의 통첩을 했다. 이 때만 해도 어느 누구도 사태의 추이를 모르는 분위기 였다. 학생 스스로는 물론이고, 국기원 관계자.교수들 마저, 앞으로의 상황에 촉각을 세우며 오히려 기자에게 추이를 물을 정도 였다. 밤 11시10분경, 학생대표부가 김운용 회장과의 면담과 임윤택 전무의 퇴진을 요구하는 요지의 공동 선언문을 낭독 한 후, 즉석 기자회견을 하면서 사태는 장기전의 징후를 보였다. 그 때, 기자의 주머니에서 무엇이 떨어졌다. 오전에 4.19 국립묘지에서 있었던 4.19 의거 40주년기념식 취재 때, 착용했던 보도진 비표가 떨어진 것이다. 순간, 기자는 본인의 시계와 국기원 상단에 걸린 대형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4월19일 밤 11시59분을 가리킨 것이다. 곧, 20일 0시가 되던 순간, 만감이 교차 했다. 4.19의거 40주기기념식 현장을 취재 한 후, 접한 같은 날의 시위 여서 일까?... 차가운 국기원의 새벽 기온 마저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태권도의 4.19"가 성화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 붙은 태권도 바람은 뒷 날 밤 늦게 까지 계속 되다가 21일 에는 가두시위로 까지 확대 되었다. 경원대 태권도학과 학생들 까지 동참한 가두 시위는 전국화 될 것 같은 양상 이였다. 학생들의 시위가 가일층 심해지자 대태협은 뒤 늦게 진화에 나서며, 기자회견을 자청 하기도 했으나, 사태를 아전인수격으로 호도 하는 바람에 오히려 대 언론 역공의 빌미를 제공하는 우를 범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언론과 태권도를 농락 한다."는 역효과를 스스로 부추긴 셈이었다. 4월17일 기자에게 양심선언을 제보 했던 심판원이 심판원 공개 양심선언을 제기 할 무렵, 사태는 김운용 회장의 퇴진 운동으로 까지 비화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4월30일 대태협 임시 이사회에서 이사 전원이 사퇴를 하면서 소강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가, 5월9일 대태협이 문제의 집행부를 퇴진 시키고, 새로운 임원을 임명 하면서 진정국면에 접어 들었다. 임윤택 전 전무의 퇴진은 순수한 태권도학과 학생들에 의해서 도출된 청명 태권도의 시금석으로써, 무사안일한 기성 태권도인들에게 시사 하는 봐가 적지 않다. 이제 그 들이 만들어 놓은 깨끗한 캠퍼스를 꾸미는 것은 태권도 때문에 성공한 수 많은 수혜자(?)들 몫이다. 신임 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장 돋 보이는 인물이 기술심의회 박종명 의장 이다. 그는 현존하는 심판원 출신 중 가장 오랜 경력을 가진 사람 중의 한 사람 으로써 현역 심판원 시절, 팀 관계자가 선물(뇌물)을 가져 오면 자기 돈을 더 얹어 되돌려 보냈던 청명한 심판관 이였다. 그래서 그의 중용이 더욱 돋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이 개선 되지 않으면 그 역시 많은 난관에 봉착 할 것이다. 이번 사태에 도의적인 책임으로 퇴진한 경기담당 황춘성 부회장이 좋은 예이다. 그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효율적으로 성공 시킨 주역 이였고, 경기에 관한 규칙 제정에도 헌신적이 였다. 무늬만 경기담당 부회장 이였지, 담당 영역인 기술심의회 인사위원회 조차 참석치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평생 태권도를 위해 몸 바친 그는 그 흔한(?) 훈장 한 번 받지 못한 채, 쓸쓸히 퇴장 했다. 신임 박종명 기심회 의장이 아무리 깨끗하고 유능 하다고 해도 권리가 없는 책임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한 권리를 주면서 책임을 지우는 업무야 말로 종주국 태권도의 소신을 펼 수 있는 명예의 장인 것이다. 이번 태권도국가대표 선발전 파문으로 인해 선의의 상처 받은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종주국 태권도의 심판원 이였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며, 살아 왔던 올바른 심판원들이 그 들이고.......... 심판원 로비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박봉을 털어서 까지 제자를 키웠던 참된 지도자 들이 그 들 이다. 옥석을 가려야 한다. 지도자들...심판들..... 이란... 식으로 전부를 매도 해서는 않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볼 때, 학생들의 이번 시위는 타 시위에는 볼 수 없었던 절대적인 원칙이 지켜 졌다. 자신들의 뜻을 주장 하면서도 폭력이나 폭언이 없었고,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는 점이다. 시위자에 대한 징계와 배후설이 그 들을 과격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들은 용케도 참아냈다. 오히려, 김운용 회장의 IOC 회장 선거에 악영향을 의식하며, 노심초사 했던 배려의 흔적이 역력하다. 언필칭, 그 들의 순수성이 제2의 태권도 중흥기를 맞이 하는 시금석이 되었으면 한다. --------------------------------------------------------------------- 태권도가 우리의 국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내에서의 지명도가 적다. 114 전화에 문의해도... 택시를 타도... 국기원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태권도인들의 의식 변화가 절실 하다는 반증이다. 앞으로 NBC-1TV 제럴드 유욱 기자와 공동으로 무궁 무진한 태권도의 감추어진 미담을 취재 하려고 한다.
편집자 2001.05.12
아래의 내용은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스포츠 기사에서 발췌하여 올린 글 입니다. -------------------------------------------------------------------- 태권도계에 불었던 4.19 바람 오마이뉴스 이광윤 기자 시위 학생들의 뜻 관철 되었지만, 재도약의 책무는 집행부 몫, 신임 박종명 의장, 심판시절 팀 관계자가 보낸 뇌물에 웃돈을 더 얹어 되돌려 준 청천 지난 4월16일 부터 19일 까지 나흘간 국기원에서 벌어졌던 2001년도 국가대표 최종선발대회에서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임윤택 전무가 심판의 편파선정 및, 부정 판정에 직접 관여했다는 이유로 일어났던 태권도학과(경희대, 용인대) 학생들의 연합 시위가 5월8일 대한태권도협회의 관련자 문책으로 완전 타결되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이어, 5월9일 경기담당 부회장에 노상석, 교육담당부회장 이규석, 전무이사 박종석, 기심회 의장에 박종명 씨를 전격적으로 임명 했다. 공교롭게도 학생들이 첫 밤샘 농성을 했던 날이, 과거 1960년의 4.15부정선거에 궐기해 이승만 타도를 외치며 일어났던 4.19와 같은 날이여서 태권도의 4.19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번 사태는 추후, 태권도계에 몰고 올 파장이 심상찮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1962년 9월16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설립된 이 후, 지난 1978년 10여개의 개별 관이 하나의 총본관(중앙협회)으로 통합되었던 업적과, 1973년 5월23-25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그리고 최근에 결정된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에 버금가는 요적 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사태의 실질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4월19일의 국기원 철야농성은 동안 구태에 만연했던 기성 태권도인들에 대한 젊은 양심세력들의 정중한(?) 경고로써 고질적이였던 경기장 판정 불신에 쐐기를 박는 현장이었다. 종주국에서 벌어지는 한국 국가대표선발전은 많은 외국팀 관계자들의 전력 탐색의 전진기지적 성격이 강해, 비디오 촬영 조차 금지된 적이 있을 정도로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다. 그 중요한 곳에서의 부정 판정이 너무나 노골적이었으니, 집단 반발은 자연 발생적이라 할 만큼 예고된 것이었다. 4월16일에 벌어진 첫날 경기 때 부터, 이미 전무의 조카 두명이 심판으로 배정되었다는 말이 나돌았고 경기 이틀째인 17일에는 비리를 보다 못한 심판원이 기자에게 양심 선언을 하겠다는 심정을 토로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상식 밖의 부정 판정이 연일 계속 되었던 것이다. 부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소청과 항의도 빗발 쳤다. 마지막 경기가 밤 10시45분에야 끝날 수 있었다. 때문에 국가대표 선발전은 한국 스포츠 사상 가장 늦게 끝난 경기가 되어 버렸다. 헤비급 결승전인 현재화(계명대), 차용희(가스공사) 선수의 경기가 그것인데, 이는 지난 1998년 2월18일에 있었던 태권도국가대표 예선전 170번 경기에서 남자 웰터급의 민병석(동성고) 선수와 이상훈(영천시청) 선수의 밤 9시35분에 끝난 최장 기록을 한 시간 정도나 넘는 진기록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당시의 기록(?)은 예산 삭감 차원에서 경기 일수를 줄이면서 벌어졌던 상황이어서 "이번 경기와는 본질적으로 경우가 다르다"는게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번 사태의 규모나 성격으로 보면 전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읽지 못한 태한태권도협회의 오만과 독선이 원인제공이 되었음은 제론의 여지가 없다. 먼저, 사태 대처 능력이 너무 미흡했던 것이다. 경기 중에 경기분과 위원장이 난데 없이 "경희대, 용인대학교의 교수들이 경기장 난입에 대해 사과하였기 때문에 경기를 속개한다"는 장내 방송을 했다. 교수들은 다시 경기장에 입장 해서 "우리가 언제 사과 했느냐? 잘못도 없는데, 왜 사과 하냐? 우리를 어용 교수로 만들 참이냐!"며 격분했고, 결국 집행부의 정정보도를 이정연 장내아나운서가 방송하면서 경기가 속행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임윤택 전무는 "경기장에 난입한 사람들의 사진을 다 찍어 놓았다. 대회가 끝난 후, 모조리 징계 하겠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오후 3시40분경에는 심판원들이 "우리들의 명예도 중요하다, 학생들의 사과가 없으면 심판을 못 본다"면서 집단 퇴장해 버렸고, 3시48분 경에는 경기부요원들마저 퇴장해 버렸다. 만약 어린이들이 이 장면을 봤더라면 "어른들이 숨박꼭질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끝난 경기가 밤 10시45분 이었다. 심판원들은 사태를 예감했는지 경기 직후, 자리를 떠났고, 경기장에서는 입상자에 대한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그 시간 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며 인간띠를 형성하여 국기원의 모든 문을 가로 막았다. 때문에 시상을 마치고 나가려던 집행부 임원들이 고립되기도 했으나 학생들이 임원들의 귀가를 허용해 별 다른 충돌은 없었다. 그 때가 밤 11시 였다. 밤 11시3분경 국기원 관리차장이 학생 대표부를 찾아 와, 한시적인 농성에 대한 조건부 협조를 제의했으나 대표부는 "촛불을 켜 놓고라도 농성한다"는 최후의 통첩을 했다. 이 때만 해도 어느 누구도 사태의 추이를 모르는 분위기 였다. 학생 스스로는 물론이고, 국기원 관계자, 교수들마저 앞으로의 상황에 촉각을 세우며 오히려 기자에게 추이를 물을 정도 였다. 밤 11시10분경, 학생대표부가 김운용 회장과의 면담과 임윤택 전무의 퇴진을 요구하는 요지의 공동 선언문을 낭독 한 후, 즉석 기자회견을 하면서 사태는 장기전의 징후를 보였다. 그 때, 기자의 주머니에서 무엇이 떨어졌다. 오전에 4.19 국립묘지에서 있었던 4.19 의거 40주년기념식 취재 때 착용했던 보도진 비표가 떨어진 것이다. 순간 기자는 본인의 시계와 국기원 상단에 걸린 대형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4월19일 밤 11시59분을 가리킨 것이다. 곧 20일 0시가 되던 순간 만감이 교차 했다. 4.19의거 40주기 기념식 현장을 취재 한 후, 접한 같은 날의 시위 여서 일까? 차가운 국기원의 새벽 기온마저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불 붙은 태권도 바람은 뒷날밤 늦게까지 계속 되다가 21일 에는 가두시위로 까지 확대 되었다. 경원대 태권도학과 학생들까지 동참한 가두 시위는 전국화 될 것 같은 양상 이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가일층 심해지자 대태협은 뒤늦게 진화에 나서며, 기자회견을 자청 하기도 했으나, 사태를 아전인수격으로 호도하는 바람에 오히려 대언론 역공의 빌미를 제공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언론과 태권도를 농락한다"는 역효과를 스스로 부추긴 셈이었다. 4월17일 기자에게 양심선언을 제보했던 심판원이 심판원 공개 양심선언을 제기할 무렵, 사태는 김운용 회장의 퇴진운동으로까지 비화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4월30일 대태협 임시 이사회에서 이사 전원이 사퇴를 하면서 소강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가, 5월9일 대태협이 문제의 집행부를 퇴진 시키고, 새로운 임원을 임명하면서 진정국면에 접어 들었다. 임윤택 전 전무의 퇴진은 순수한 태권도학과 학생들에 의해서 도출된 청명 태권도의 시금석으로써, 무사안일한 기성 태권도인들에게 시사 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깨끗한 캠퍼스를 꾸미는 것은 태권도 때문에 성공한 수 많은 수혜자(?)들 몫이다. 신임 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 기술심의회 박종명 의장 이다. 그는 현존하는 심판원 출신 중 가장 오랜 경력을 가진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써 현역 심판원 시절, 팀 관계자가 선물(뇌물)을 가져오면 자기 돈을 더 얹어 되돌려 보냈던 청명한 심판관 이었다. 그래서 그의 중용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그 역시 많은 난관에 봉착 할 것이다. 이번 사태에 도의적인 책임으로 자문위원으로 감투를 갈아 쓴, 경기담당 황춘성 부회장이 좋은 예이다. 그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효율적으로 성공시킨 주역이고, 경기에 관한 규칙 제정에도 헌신적이었다. 무늬만 경기담당 부회장이었지, 담당 영역인 기술심의회 인사위원회조차 참석치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평생 태권도를 위해 몸 바친 그는 그 흔한(?) 훈장 한 번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실무에서 물러난 것이다. 신임 자문위원이 서열상은 부회장 보다 높다지만 실무에 강한 그를 한직으로 옮긴 것은 많은 아쉬움을 준다. 신임 박종명 기심회 의장이 아무리 깨끗하고 유능하다고 해도 권리가 없는 책임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한 권리를 주면서 책임을 지우는 업무야 말로 종주국 태권도의 소신을 펼 수 있는 명예의 장인 것이다. 이번 태권도국가대표 선발전 파문으로 인해 선의의 상처 받은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종주국 태권도의 심판원이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며 살아 왔던 올바른 심판원들이 그 들이고... 심판원 로비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박봉을 털어서까지 제자를 키웠던 참된 지도자 들이 그들이다. 옥석을 가려야 한다. 지도자들, 심판들 전부를 매도해서는 않된다. 결과적으로 볼 때, 학생들의 이번 시위는 타시위에는 볼 수 없었던 절대적인 원칙이 지켜졌다. 자신들의 뜻을 주장 하면서도 폭력이나 폭언이 없었고,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김운용 회장의 IOC 회장 선거에 악영향을 의식하며, 노심초사 했던 배려의 흔적이 역력하다. 언필칭 그들의 순수성이 제2의 태권도 중흥기를 맞이하는 시금석이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중징계로 퇴진한 임윤택 전 전무 에게만 책임을 전가 하는 무책임한 태권도계의 행태는 당연히 재고 되어야 한다. 거듭나야 된다. 그래야 태권도의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태권도가 우리의 국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내에서의 지명도가 적다. 114 전화에 문의해도, 택시를 타도, 국기원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태권도인들의 의식 변화가 절실하다는 반증이다. 앞으로 NBC-1TV 제럴드 유욱 기자와 공동으로 무궁 무진한 태권도의 감추어진 미담을 취재 하려고 한다.
대학 선수부 2001.05.13
경희대학교 선수부에 소속된 비교적 B급의 선수 입니다. 욕짓껄이가 많았던 태권도게에 고상하면서도 예리한 보도를 읽고 감짝 놀랏어요. 우리가 투쟁 할 땐느 기자가 왜 않오나 얼론까지 썩었다 생각했는데 언제 그렇게 정확히 취재 하셧어요. 시간대를 명확히 적엇다면 우리와 함께 하셧다는 예긴데 대단해요. 어쩌면 점잔하시게 표현 하니면서도 하실말씀을 통쾌하게 다 하십니까? 그렇게 깨끗한 심판도 계시다니 의외예요. 보다 열심히 운동해서 A급 선수가 되었을때 만납시다.
만남 2001.05.15
일선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관장입니다. 먼저 이번일에 대해서 뜨거운 성원을 보냅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어린 학생들이 했다는데 대해서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옮고 그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 해 주어야 할 원로 선배님들의 이견은 우리들을 방황하게 만드는군요. 누군가는 우리 태권도계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텐데!!!! 흔히 일선 관장님들을 모래라고 하지요. 그만큼 잘 뭉치지 못한다고 하는 말인데!! 모래에 물과 시멘트를 썩어서 잘 반죽을 하면은 튼튼한 콘크리트가 되지요. 정의와 명예, 태권도, 그리고 삶!!!!! 그것을 잘 반죽해서 무너지지 않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현재 나타난 현생을 보면 한편의 모노드라마 같은 정치판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슬픔니다. 빨리 태권도의 봄이 왔으면 합니다.